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멜라니를 따먹는다.
* * *
'대충 짐작은 간다.'
수진이와 유민이가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파워업 이벤트를 준비하는 이유.
전형적으로 주인공이 강해질 경우 동료가 향상심을 느끼고 결심하는 뭐 그런 류겠지.
정보창에서 나왔던 문자 그대로의 해석만으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성녀도 그렇고... 멜라니도 그렇고...'
용사와 약혼자를 참교육해버린 남자.
이 두 개에 비해 유민이와 수진이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건 사실이었다.
스토리 시간대상 초반에 만났던 만큼 스케일이 작았던 건 어쩔 수 없을 터.
하지만 이런걸 그녀들이 알 턱이 없을 테니 곧바로 수련하러 떠난 거였다.
'나한테 걸맞은 여자가 되기 위해서.'
고맙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괜히 사서 고생을 시키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민이 같은 경우야 메인 스킬을 제대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렇다지만.
수진이는 메인 스킬조차 다른 히로인들에 비해 밀리는 감이 있었다.
유일하게 상시 발동형이 아닌 각성자.
'사실상시 발동형이 아닌 게 정상이지만.'
끼리끼리 노는 거라고 아무래도 주인공 주변에 있는 만큼 특별한 자들이 모이기 마련.
그런 의미에서 수진이는 내가 직접 고른 등장인물으로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개인 훈련이라고 해서 마냥 띵가띵가 놀라고 하는 게 아니다. 특별한 계획이 없을 경우 나태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아카데미 측에서 따로 개인 맞춤 프로그램을 설계 해 줄 예정이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가지 말고 충분히 생각한 뒤에 설계를 부탁하도록.
스스로 강해지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니 말이다.
장두철은 말을 끝내자마자 칠판에 커다랗게 자습이라고 쓰고 교실을 나갔다.
반 애들은 대부분 뭘 어떻게 해야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칠판을 바라봤다.
아카데미에서 아카데미를 나오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훈련하리니 당황할 수밖에.
'1학년이기도하고.'
3월부터 다녔다고 해도 이제 고작 3달 다녔을 뿐.
실상은 인성 교육 시절의 영향이 더 클 시기였다.
지구에서나 보던 주입식 교육 끝에 자율 학습을 하라고 했더니, 멍하게 있는 뭐 그런 상황과 흡사했다.
"난 그럼 먼저 가 볼게, 미리 신청서를 내면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김민수였다.
나름 부반장이라는 직위에 겉멋이 든 건지 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잃어 버린 걸 찾아야 하기도하고 말이지..."
그 말을 내뱉으며 날 노려보는 김민수.
난 아무 말없이 그저 주먹을 올렸고, 민수는 그걸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반을 나갔다.
'반 애들이랑도 친해져야 되는데.'
입학하자마자 너무 굵직한 일들만 겪다 보니 반 애들 이름조차 몰랐다.
아주 처음에 김민수한테 접근하려고 애들이랑 몇 마디 나누긴 했다만.
그거 몇 번 들었다고 외웠을 정도면 이미 다 친해졌을 거다.
지금 반 애들과 나의 심리적 거리를 따져 본다면.
과장 좀 해서 연예인과 일반인의 차이 정도일 거다.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니 섞이지도 않고, 섞일 생각도 하지 않는 거겠지.
'됐다.'
이제 와서 갑자기 친해지는 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친해지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드르륵
"어디 가?"
감사하게도 말을 걸어 준 동급생.
"고라니 잡으러."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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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강철로 막혀 있는 방.
창문조차 빛 하나 들지 않고 오직 천장에 있는 등만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여긴 안전하겠지.'
카이반 한국지점과 가까우면서도 가장 안전한 장소.
기민스는 그곳에서 철저하게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말해 봐!"
경호원의 말에 기민스가 반색했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놈은 세상에 없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발견 된다면 그 즉시 백태양을 사회적으로 매장 시킬 수 있을 터.
그러나 기민스는 경호원의 입이 열리고 말을 내뱉을 때마다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게... 저희도 의아함을 느끼고 몇 번이나 조사해봤지만..."
가족 관계 파악 불가, 과거 알 수 없음.
가장 최근에 발견된 자료는 몇 달 전 술집에서 각성자와 싸우며 각성한 것 정도.
그 외엔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간에 전부 다 공개된 정보였고, 유의미한 건 없었다.
그야말로 유령을 조사한 수준이었다.
"아니 대체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어떻게 흔적 하나 안 남길 수 있는 거지? 뭐냐고! 이 새끼 대체 뭐…"
쾅! 쿠르르 쾅!
야 막아! 막으라고!
어떻게 막아요! 못 막습니다!
도망쳐! 다 튀어!
기민스의 말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금방 묻혔다.
"뭐...뭐야?! 무슨 일이야.?"
"잠시만...네? 뭐? 오...오고 있답니다."
"누가 오는데!"
쾅!
강철로 만든 문이 종이박스 마냥 찌그러지며 날라간다.
잠깐 생기는 흙먼지.
그리고 그 흙먼지를 뚫고 들어오는 백발의 사내.
"나, 내가 오고 있다고 하는 거잖아."
백태양이었다.
"야 너 진짜 꼭꼭 숨어 있었구나."
백태양에게 실컷 얻어터진 다음에 기사가 뿌려진 후.
기민스는 철저하게 벙커를 만들고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그 어떤 기사에도 대응하지 않고 따로 기자 회견을 열지 않은 단 하나의 이유.
완벽한 반격의 순간을 잡기 위해서였다.
'이건 말도 안 돼.'
여길 들어온 건 둘째치고 어떻게 안 거지?
그런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백태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친히 네비 붙여줬잖아."
백태양은 말을 내뱉으며 막힘없이 기민스에게 걸어갔다.
"내가 여러 번 생각해봤어. 널 어떻게 처리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일회성 캐릭터 같은데 뭔가 또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하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뭘 말하는 거냐고!"
일회성 캐릭터는 뭐고 사연은 또 뭐란 말인가.
기민스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 즉각적으로 뇌에 넣지 못 했다.
그가 살던 곳에선 이런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었다.
모든 일에 절차가 있었고 그걸 최종적으로 검사하고 진행되는 방식.
그 방식의 꼭대기에 있던 기민스는 이런 야만적인 방법에 적응하지 못했다.
기민스가 적응하던 말던 백태양은 계속할 말을 내뱉었다.
"니네가 카이반 그룹을 도와 줬다며? 그리고 그걸 구실로 삼아서 약혼자라고 밀어붙이고 있고... 이게 너무 구린 냄새가 나잖아."
타이밍도 그렇고.
저벅저벅.
백태양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기민스는 뒷걸음질 쳤다.
"우왓!"
그러다가 발이 꼬여서 뒤로 엎어졌지만 그는 뒤로 물러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경호원들은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긴장으로 인해 몸이 굳어서 마네킹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분명 뭐 이벤트가 있는 거겠지, 결혼식 깽판이라거나, 니네의 뒤가 구린 수작을 밝혀내거나 하는 그런 거 말이야."
"무...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기민스는 더 이상 말을 놓지 않았다.
계속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며 다가오는 백태양이 두려웠다.
사람을 웃으면서 떡이 되도록 패고, 머리채를 잡고 아침 산책을 나가듯이 공항을 돌아다닌 그가.
너무나 무서웠다.
"그런 걸 해도 괜찮았을 것 같아, 나쁘지 않고. 근데 있잖아."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건 김민수 하나로면 족해.
이름이 비슷해서 어디까지 하나 보려고 했는데 답답해서 못 해먹겠어.
이렇게 바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걸 내가 왜 질질 끌어야 해?
광기마저 깃들어 있는 말에 기민스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벌벌 떨었다.
"대체 워,워워,원하시는 게 뭔데 이러시는 거예요..."
"알잖아."
즉답.
백태양은 몽둥이를 기민스 머리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짧은 정적.
그 작은 행동에 기민스는 모든 걸 이해하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멜라니한테 집적거리지 않겠습니다. 편입도 취, 취소하겠습니다."
"그래, 그리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그 말을 끝으로 백태양은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야말로 폭풍 같은 존재였다.
++++++++++
기민스에게 확답을 받고 나오는 길.
콧노래를 부르며 로시난테를 소환했다.
[로시난테 발동! 안전 운전 하세요!]
'쉽네.'
처음부터 이럴걸, 왜 강태민한테 뒷조사를 시켰을까.
'더 이상 질질 끌려다니고 싶지 않아..'
경제적인 압박은 보금자리에서 막아주고, 폭력 건은 경호원을 잡아서 실토한 걸 녹음했기에 상관없었다.
날 뒷조사한 이유와 목적을 녹음하고만 있어도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보복을 미리 예방 하려고 처들어갔다고 말하면 무난하게 해결이 될 테니까.
'이게 맞아.'
아까 기민스한테 말했던 것처럼 놈을 가만히 냅뒀다간 또 수동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놈이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바보처럼 기다리다가 뒤처리를 담당하는.
그런 건 이제 사양이었다.
'애초에 기민스의 존재도 멜라니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있던걸잖아.'
그놈을 잡으면서 뭐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
그렇게 친해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하면 되는 걸.'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이제 뭘 하고 싶은 지 결정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멜라니를 따먹는다.'
드디어 방치해놨던 멜라니를 안을 차례가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