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카리스, 넌 평생 모르겠지.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민수가 잡혔다고 한 시점부터.
난 얌전히 멜라니와 함께 상어 굴에 있었다.
일명 존버.
존나게 버틴다는 뜻으로 상황을 계속 지켜본다는 말이다.
'굳이 나서서 뭘 할 필요가 없잖아.'
김민수가 포로로 잡힌 게 엄청 놀랍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놈이 뭐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아니고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니니.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10화 내로 나한테 두들겨 맞고 반신불구가 될 급.
그게 딱 김민수의 수준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누가 그랬냐는 거지.'
'어떻게'와 '왜'에 대한 부분은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어차피 김민수와 몇 마디 섞다 보면 그런 충동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이웃 나라에 납치 됐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누가 개입 한 거네.'
개입한 건 딱 봐도 비실이랑 흑갸루 쪽 애들이겠지.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나 예상외 행동을 하는 건, 누가 역할을 담당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나 마나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게이트에 들어와 바엘슨에게 했던 것처럼 수작을 부렸을 거다.
'이번엔 애초에 대역을 뺏지 않아도 되니까 더 수월했겠지.'
조연이라고 해봤자 하나 있는 이웃 나라 공주.
그녀에게 접근해서 스토리를 뒤바꿀 생각할 줄이야.
사실 비실이와 흑갸루는 아예 생각지도 못한 경우의 수였다.
'완벽한 변수네.'
고전명작[개구리 공주] 이후에 한동안 잠잠하길래 아예 존재 자체를 까먹고 있었다.
"그때 걔네라구요?"
"응, 진짜 오프너가 확실하게 있긴 한 모양이야."
오프너가 있으며 어디서 들어오는지도 모르는 미증유의 집단.
왜 있는지 모르는 노블보단 훨씬 더 빌런스러운 느낌이 났다.
오히려 이쪽이 원조 맛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목적이 뭔지를 대체 알 수가 없네요."
"그러게, 그때도 죽이지는 않고 불구로만 만들어 주마 이런걸 보면 뭐가 있긴 한데."
가물가물했던 기억을 멜라니와 공유하며 떠올려봤지만 이렇다 할 만한 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하는 거라곤 흑갸루, 아니 유이 보지를 따기 직전까지 갔다가 냅뒀다는 것.
언젠가 쓸 지 모르는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남겨 놨는데, 여기서 쓸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모호하네.'
그때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김민수는 절대 죽을 일이 없었다.
그게 존버를 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이기도 했다.
'우선... 멜라니는 육지에서 전투가 불가능하니 힘들겠어.'
몇 가지 대안이 있긴 했으나 다 너무 미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멜라니에게 약물을 먹이고 같이 육지로 올라가 김민수를 구출할 경우.
함정에 그대로 쏙 빠지는 꼴이 되기에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혼자 가는 것도 위험해.'
거기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혼자 간단 말인가.
심지어 바닷속에서 싸우면 더 큰 어드벤티지가 있는데, 이걸 굳이 버릴 이유도 없었다.
"근데 사람 생각 다 똑같다고 서로 이렇게 대치 상태가 계속 되면 어쩌죠?"
"그러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거였다.
멜라니의 말대로 서로 나타나지 않고 버티고만 있으면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위험하다고는 했지만 차라리 혼자 가는 게 정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네요."
"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
갑자기 굉장히 멍청한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냥 다녀올게."
"네?!"
"아니지, 같이 다녀오자."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견적만 보다간 아무것도 못 하고 계속 멍청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이러려고 주인공 지분율 50%를 넘긴 게 아니었다.
'기민스 할 때처럼 해야지.'
뒤 없이 시원하게 찐따 하나 짓밟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겁먹은 듯 행동하다니.
쪽팔림도 이런 쪽팔림이 없었다.
아무래도 멜라니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에 소극적인 자세가 나온 모양이다.
"왜 그런 생각한 건데요?"
아까까진 얌전히 기다리다가 생각을 바꾼 게 궁금하긴 하겠지.
근데 이건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
본격적으로 주인공 활동을 하겠다고 한 자존심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난 우리 둘이서 같이 다리를 얻고 나가면 그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 말을 할 때 포인트는 근거도 없이 밀어붙여야 하기에 신체 접촉이 필수라는 점이다.
따라서 멜라니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금칠하면서 막... 그래요? 설마 이인조 중에 그 여자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지금?"
이런 너무 은근한 눈으로 쳐다봤나.
"아냐, 유이랑은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유이? 허, 이름까지 알고 있어요? 아 하긴 데이트도 했으니까 뭐 이름으로 부르는 건 완전 기본이다 이건가요? 일본 사람 부를 때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건 친하다는 증거라던데!"
옆에서 얌전하던 멜라니가 기관총처럼 말을 쏟아붓는다.
와, 이건 진짜 생각도 못한 건데.
이야기가 이렇게 드리프트를 할 줄이야.
"아냐, 진정하고 일단 내 말부터 들어봐 정말 그때 데이트 때 네가 생각할 만한 일 아무것도 없었고, 이름은 그냥 유이라는 게 입에 감겨서 그런 거야. 나 걔 성도 몰라."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모하라 유이, 흑갸루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태닝한 갸루이기 때문 보지는 태닝하지 않은 핑크빛으로, 아주 탱탱하고 처녀인 게 특징. 보지 빨 때 파르르 몸이 떨리는 게 아주 일품이야.'
이런 구구절절한 인적 사항을 다 말하는 것보단 무조건 거짓말이 정답이었다.
게다가 질투의 화신처럼 눈에 불을 활활 켜고 있는 멜라니한테 이걸 그대로 말한다면.
작전이고 뭐고 배에 구멍이 뚫릴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만.'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일단 알았어요. 그럼 간다고 치고, 방법은 어떻게 할 건데요? 목소리를 대가로 다리를 만들면 너무 페널티를 안고 가는 거 아닌가요?"
가뜩이나 이미 불리한 조건에 뛰어드는 거잖아요.
멜라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다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인어 왕한테 부탁하면 돼."
부탁이라고 쓰고 협박이라고 읽는다.
막내딸 목숨을 담보로 목소리 두 개 정도만 달라고 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나중에 게이트가 클리어 된다면 목소리는 알아서 돌아갈 테니 뒷수습도 완벽했다.
만약에 무력 시위를 할 경우 이쪽이 더 강하니 찍어누르면 상관없는 일.
무조건적으로 성공할 수밖에 없는 계획이나 다름없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되게, 질투가 막 났나 봐? 나랑 딱 붙어서 가슴도 빨라고 했으면서."
"그건 당신이 하고 싶다고 하니까 그런 거죠!"
난 대화 주도권을 가져오자마자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멜라니의 반응을 즐겼다.
뽀록 뽀록.
그녀와 대화하면서 깨닫게 된 인어 상식이 하나 있었다.
인어는 성적으로 흥분할 때 보지 물이 나오는 대신.
'아까 거품이 우연이 아니었구나.'
거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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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바 내가 뭐랬어? 인어 왕한테 부탁하면 된다고 했지?"
"제가 봤을 때 당신은 진짜 악인 그 자체예요. 어떻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비 앞에서 딸들 목소리를 강탈해요?"
"어쩔 수 없었잖아. 그리고 게이트 내 존재니까 너무 그렇게 감정 이입하는 것도 안 좋아."
"...그렇긴 하죠."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목소리도 잃지 않고 멀쩡한 두 다리를 얻었으며, 후한없이 아주 깔끔했다.
단점이라고는 멜라니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데.
'사소하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는 여자였기 때문에.
흑갸루와 비실이랑 대치하게 된다면 죄책감 같은 감정이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그나저나 그 이후로 요약본에 내용이 추가된 게 없는 거 보면 진짜 콱 박혀 있네.'
이웃 나라라고 해봤자 어차피 바닷속으로 이동하면 금방이었다.
바다를 낀 왕국의 이웃이라 항구가 기본으로 있기에 찾기도 쉬웠다.
"바로 왕국으로 가자."
"그래도 돼요?"
"경비병 같은걸 걱정하는 거지? 근데 이게 음... 우린 주연이니까 괜찮을 거야."
현실이었다면 모를까 게이트 내, 그것도 고전명작 속에 있는 만큼 주연들은 이런 부분에서 엄청난 보정을 받는다.
내가 [춘향전]에서 변 사또일 때 암행어사를 죽도록 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고전명작 속에선 주연이 하는 행동은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경향이 아주 강했다.
'이 짓도 한두 번이지.'
김민수보다 주인공 지분율이 높아진다면 고전명작은 아마 더 이상 안 나오지 않을까 싶다가도.
흑갸루랑 비실이가 얼굴도장을 간간이 찍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속이 달라지지 않는 법.
대체 안뚱땡은 언제까지 고전 명작을 찍어낼 생각인지 원.
'트롤 왕국 좋았잖아.'
아주 간단하게 몬스터 잡고 끝.
이 얼마나 깔끔하고 직관적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하며 멜라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길 몇십 분.
"이야, 우리 올 줄 알고 이렇게 마중 나와 있던걸야?"
"긴 말하지 않겠다. 백태양, 김민수를 구하고 싶다면 순순히 투항해라."
한참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우릴 포위하는 경비병들.
그리고 아주 거만하게 웃고 있는 카리스와 뒤에서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는 유이가 나타났다.
멜라니는 불안한 감정을 지닌 눈동자로 날 쳐다봤고.
난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근데 여자는 보내줘 용건은 나한테만 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할 줄 알..."
"알겠어, 너만 와 태양."
역시.
내가 떡밥을 아주 잘 뿌렸다니까.
"...? 유이?"
"왜? 저 여자는 필요 없잖아. 아니면 저 여자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 그건 아니지만."
유이와 다시 만나 그녀의 눈동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아마 그녀가 인어였다면 지금쯤 허공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을 거다.
'카리스, 넌 평생 모르겠지.'
포로로 잡혀 있는 김민수도 패고.
얘네 목적도 겸사겸사 듣고.
'기대되네.'
벌써 즐거워질 생각에 진한 미소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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