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성국 루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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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얜 어떻게 온 거지?'
멜라니의 귀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폭딸을 친 이튿날.
루베니아 측에서 준비한 전용기에 탑승했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교황이랑 성녀야 당연히 있는 게 맞는 건데.
대체 김민수가 왜 이 여객기에 앉아 있단 말인가.
'심지어 신발은 벗었네.'
양말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비행기에 탑승한 김민수.
보통 누구 한 명이라도 슬리퍼라도 꺼내줄 법한데, 아무도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야.'
나조차도 교황이랑 천해일이 직접 단판을 짓고 올 수 있던 루베니아 행을.
김민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탑승해 있다니.
"야 너 뭐야?"
"어? 나? 아... 이런 곳을 가는데 내가 빠질 수 없지."
제일 필요 없는 놈이 올 줄 알았으면 나도 멜라니랑 같이 왔지.
김민수가 어떻게 성국으로 가는걸 알았는 지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보나 마나 안뚱땡의 도움으로 온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놈이 성녀를 제대로 설득 시킬 리가 없을 테니까.
'성녀도 용사가 따라온다고 하니까 그냥 알았다한 걸 수도 있고.'
놈한테 뭐라고 몇 마디 더 말하려다가 내 입만 아파질 것 같아 그만 뒀다.
짐 덩이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페널티가 생겼지만 이 정도는 감내할 만했다.
여정이 너무 쉽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짝 짝.
"여기 땅콩 좀 주세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려는 찰나 김민수가 박수를 치며 땅콩을 외쳤다.
루베니아 전용기를 얻어 타는 입장인 주제에 저런 태도를 보일 줄이야.
몇 초 전에 했던 생각이 싹 지워진다.
'그냥 뒤지게 팬 다음에 화물칸에 실을까.'
살심이 솟는 루베니아 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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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건축스러우면서도 묘하게 21세기 방식이 섞인 듯한 건축물.
시간이 오래되어 보이지만 때 하나 타지 않은 하얀색 벽돌들이 햇빛을 반사한다.
'엄청나네.'
루베니아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신전은 하늘에서 봐도 그 엄청난 위엄을 자랑했다.
십자가 대신 기도하는 손이 커다란 상징처럼 신전 꼭대기에 붙어 있었다.
'기도하는 손'이라고 불리는 성국 루베니아의 상징.
신전 아카벨름의 위용이었다.
"루베니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용기가 착륙하자마자 성녀는 활기찬 안내를 시작했다.
옆에서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는 교황의 말은 무시하는 성녀.
어쩌면 그녀는 김민수만큼이나 의문점이 많은 인물이었다.
'가명조차 듣기 어려운 존재.'
안뚱땡이 창조주가 아니라는 가설을 세운 가장 큰 공헌을 한 자.
스토리 진행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열쇠.
그게 바로 성녀였다.
'문제는 성녀랑 이제부터 단둘이 행동해야 한다는 건데.'
방해꾼들이 너무 많았다.
하긴 나 같아도 아무리 루베니아지만 성녀를 혼자 두는 건 마음에 걸리겠지.
내 처지에서야 난 '좋은 놈'이었지만 성국 측에선 그저 '외부인'에 불과했다.
"그럼 바로 관광부터 시작하는 건가요? 그나저나 백태양 넌 여기 갑자기 왜 오자고 한 거야?"
"닥쳐."
"..."
왜 온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 하는 김민수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바엘슨이랑 교황도 문제지만 가장 큰 골칫거리는 김민수였다.
딱 봐도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올 생각인 것 같은데.
김민수 치고는 아주 머리를 잘 썼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뒤에 붙어 다니면서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고.'
허.
언제 이렇게 지능이 상승한 거야.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시종일관 활기찼다.
"그럼 일단 숙소로 가서 짐을 풀고 기다려주시면 바엘슨이 일정을 안내할 거예요."
"일정이요?"
"그럼요, 어디까지 관광 목적으로 온 거니까 구석구석 명소 구경 해야죠!"
그 말을 내뱉으며 성녀는 나에겐 윙크를, 김민수에게는 웃음을 보였다.
'아 그러네.'
성녀도 애초에 김민수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구나.
그냥 같이 간다길래 거절하긴 좀 그래서 전용기에 태운 것일 뿐.
실질적인 볼일에 김민수는 정말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저렇게 각자 숙소에서 안내를 한 뒤 김민수를 바엘슨에게 맡기려는 거겠지.
'괜찮죠?'
'좋네요.'
성녀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선 안내대로 곧바로 숙소로 몸을 옮겼다.
숙소는 생각보다 단출했다.
정말 딱 '귀빈용'이라는 냄새만 날 정도의 인테리어.
급하게 온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풀려는 그때.
바엘슨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태양 씨는 숙소를 따로 쓰실 예정이십니다. 지금은 그..."
"아."
난 바엘슨의 의도를 바로 이해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구나.'
이 정도면 김민수를 혹이나 짐 덩이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견제하는 수준이었다.
성녀도 안뚱땡과 김민수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소설 속의 존재가 소설 밖의 존재를 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성녀는 김민수의 설정 자체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업적 없이 용사로 칭송받는 게 이상하지 않냐는 그때 그 말.
'몇 가지 더 있긴 하지.'
S급 게이트가 내린 저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 버린 점이라거나.
김민수의 히로인인 운명이었으면서 놈을 호감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
난 스토리 진행을 위해서 움직이는 거지만 성녀는 이유가 뭘까.
이 일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성녀의 '왜'가 빠져 있었다.
"태양 씨?"
"아 미안."
바엘슨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나 풀려던 짐을 얼른 다시 담았다.
"짐은 일단 저한테 주시고 바로 신전으로 가시면 됩니다. 밖에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신전?"
"네, 곧바로 신전으로 모시라는 성녀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태양 씨도 이렇게 말을 전달하면 알 거라고 하시면서요."
"아...아하, 그랬지."
근데 바엘슨은 나랑 분명 말 놓기로 하지 않았었나.
"바엘슨, 근데 나랑 말 놓기로 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성국에 오신 귀빈이다 보니까 여기선 대접해드리고 싶어서요."
"그래 뭐."
본인이 그러고 싶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넘어갔다.
'근데 귀빈이라니?'
밖에 대기한 차량에 탑승하면서 또다시 잡생각이 피어났다.
'왜 내가 귀빈이야.'
귀빈 취급을 받을 만한 짓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근데 귀빈? 성녀가 그럼 아예 날 귀빈으로 따로 분류를 해놨다는 말인데.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하나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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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웅장하네.'
신전 아카벨름.
아까 전용기에서도 본거지만 정말 그사이즈가 엄청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 순위에 들어간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다.
'이게 가능한 건가.'
아파트 4층 높이에 다다르는 커다란 문부터 사람이 지나갈 법한쪽문.
하얀색 페인트로도 내지 못할 순백의 벽돌.
거기에 묘하게 느껴지는 신성력의 기운까지.
신전이라기보다는 요새에 더 가까운 이미지였다.
"어서 오세요!"
"어어... 네."
아카벨름에 들어가자마자 날 맞이한 건 성녀였다.
성녀의 뒤로 펼쳐지는 예배실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딱 봐도 고급져 보이는 나무 의자와 중앙에 커다랗게 놓여져 있는 상징.
없던 신앙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루베니아는 기도하는 자를 위해 기도 한다고 한다고 했지 아마.'
루베니아에선 신을 위한 기도 말고도 개인을 위한 기도가 따로 존재한다.
신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굳건한 '우리'를 만드는 기도.
그게 종교로 시작한 루베니아가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오늘은 특별히 태양 씨를 위해서 아카벨름을 싹 비웠답니다."
성녀의 말에 난 정신을 번쩍 차렸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말을 꺼낸 것도 나고, 들어달라고 부탁한 것도 나였지만.
사실 성녀 처지에서 이렇게까지 잘해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내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의라니.
'단지 가명 하나 들었다고?'
그것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성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예상했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
"성녀는 인도하는 사람이니까요."
"네?"
"당신은 계속 정답을 맞추고 있다고만 말해 줄게요."
설명을 더 하기 전에 일단 앞으로 가보실래요?
그 말을 내뱉으며 성녀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
한 걸음 한 걸음.
에카벨름의 상징 쪽으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그런가 싶었지만 기분 탓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태양 씨는 왜 제 이름을 듣자마자 루베니아로 오고 싶어 하셨나요?"
"그건..."
그게 이 세계관의 진실을 밝혀내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명을 듣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고... 귀빈 취급받고, 너무 신기하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바로 대답했다.
성녀가 나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이유.
그게 너무 궁금했다.
"...성녀님?"
기도하는 자 쪽으로 몸을 옮길 때마다 성녀의 몸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납득이 갈까요?"
빛은 점점 커지며 예배실을 가득 채울 듯 퍼져나갔다.
김민수가 캠프파이어 축제 때 모두를 집어삼키려고 했던 것처럼.
성녀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점점 몸이 빛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그 말을 끝으로 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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