〈 211화 〉 짧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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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와 잠시 헤어지고, 카리스의 안내를 받아 성으로 들어가는 길.
난 바로 목적을 실행하겠다고 덤벼들 줄 알았다가 김이 팍 죽었다.
'함정 같은 것도 없고, 저번처럼 박수 치면서 달려들지도 않고.'
말을 좀 우스꽝스럽게 한 것도 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경비병을 둘러 쌓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평화적으로 응대하다니, 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바로 불구로 만들거나 하지는 않네?"
"아직 김민수를 확인 시켜 주지 않은 것도 있고,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다."
"무슨 만약?"
"차차 알려주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태양쨩."
내 앞에서 걷는 카리스와 옆에서 걷는 유이.
긴장감이 있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달라붙으니 뭐.'
날 견제하고 있어야 할 유이가 가슴골에 내 팔을 끼고 있으니.
아무래도 위기 상황이라기보단 데이트 코스를 안내 받는 느낌이다.
'멜라니는 지금쯤 우회해서 들어오고 있겠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다 계획을 짜둔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한 명은 포로로 잡혀 있는 마당에 나머지 동료랑도 거리를 벌린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혼자 무쌍 찍을 각오가 되어 있더라도 보험은 들어야 하는 법.
멜라니가 방치 하지 말라는 말을 여러 번 한 이상 철저하게 챙기는 게 맞았다.
'아니지, 챙긴다기보단 지금 상황에선 도움이 필요하긴 하니까.'
생각을 정리하며 카리스를 따라가길 몇십분.
"날 내보내 줘! 그리고 밥도 좀 주고! 미친 거 아냐! 날 이렇게 죽일 생각이라면!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 내가 여기서 나가면 진짜 큰일 날 줄 알아!"
김민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멀쩡하게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고 있어서, 입을 사과로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딱 코너만 돌면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얼굴도 볼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걸까.
"굶겼어?"
"시끄러워서 굶기면 힘이라도 빠질 줄 알았는데, 더 발악을 하더군."
"아... 그래."
카리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굉장히 신사적으로 대응했네.'
나 같았으면 바로 특단의 조치를 취해서 한 마디도 못 하게 했을 거다.
그리고 김민수와 관련된 부분에선 대부분 내가 맞았다.
그쪽은 전문가거든.
"어? 백태양? 백태양! 날 구하러 왔구나!"
"아냐 나도 잡혔어."
"어?"
"됐다."
지구에서 한 때 유행하던 밈을 사용한 후 카리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수가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도 된다는 신호였다.
"얌전히만 있어, 어련히 꺼내줄 테니까."
뭔가 빌런이 할 법한 대사였지만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멍청한 사람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고 했을 때,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었다.
일은 못하고 의욕만 열심히 하는 케이스가 얼마나 부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는 지.
이미 너무 많이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쪽으로 와라."
"어어 응."
난 카리스의 말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태양쨩, 있다가 잠시 둘만 있을 수 있어?"
"당연하지."
유이의 구애는 가볍게 받아 냈다.
카리스를 엿 먹이려면 그녀가 아주 아주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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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는 백태양 옆에 꼭 붙어 그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성에 딱 하나 있는 그 장소는 돈을 물 쓰듯이 만들어서 급하게 만든 공간이었다.
백태양이 온다는 말 하나로 유이가 직접 관리·감독까지 한 곳.
'뭐가 뭔지를 모르겠군'
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유이를 한 번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뭐? 죽이지 말자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진실'을 보여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고.
그때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카리스 마음대로 해.
'그럼 넌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유이.'
카리스는 백태양을 만나기 전 유이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백태양 편에 서서 변호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
여태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 생각이 있겠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파트너가 정말로 적의 편을 들기 위해서 저러진 않을 터.
실제로 '진실'을 보여 줘서 백태양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 한 쾌거가 없었다.
그는 빅토리 아카데미 학생 대표이자 인지도가 아주 높은 유망주인 만큼.
앞으로 선전을 할 때나 영향력을 보여 줄 때, 압도적인 효과를 누리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
카리스는 유이가 놈의 편에 서는 그런 괴상한 생각한 걸 자책했다.
"백태양, 본래라면 우린 널 죽이려고 했다."
"저번에는 불구로 만든다면서?"
"사정이 변했다. 아니, 너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맞겠군."
카리스는 유이의 말을 듣고만 이러는 게 아니었다.
백태양을 완벽하게 찍어 누를 자신이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사람은 급격하게 성장하지 않는다.'
예전에 백태양과 한 번 전투를 했을 때 그렇게 위협적이라고 느껴진 적이 없었다.
물론 그때 서로 전력이 아니라고 하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력을 숨겨봤자 3할.'
자신을 상대하는데 많은 힘을 숨기지는 못 했을 거다.
백태양이 아무리 길고 날뛰어 봤자 우리를 절대로 이기지 못할 거라는 점.
이게 카리스가 백태양에게 나름의 자비를 베풀어 준 행동의 근거였다.
"무슨 기회?"
"세계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기회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 세계에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편애를 받는 존재들이 있다는 거 말이다."
"...? 원래 다 그렇잖아. 잘나가는 1% 몇 명, 나머지 뭐 그런 느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단적인 예로 김민수를 들어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아아, 대충 뭔 소린 지는 알겠어."
타고난 재능과 부로 인한 어떤 성취나 직위 달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지성 찬양을 받는 것.
그게 카리스가 말하는 핵심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실을 너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알려 준 다음엔?"
"생각이 바뀌면 우리 노블에 들어오는 거고, 아니면 뭐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해야지."
"잠깐만, 니네도 노블이라고?"
카리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박수를 쳐 허공에 커다란 천을 만들었다.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천을 덮을 뿐, 그럼 넌 진실을 보게 될 거다."
"말하는 게 무슨 삼류 약장수 같네."
"...진행하지."
그는 백태양의 말을 무시하고 검은색 천을 씌웠다.
태초의 천.
절대로 혼자 벗을 수 없으며, 진실을 다 봐야만 탈출이 가능한 물건으로, 원래 세계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물건이다.
노블의 대부분은 이걸 보자마자 자신이 왜 이런 핍박을 받았는 지 이해하고 협력 하길 원했다.
'기대가 되는군.'
대부분 노블의 일원들은 진실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거냐 백태양.
"태양쨩..."
"...?"
유이의 걱정스러운 음성에 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길 바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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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원래 같았다면 김민수를 데리고 바로 탈출을 시도했을 거다.
멜라니가 후방 지원해주는 이상 짐 덩이 하나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근데 나도 갑자기 사정이 생겼단 말이지.'
사실 이것만 아니었다면 진실이고 노블이고 뭐고 다 무시 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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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퀘스트 발생!
지금 당장 카리스의 말을 듣고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달으세요!
보상 :: NTL 퀘스트 짧은 진실 보상 강화
페널티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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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뜬금없이 진실을 깨달으라는 퀘스트.
하지만 메인 퀘스트 보상이 강화 된다는 말에 잠자코 따르기로 결정 했다.
페널티도 없고, 이상한 수작도 아닌 듯 보였으니 이득 밖에 없는 거겠지.
'뭐가 나오려고 이러는 지.'
커다란 천이 얼굴부터 시작해 몸을 완전히 가리자 주변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천이 점점 투명해지고 밖을 비췄는데, 귀빈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마치 영화관 같은 의자와 눈앞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
이게 진실이다.
스크린에서 들리는 음성.
대체 뭐가 진실이라는 건지 의아해 하기도 전에 스크린 속 영상이 재생 됐다.
"...멜라니?"
가장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건 멜라니였다.
그녀는 매우 부끄럽고 수줍게 웃고 있었으며 누군가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거 결혼식인가? 아니 그리고 왜 나랑 멜라니 단둘만 있지?'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난 멜라니의 볼을 한 번 쓰다듬으며 굉장히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었고.
감상을 제대로 내뱉기도 전에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김민수.'
이번에 나온 건 김민수였는데, 얼굴 나잇대를 보아하니 지금 보다 어려 보였다.
빠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얼굴의 젖살이 바로 그 증거였다.
너 뭐야? 메인 스킬도 제대로 못 쓰고, 우리 조에 왜들어와서 괜히 민폐냐고!
아냐! 내 능력은 언젠가 세상을 바꿀 위대한 능력이야! 니들이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
허,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내가 언젠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글만 제대로 쓴다면, 니네! 니네 쯤은 그냥 짓밟아버릴 수도 있어!
영상 속 대화가 계속 되면 계속 될수록 난 혼란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영상은 멈추지 않고 또 다른 화면을 보여줬다.
보여 줄 게 너무 많이 남았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이해 못 하는 상황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난 바로 손을 뻗었다.
'어차피 정신 계열은 나한테 안 먹혀.'
알파메일 속에 들어가 있는 마녀의 축복은 그쪽으로 완벽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바로 천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태초의 천에게서 지금 스스로 벗어난 거냐?"
"불만 있냐?"
딱히 긴장감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무래도 진실을 보고도 생각이 바뀐 얼굴은 아니군."
"왜 그래서 죽이게?"
"그렇다."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전개.
얘가 원래 이렇게 단순한 얘였나 싶었다.
뒤에선 유이가 안절부절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몸정이 단단히 들었구나 싶었다.
"유감이다. 백태양, 난 우리가 함께 하길 바랐어."
짝 짝.
카리스가 박수를 두 번 치자 허공에 생성 되는 사람 만한 사이즈의 작두.
[폭군 발동! 아랫것들은 폭군의 얼굴조차 감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족화 발동! 탐욕의 주인이 현세에 강림합니다. 도망치세요! 그 무엇도 뺏기지 않도록 달아나세요!]
[현재 폭군과 마족화를 동시에 발동한 상태입니다. 신체에 강한 부하가 걸립니다!]
"그냥 너 패고 하나씩 들을란다."
처음부터 이럴걸.
깔끔하고 얼마나 좋아.
'유이는 빼고.'
어차피 이건 보여주기 식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다면 당연히.
"잠깐! 내가! 내가 나설게."
유이가 말려줄 걸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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