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성검을 뽑는다는 것
* * *
짝!
……씨
짝!
…양씨
짝!
"태양 씨!"
"예?"
루베니아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정신을 잃은 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성녀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패고 있었다.
짝!
"정신 차리세요!"
"차렸습니다."
"꺅!"
나한테 악감정 있는 거 아냐?
그런 의심이 들 정도의 싸다구를 여러 번 맞은 볼은 팅팅 부어 있었다.
성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나와 거리를 벌렸다.
멱살까지 잡고 뺨을 치고 있던 건지 옷이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다 때리신 다음에 놀라시면..."
"저...저도 급해서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잘 몰라가지고..."
그러고 보니 아카벨름에 들어오자마자 루베니아가 깃들었다고 했었나.
'하긴 정신 차리니 내가 기절해 있고, 자기도 기억 없고 그러면 당황할 만하겠네.'
이해는 됐지만 그렇다고 그게 뺨을 이렇게 거칠 게 후릴 문제였나 싶었다.
난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머릿속에서 탈탈 털어냈다.
나중에 물어보면 될 문제기도 했고,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가 루베니아와 만났습니다."
"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하게 놀란 표정.
저게 연기라면 세상 믿을 사람 아무도 없는 수준이었다.
"어떻게요?"
"성녀님 몸을 매개로 삼아서..."
여기서 잠시 말을 골랐다.
'대부분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네.'
내가 빙의된 것부터 시작해서 안뚱땡의 비밀 그리고 김민수에 대한 부분까지.
섣불리 꺼낼 주제도 아니었고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성검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성검을 뽑으라는 루베니아의 마지막 말.
이 부분은 혼자 가지고 있어서 해결 되는 게 아니었다.
"성검을 뽑으라고 하셨다구요?"
"네."
확실히 뭐가 있긴 한 건지.
성녀는 성검 이야기를 듣자마자 표정이 굉장히 진지해졌다.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멈췄다가 고민하기를 수십 번.
몇 분 정도 흐르고 나서야 성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건 좀... 곤란해요."
"왜죠?"
곤란하다는 말에 난 바로 질문을 던졌다.
'아니 루베니아가 뽑으라는데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믿고 있는 신이 하라는 걸 성녀가 거부하다니.
"그,그게..."
곤란하다는 말 이후로 얼굴이 완전히 시벌겋게 물들어 고개를 푹 숙이는 성녀.
루베니아에 오고 난 뒤로 전개가 쭉쭉 나가서 좋은데, 알 수 없는 부분이 늘어나니 난감했다.
뭔지를 알아야 이러는 지 이해라도 할 텐데.
아무 정보도 없으니 내 눈엔 그저 성녀가 방해를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부분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묘한 정적이 아카벨름을 채우려는 순간.
뒤에서 정중한 음성이 들렸다.
"성녀님은 강림을 하셔서 힘드실 테니 일단 들어가시지요.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고마워요 페르쿠스."
여기선 교황님이라는 말도 안 꺼내네.
성국 밖에서야 서로 존중을 하며 누가 위인지 철저하게 숨겼다면.
아카벨름에선 아예 평소처럼 대하며 상하관계를 완벽하게 나타냈다.
'보통 소설에선 교황이 막 성녀 부려 먹지 않나?'
는 그런 부분이랑 다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성녀가 완벽하게 교황의 위에 있다는 건 방금 안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녀가 교황 이름을 막 부르며 그대로 사라질 리가 없었으니까.
"서 있으면서 할 이야기도 아니니, 일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넵."
"아카벨름에서도 아주 비밀스러운 귀빈실이죠."
페르쿠스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에카벨름 안쪽으로 날 안내했다.
뒷말을 붙이는 걸 보니 최대한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다.
사실 성녀보다 속을 더 알 수 없는 게 교황이었다.
'무슨 생각하고 사는 지 모르겠단 말이지.'
웬만한 상황에서 모두 침착하게 대처하는 듯싶다가.
성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마치 자기 딸이라도 되는 양 펄쩍펄쩍 뛰는 교황이라니.
이번 기회에 파악해 보기로 하며 난 페르쿠스를 뒤따라갔다.
'귀빈실이랑 비슷하네.'
안내 받은 공간은 아카데미에 있던 귀빈실과 매우 흡사한 구조였다.
어쩌면 천해일이 배려 차원에서 귀빈실과 아카벨림 안쪽을 비슷하게 만든 걸 수도 있고 말이다.
벽에 걸려 있는 기도하는 자 벽화와 딱 봐도 귀해 보이는 고급 가죽 소파와 엔틱한 탁자.
사치의 극이라는 느낌보단 당연히 있어야 할 가구가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
"제 유일한 취미가 이런 거라서요."
교황도 욕망은 배출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르쿠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허허 하고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가구들을 훑어보며 가격을 따져 본 게 티가 난 모양이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이런 거에 저도 관심이 많아서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혼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네요. 이런 건 얼마쯤하나요?"
"제가 가진 탐욕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가격이 대체 얼마길래 제대로 말도 안 하는 거지.
'근데 또 이렇게 대놓고 욕망에 솔직한 교황은 처음이네.'
보통 이런 건 금고 같은 곳에 넣어 두거나 보석으로 모으지 않나.
귀빈실에 있는 가구와 바닥에 깔린 호랑이를 그대로 가죽 떠서 만든 카페트.
아무리 이런 부분에 문외한인 나조차 이 작은 공간이 얼마나 호화로운 지 체감이 될 정도다.
"욕망 없는 성직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권력이 사람을 만든다고, 저 또한 예전에는 그저 다 같이 즐겁게 사는 게 목표였는데."
추악해지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
그래도 냅두면 곯아 터지니 이렇게라도 도려낼 수밖예요.
페르쿠스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합니다."
"허허, 이거 빅토리 대표한테 공감을 받으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군요.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홍차? 주스?"
"주스로 하겠습니다."
"센스가 있으시군요. 저희 루베니아에서 자랑하는 홀리 오렌지 주스를 뽑아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아 참고로 진짜 신성력은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페르쿠스는 귀빈실을 나갔다.
'아랫 사람을 시키는 게 아니었어.?'
이건 의외였다.
욕망을 대놓고 표출한다고 말해서 당연히 사람을 시킬 줄 알았는데.
'너무 극진하게 대접 받는데.'
루베니아를 만난 걸 알고 있더라도 일개 생도한테 이 정도 대우가 맞나 의심까지 들었다.
오히려 이게 함정이고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며 습격받는 게 더 현실성 있을 정도.
계속 서론만 길게 뽑는 것도 수상했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하려고 이러는 건지.
'성검을 말하자마자 성녀가 곤란해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교황이 나타나고...'
루베니아가 의도적으로 만든 흐름 같은걸까.
아카벨름이니까 가능하다는 말이 강림에 한정 되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최소한 이런 인과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그래도 나름 신인데, 이것도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안뚱땡이 생각보다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말도 그렇고.'
쩝, 점점 더 알쏭달쏭해지네.
그렇게 잡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페르쿠스가 주스와 쿠키가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죄송합니다. 마침 쿠키가 구워지고 있길래 사정사정해서 조금 가져 왔습니다."
루베니아에서 열리는 카카오로 만든 홀리 초코 쿠키입니다.
이것도 물론 신성력은 없습니다.
페르쿠스는 그 말을 하며 웃었고, 난 따라 웃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지.'
김민수까지 루베니아에 있는 상황에 더 이상 시간 지체는 곤란했다.
때문에 난 바로 본론을 꺼냈고.
"교황님 이런 말은 죄송하지만 이제 슬슬..."
"그렇죠, 맞아요. 하하 이게 저도 긴장이 되다 보니까 말하기가 좀 그렇더군요. 괜히 서론만 길어졌네요."
페르쿠스는 괘념치 말라며 말을 이어갔다.
"성검에 대해서 말하신 걸 보면 루베니아님과 만나셨나보군요."
"네."
"성검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성녀와 저 그리고 바엘슨과... 몇몇 고위 간부들 정도겠군요."
근데 그걸 외부인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을 만났다는 증거겠지요.
그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였다.
"성검을 뽑는 건 사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습니다. 루베니아님을 만나지 않고서도 가능하고, 용사가 아니어도 되지요."
나와 김민수를 제대로 의식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보다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거라니.
'아니지 그게 맞구나.'
생각을 고쳤다.
보통 이런 전개는 당연히 '선택 받은 존재'만 검을 뽑을 수 있게 되어 있을 터.
페르쿠스도 그걸 알기에 누구나 도전'은' 할 수 있다고 한 거겠지.
도전하는 것과 실제로 이루는 거엔 큰 차이가 있으니까.
"하지만 저희는 그런 도전조차 금지시켰습니다. 왜 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몰라서 이야기를 듣는 거잖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페르쿠스는 사람 좋게 웃으며 정답을 말했다.
"성검은 성녀와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네?"
웃으며 말하는 페르쿠스의 눈가에 미약한 살기가 감돌았다.
너라면 성녀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듯, 성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 불사를 정도의 각오.
그걸 아주 작은 살기에 가득 채워 넣은 것이다.
"성검을 뽑는다는 건, 성녀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감당하실수 있겠습니까.
나지막한 교황의 말이 귀빈실을 가득 채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