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용사라고 불리지 못한 자
* * *
"즐거웠어, 여기서 기억은 다 잃을 거야, 괜히 이용만한 것 같아서 미안 하네."
"괜찮습니다. 도움됐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영광입니다."
"페르쿠스. 성녀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늘 너에게 의지하는구나."
"그것조차 전 좋습니다. 늙은이가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써 주시지요."
그리 말해 줘서 고마워.
다음엔 이런 일 말고 정말로 단둘이서 티를 마시자.
잘 가.
루베니아는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있던 페르쿠스를 돌려보냈다.
아주 짧게 나눈 몇 분 동안의 대화.
하지만 루베니아는 몇십년간의 평온을 단번에 맛보았다.
어쩌면 이 앞에 벌어질 일 때문에 더욱 그런 감정을 느낀 걸 지도 몰랐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툭 툭 툭 툭.
페르쿠스와 작별하고 난 후.
루베니아는 탁자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초조해 보이는 손가락 두드림과 여유롭게 다리를 꼬는 미스 매치.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왔군."
쩍 저저적 쩍!
하얀 공간이 책처럼 찢겨지며 한 존재가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두툼하게 접힌 턱살과 머리 가슴 배로 나뉠 듯한 삼등신 체형.
어울리지 않는 명품으로 잔뜩 치장한 과장된 패션까지.
"루베니아! 무슨 짓을 한 거야!"
"왔어? 오랜만이야. 그러니까 음... 아 맞아 안뚱땡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랬지?"
실루엣만으로도 누군지 바로 알아 맞출 수 있는 안뚱땡의 등장이었다.
안뚱땡은 루베니아가 있는 곳까지 단번에 걸어가며 분노를 드러냈다.
"나한테 협력하겠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나! 날 속였어!?"
"널 속인 적 없어, 그때 한 약속을 어기지 않은 증거로 난 멀쩡하게 존재하잖아?"
"...넌 주인공을 돕겠다고 했어."
"맞아, 난 주인공을 돕고 있어."
우리가 서로 생각하는 주인공이 다른가보지.
루베니아는 그리 말하며 일부러 웃음소리를 밖으로 흘렸다.
누가 봐도 명백한 비웃음.
"사실 김민수가 아카벨름에 들어올 때부터 네가 올 걸 알고 있었어, 니네 둘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아니 둘'만'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하나 이제.
뒷말을 이으며 루베니아는 안뚱땡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도 일단 뽑아서 다행이네.'
백태양에게 성검을 뽑으라고 말한 뒤.
루베니아는 당연히 그가 성검을 쉽게 뽑을 수 있도록 안배를 하려 했다.
그러나 김민수가 아카벨름에 타이밍 좋게 들어왔고, 그로 인해 안뚱땡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루베니아가 아카벨름에서 백태양을 부른 것처럼.
아카벨름에서 능력만 된다면 역으로 루베니아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가능해진다.
더군다나 힘을 일시적으로 회복했던 안뚱땡이라면 더 쉬운 일이었고 말이다.
"무슨 짓을 했길래, 백태양이 저걸 뽑은 거지?"
"말했잖아. 난 주인공을 돕는다니까?"
안뚱땡은 이 분노를 바로 발산할 방법이 없어 그저 발만 쿵쿵 굴렀다.
"젠장! 젠장! 젠장!"
김민수가 아카벨름에 들어오자마자 안뚱땡은 바로 성검에 수작을 부렸다.
주인공을 돕기로 한 루베니아도 손 쓸 수 없도록 하는 묘수.
그건 바로 주인공 지분율이 많은 쪽만 성검을 뽑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루베니아도 김민수를 도울 수밖에 없으며, 민수는 자연스레 성검을 뽑게 된다.
"먼저 뽑겠다고 했어야지! 민수야!"
이 계획에 변수는 단 하나.
백태양이 먼저 성검을 뽑는 시도를 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당연히, 무조건 민수가 먼저 뽑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최악이다.'
하지만 김민수의 뼛속까지 깊게 각인 되어 있던 패배 본능이 백태양을 두려워했다.
첫 만남부터 한 번도 이기지 못 했던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각인이.
자연스럽게 백태양을 우선하고 몸을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젠장! 젠장! 젠장!"
대체 어디까지 사람 속을 썩이려는 거야.
안뚱땡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루베니아를 노려보는 것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공이 뽑았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좋잖아?"
물론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루베니아는 바로 안뚱땡을 약 올렸다.
"이 개자식이 진짜! 난 신이라고! 절대적 존재! 작가란 말이야! 무적이라고!"
안뚱땡은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순 없었는지 바로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명백한 공격 행위.
하지만 루베니아는 아까완 다르게 긴장조차 하지 않고 여유롭게 그를 주시했다.
촤라라라라라락.
루베니아의 얼굴에 위치한 책이 수도 없이 넘겨지며 단번에 마지막 장까지 도달한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용사 김민수'.
그 글자들이 천천히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젠 더 이상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됐네."
안뚱땡이 루베니아를 아카벨름에 처박은 뒤 나눴던 맹세.
아무런 이유 없이 김민수를 용사로 만들고, 그걸 계시로 내린 치욕스러운 순간들.
이젠 다시는 떠올리지 않아도 될 과거였다.
"...이...이게 무슨...!"
"처음부터 웃기지도 않은 설정 노름 하느라 힘들었어."
이제 애들 장난 같은 짓거리도 끝이야.
루베니아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간다.
1권이 끝났으니 자연스럽게 다음 권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마지막 장을 끝으로 새로운 책이 루베니아의 얼굴에 자리 잡는다.
'성공했군.'
사실상 도박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성녀조차 힘을 거의 잃고 있는 상황에서 안뚱땡에게 방해까지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교황을 통해 힘을 보태는 게 전부였다.
'백태양은 근데 대체 뭐길래 그런 짓이 가능한 걸까.'
안뚱땡이 수작을 부린 건 사실 이렇게 쉽게 깨질만한 게 아니었다.
어떤 진리나 법칙, 예를 들면 사과가 빨간색이라는 당연한 이치.
그런 절대불변을 성검에 집어넣었는데 그걸 한 번에 뽑을 줄이야.
"근데 계속 쒸익쒸익 거리고 있어도 돼? 이러고 있을 시간 이제 없잖아."
안 돌아가도 돼?
그 말을 듣자마자 안뚱땡은 아차 싶었는지 바로 등을 돌렸다.
"두고 보자 루베니아! 뽑는다고 쓸 수나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슨 짓해서라도 막을 거야!"
"이제 볼일 없어, 책이 바뀌었잖아."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고 안뚱땡이 사라진 후.
루베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달달 떨리는 손으로 티를 마셨다.
"이 정도면 난 할 일 다 했어.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 작은 읊조림을 끝으로 루베니아는 천천히 쓰러졌다.
너무 많은 힘을 쓴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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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게 무슨...?"
페르쿠스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분명 강렬하고 신선한 경험을 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루베니아님인가...'
백태양과 김민수를 안내할 때부터 기억이 끊겼다.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감정만 남아 있기에 마음이 따듯해지려고 했으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마...마족...?"
마족이 성검을 들고 있다니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심지어 느껴지는 기세와 강압적인 기운으로 짐작건데, 최소한 군주급이었다.
나라 무너트린다는 힘을 지닌 군주급 악마가 어떻게 아카벨름에 있는 거지.
"빛이여!"
파악은 빨랐고 판단은 짧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족 척결이 먼저였다.
그렇게 페르쿠스가 바로 멸악을 시도하려고 움직였을 때.
마족이 입을 열었다.
"교황님! 접니다! 저예요! 백태양!"
"에...? 예? 뭐라구요?"
백태양? 악마가 아니라 백태양이라고?
자세히 보니 얼굴이 완전히 똑같았다.
"이건 잠시... 어쩔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백태양이 원래 페르쿠스가 알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퀴퀴한 석탄 냄새와 온몸에 전반적으로 펼쳐진 묵빛 금맥.
동양풍 왕의 옷차림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성검을 뽑으려다가 그만."
"그 음..."
페르쿠스는 말을 하기 전에 우선 성검이 무사한 지부터 확인했다.
땅 째로 뽑아올린 성검은 다행히 손상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라도 마족의 영향을 받아 오염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했으나 아주 멀쩡했다.
"저건 뽑았다고 할 수 없잖아요! 검이 제대로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게다가 저는 아직 기회조차 얻지 못 했다구요! 이건 불공평합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김민수가 바로 입을 열었다.
충분히 근거가 있는 말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페르쿠스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쾅! 쾅! 콰과과과광!
백태양이 성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말하면 성검에 붙어 있는 바위를 조각하고 있었다.
"주절주절 떠들지 마, 내 손에 이렇게 딱 붙어 있는데 이게 어떻게 뽑은 게 아니야."
헛소리 하지 말고 돌 조각 맞기 전에 물러나 있어.
김민수는 뭐라고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소음에 바짝 쫄아 입을 꾹 다물었다.
쾅! 쾅! 쾅! 쾅!
"그, 그래도 나름 성물이니 조금 살살 다뤄주게나."
페르쿠스가 걱정할 정도로 백태양은 거칠게 성검을 다뤘고.
"후, 이제야 성검 같네."
정말 딱 성검에 칼집을 꽂은 느낌으로 바위를 완벽하게 조각해냈다.
'이 정도면 성검이 아니라 성둔기군.'
페르쿠스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틈에 민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니 마음대로 하는 거야! 교황님! 저에게도 기회를 주셔야죠! 그렇죠?"
민수의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은 페르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벽하게 생각이 정리가 됐기 때문이다.
"봤지? 고개 끄덕이신 거? 내려놔 백태양! 내가! 내가 용사야!"
"김민수 생도, 그만하시지요. 당신은 더 이상 용사가 아닙니다."
유치한 애들 장난 같은 설정.
'성검을 뽑으면 용사'라는 신의 계시.
그 계시에 따라 지금 운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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