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성녀의 이름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민이가 우리 집으로 이사 오는 일은 없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핵심적인 건 바로.
"아니 아빠! 남자 친구 집 삼층이라니까, 같은 방도 아니고 그냥 게스트 하우스 느낌이어서 막 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문란한 동거 아니라니까!"
부모님의 열렬한 반대였다.
'대한민국에서 동거를 허락하는 부모가 흔치는 않지.'
그것도 보통 딸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아티팩트를 공급하는 대기업의 딸이다.
기자들이 기사를 올리는 건 얼마든지 압박을 넣을 수 있었으나, 동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문란하다 뭐다 하면서 부정적인 말들이 몰아치는 건 유민이어도 견디기 힘들 테니까.
"아 진짜 왜 마음을 몰라줘! 좋아한다구! 결혼까지 할 거라서 미리 같이 살면서 궁합 맞추면 좋잖아!"
하지만 그런 걱정은 부모님만 하는 거고, 자식에게 중요한 건 지금 당장의 문제였다.
남자 친구랑 같이 사냐 마냐의 문제인데 미래에 따라올 비난과 멸시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책임져 주지! 그걸 말이라고 해? 태양아 나 책임 져줄 거지?"
"당연하지!"
어차피 동거 안 될 거 시원하게 말이라도 지르기로 결심했다.
이럴 때 '부모님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동거하고 싶은 마음을 접는 나'를 연기하는 게 핵심이었다.
"뭐...? 아니 어떻게 그래... 태양아 혹시 나중에 아빠가 한번 보자는데 괜찮지?"
"아, 당연하지."
"들었지? 태양이가 날 생각하는 마음이 이 정도라니까 아빠는 왜 몰라줘?"
시트콤 같은 대화가 몇 번 더 벌어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한다.
"아빠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 이미 절대신뢰계약도 했거든!"
몰라 진짜 아빠 미워!
최강의 단어 조합을 완성시켜서 부모님께 날린 뒤 유민이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난 사실 이 상황을 예상했기에 조심스레 유민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차피 안 될 거 아니까 대충 장단만 맞춰주면 되는 거지.'
만약 이사한다고 말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부인했다면.
유민이도 상처 입고 안 되는 이유도 구질구질하게 설명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근데 도와 준다고 했음에도 외압 때문에 성사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유민이를 컨트롤 하기 더 쉬워진다.
'근데 절대신뢰계약 했단 거 이제 말한 거였어?'
그만큼 중요하게 숨겨야 하는 거였나? 나 그럼 나중에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먼 미래에 다가올 일보다 확실한 현재의 변수를 줄이는 게 우선이었기에.
난 유민이에 더 집중했다.
"아쉽다."
"진짜 너무해, 우리가 얼마나 끈끈한 사인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 자주 놀러오면 되니까 이런걸로 일단은 참자."
대화 주제는 어느새 소환수, 동거에서 자식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로 바뀐다.
"응... 그래야지."
이후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유민이를 침대에 눕혔다.
벗기기 쉽게 원피스를 입고와서 그런지 밑에서부터 옷을 잡고 쭉 올리자 바로 알몸이 드러난다.
잠깐만, 왜 바로 알몸이 드러나는 거지.
"안 입고 왔어?"
"벗는 시간 아깝잖아."
난 그런 거로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
유민이는 그렇게 말을 하며 내 머리를 꽉 끌어안아 젖가슴 사이에 코를 박게 만들었다.
"유민이 개보지 혼내주세요."
"귀엽게구네."
사실 여기까지 왔으면 더 이상 춘향이쪽으로는 이야기가 넘어갈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설계대로 딱딱 떨어지는 대화의 흐름과 상황.
역시 통제 못할 상황은 없었다.
++++++++++++
'아니 근데 뼈 빠지게 움직인 것 같은데 여전히 40%네.'
유민이와 뜨거운 주말을 보낸 이튿날 아침.
이론 수업을 들으며 늘 그렇듯 현 상황을 한 번 점검했다.
'일단... 잔 여자는 유민이, 수진이, 혜미, 춘향이, 샤엘, 유이 정도.'
그중에서 김민수의 히로인이 될 가능성이 없던 수진이를 제외하면 다섯.
근데 정작 뺏은 지분율은 고작 40%.
대놓고 굴욕을 먹인 두 번을 제외하면 수치 변화가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최근엔 김민수가 각성 한 번 했다고 5% 뺏겼다가 돌아왔고...'
열심히 똥꼬쇼 해가면서 40% 뺏었다가 5% 가져가는 이유가 고작 각성이었다니.
하지만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굳이 눈앞에서 막 여자 뺏거나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꾸역꾸역 눈앞에 놓여 음식을 상대방이 올 때까지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이쯤에서 NTL 퀘스트 창을 띄웠다.
==================================
[메인 퀘스트]
본래 백태양은 분량이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활약을 통해 백태양은 존재감을 나타냈습니다.
작가가 눈에 불을 켜고 막겠지만 그게 대수일까요?
주인공 [김민수]의 자리를 빼앗아 당당하게 주연의 자리를 차지하세요!
백태양만의 방식으로 김민수의 멘탈을 가루로 만드세요!
당신이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클리어 목표 :: [김민수]의 주인공 자격 박탈 (0/1)([김민수]가 사망할 경우 실패. )
기한 :: D310 / 보상 :: [주인공백태양], 짧은 진실
페널티 :: 사망
==================================
이 퀘스트창이 뜨고 난 후.
김민수의 순정을 짓밟아라 이런 식으로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졌었다.
그래서 당연히 김민수의 히로인을 뺏는 쪽으로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쨌든 이야기 진행이 되어야 다른 방향으로 시도를 하든 말든 할 텐데.
합동 교육이 끝나고 지금까지 정말 아무런 문제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성녀가 견학으로 두 달 가량 여기 머물게 됐다는 거?'
빅토리 아카데미를 들썩거리게 만들 대사건이었지만 난 별 느낌이 없었다.
당연히 김민수가 있는 곳에 성녀가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민수도 너무 조용하고.'
빨리 퀘스트를 깨서 짧은 진실이 뭔지도 알고 싶었다.
'주인공다운 행동... 주인공 답게...'
백태양스러우면서도 주인공 지분율을 뺏을 만한 사건이 뭐가 있을까.
툭 툭 툭 툭.
손가락으로 의미 없이 책상을 두드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그냥 늘 하던 거 하면 되지 뭘.'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
똑똑 똑.
"네 들어오세요."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난 곧장 성녀가 있는 귀빈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아예 없네.'
학교에 세계적인 유명인이 온 만큼 귀빈실 앞은 당연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줄 알았는데.
평소보다 복도에 사람이 더 없었다.
아무리 이사장실 옆에 있다지만 다들 너무 과하게 쫄아 있었다.
똑똑 똑.
"네 들어오세요."
페르쿠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난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흠... 역시 백태양 생도한테는 제가 아랫것인가봅니다."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아...넵."
영문 모를 말을 내뱉는 페르쿠스에게 대충 답변한 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녀님은 잠깐 나가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오실 테니 차라도 한 잔 하고 계세요."
"감사합니다."
어색한 기류가 귀빈실 전체를 맴돈다.
'뭐라고 말도 못 꺼내겠네.'
천해일은 아카데미 이사장이어서 내적 친밀감이라도 존재했다지만.
페르쿠스는 아예 다른 나라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
무슨 말을 꺼냈다가 실수라도 하면 괜히 일이 커질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이런, 제가 너무 어색하게 만들었나보군요. 전 그럼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아니 그 어...아..."
감사합니다.
뒷말을 삼키며 페르쿠스가 귀빈실에서 나가는걸 가만히 지켜봤다.
'뭐야 이게.'
일개 생도가 교황한테 눈칫밥 줘서 쫓아낸 것 같은 상황이라니.
아는 사람이 봤어도 손가락질할 법한 광경이었다.
근데 교황이면 조금 더 위엄 있고 그래야 하지 않나?
너무 조심스러운 태도에 오히려 경계심이 생겼다.
벌컥.
"어머, 오셨네요?"
교황이 나가자마자 몇 초 뒤 약속한 듯 뿅 하고 나타나는 성녀.
그리고 오셨네요? 라는 말까지.
"뭐... 계시 같은 그런 게 내려진 겁니까? 제가 올 거라는?"
"아뇨? 왜요?"
"너무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져서요."
귀빈실 앞에 아무도 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성녀가 오는 것까지.
무슨 연극의 한 장면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 되는 게 너무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냥 '타이밍 좋네'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성녀였다.
"그냥, 타이밍이 좋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김민수 때문에 오신 거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성녀의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용건 때문에 왔습니다."
"뭘까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름이요?"
"네."
성녀는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몸이 굳었다.
'무슨 이름 알려주기를...'
내가 예민한 과거사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 왜 이래.
성녀는 진지한 태도로 날 지그시 응시했다.
면사포 너머로도 느껴지는 강렬한 눈빛.
"제 이름은 릴메이ㅡ"
그런 상황에서 그녀의 입이 열렸고, 난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건지 의심했다.
"릴메이...이후부터 잘 안 들렸습니다. 성녀님."
그 뒤의 소리는 음소거 된 티비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이 말을 내뱉자마자 성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제 이름이 들리세요?"
"...? 네 당연하죠."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