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 약혼자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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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정이...'
생각보다 별거 없군.
아카데미 간 교류, 게이트에서 실습, 축제로 휴식.
이렇게만 해도 웬만한 아카데미 한 달 일정이었다.
근데 그걸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몰아 넣으니, 별 게 없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더 강행군으로 굴리다간 진짜 누구 크게 하나 다치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
[성춘향의 메시지 :: 나으리 별 게 없다면 오늘은 그냥 소녀와 끈적한...]
'헛소리 그만해.'
어제 그렇게 하루 종일 했는데 오늘 생각이 날 것 같냐.
백번 양보해서 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손에 쥔 일정표를 책상에 내려 두며 교복을 마저 입었다.
'주인공 지분율은 다시 되찾았고...'
근데 빼앗긴 것만 되찾았다는 부분이 굉장히 아쉬웠다.
김민수가 게이트를 만든 건 아니지만, 자기 의지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한 미친 짓을 벌인 건데.
저런 짓거리를 하고도 주인공 취급을 꾸역꾸역 받는 게 너무 역겨웠다.
'그래도 속도는 나쁘지 않으니까.'
지금 40%를 뺏은 것만 해도 엄청난 속도라고 볼 수 있었다.
NTL 퀘스트의 기간은 1년.
절반 조금 안 되는 수치를 뺏는 데까진 고작 2개월 안팎.
이 속도라면 이번 년도 안에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터.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그렇게 느긋하게 등교 준비하고 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잘 잤나? 좋은 아침이다. 백태양 생도. 나다 장두철, 등교하자마자 회의실로 오도록.
"...? 넵"
뚝.
본론만 내뱉고 끊어 버리는 터프함.
장두철다웠다.
'근데 왜 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들리지?'
뭐, 가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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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군."
"어떤 것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일단 앉지, 커피랑 주스 중에 뭐가 좋은가?"
"저는 어... 주스...? 주스로 하겠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그랬던가.
장두철은 그 말에 아주 딱 맞게 행동하고 있었다.
'무뚝뚝 하고, 감정 잘 안 내비치는 양반이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
철인이라는 별명은 단순히 그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있지만.
성격도 비슷하게 붙여진 거였다고 들었는데.
'우리 둘밖에 없고...'
업무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회의실이라길래 최소한 김석구 교관 정도는 있을 줄 알았었다.
근데 처음 문을 딱 열자마자 이게 무슨 일인지, 장두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셔라."
오렌지 100%야.
달그락.
솥뚜껑만한 손안에서 앙증맞고 작은 머그컵이 툭 하고 튀어나온다.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란 말인가.
솔솔 풍겨 오는 불편한 냄새에 난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님이 제가 호위로 붙은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응?"
"제가 아무리 숨기려고 했는데... 확실히 호위를 많이 받아보셔서 그런지 제가 초보 티가 많이 났나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셨더라구요."
"아...아아 그렇군."
뭐야 이 주제가 아닌가? 왜 이렇게 반응이 떨떠름해.
내 의아한 표정을 장두철이 본 건지, 헛기침을 두어 번정도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 합동 교육이 오늘은 개인 점검이고... 내일 다시 실습 위주로 됐거든."
"네네."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지 않고 서론이 줄줄 나열되기 시작한다.
"그니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교관들의 시간이 붕 뜨게 되니까..."
어 이거 설마.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니겠지?'
편입 온 첫날.
봤던 장두철의 정보창이 눈앞에 아른 거린다.
"...아무래도 네가 그... 큼흠... 최근 여러 여자와 동시에 데이트를 한다던가... 밥을 먹는다던가 하는 말이 들려와서 말이야...그래서..."
제발 제발 제발.
그건 아니라고 해 줘.
내가 생각하는가장 최악의 대화 주제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장두철.
"나도 그... 좋아하는 상대방과 이어지고 싶은데... 네 도움을 받는 게 어떨까 싶어서 불렀다."
X 됐다.
'이거 혜미 이야기겠지.'
[깊은 눈 발동! 상대방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깊은 눈을 통해 장두철의 정보를 다시 확인해 본 결과.
2년간 진행 됐던 그의 변함없는 짝사랑 상대를 다시 한번 체크할 수 있었고,
'맞네.'
난 현실을 직면하게 됐다.
"너도 갑작스러워서 놀랐겠지. 미안하다. 근데 내가 이런걸 주변에 상담할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말이야... 대부분 기혼자거나... 같은 교관님들한테 이런걸 말하면... 좀 그러니까."
그렇다고 그걸 생도한테 교관이 어디 있어요, 대체.
이 악물고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장두철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그...음..."
"대부분이 기혼자인 경우가 많고... 나도 뭐...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무래도 기혼자보단 인기가 많은 네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혜미가 26, 장두철이 30.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에 서로 유능한 교관이고 미래도 창창했다.
성격도 둘 다 모난 곳이 없으며 만약에 사귀게 된다면 아주 잘 만났다는 소리를 듣겠지.
근데 문제는 그럴 가능성이 0%라는 거였다.
'이미 나랑 할 거 다 했는데.'
심지어 어제도 했다.
그것도 그냥 한 게 아니라 커튼 다 열어놓고 창문에 가슴을 찍어누르며, 노트북을 씹물로 뒤덮을 정도로.
'장두철이 적극적으로 변한 이유가 뭐지?'
2년간 얌전히 있다가 이렇게 생도 하나 잡고 회의실에서 연애 상담을 할 정도로 변한 이유가 뭐야.
설마 주인공 지분율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
'NTR각을 안 주려고 시도를 못 했던 걸 수도 있어.'
안뚱땡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태양도 만들고 나서 출연조차 시키지도 않을걸 보면, 김민수와 여자를 놓고 싸우는 대립 구도를 만들기 싫어한 거겠지.
때문에 놈이 주인공 지분율이 빵빵할 땐 아무도 그의 주변 여자한테 접근할 수 없었겠지만.
점점 그게 줄어들면서 주변 인물들의 적극성이 올라간 걸 수도 있었다.
"전... 별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 연애 방식이 달라서요."
"그...그렇군."
절대로 이 곤란한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단호하게 장두철의 제안을 거절했다.
후에 내가 혜미랑 사귄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됐다.
김민수처럼 앞뒤 안 가리고 폭주는 안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먼 미래에 장두철 멘탈이 가루가 되는 건 이미 확정된 거였다.
"그리고 이 이야기 절대 다른 사람에게 하면 안 됩니다. 짝사랑이라는 건... 굉장히 힘들지만 결국 혼자서 해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건 왜 그렇지?"
"만약에... 성사 됐는데 연애 상담 한 사람이 막 다 떠벌리고 다니면... 좀 싸 보이는 이미지가 생기잖아요."
"알겠다."
이후 성녀한테 호위를 걸려도 상관없다는 것과 내일 있을 실습은 따로 안내가 간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마지막에 겨우 끝내고 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분 1초라도 더 붙어 있다간 먼 미래가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태양."
"네?"
"그래도 조언 고맙다. 참고하지."
"...넵."
그렇게 난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혜미랑 사귀고 있는 걸 어떻게 말하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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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점검은 뭐 근데 할 게 없는데.'
전력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이미 김민수한테 모두 확인을 했고.
소환수와의 협동도 이미 민수를 샌드백처럼 치면서 체크가 끝난 상황.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실전에서 감을 얻는 타입이어서 그런지, 필요 없는 시간이라고 느껴졌다.
백번 연습해봤자 어차피 몬스터 얼굴 보고 벌벌 떠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가상 현실이다, 홀로그램이다 하면서 연습해봤자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
치이이이잉.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땡땡이 피시는 건가요?"
"그러는 너는?"
"저는 땡땡이 피는 사람 감시요."
개인 훈련실 한복판에 느긋하게 누워서 쉬던 중 멜라니가 찾아왔다.
"왜 왔어?"
"제가 꼭 뭐 용건이 있어야만 와야 되나요?"
"그건 아니지."
"점심에는 유민이를 복도에서 안고 달리고. 저녁에는 성녀랑 둘이서 뿅 하고 나타나고, 아주 그냥 꽃밭이네요."
화가 많이 났네.
'진짜 근데 왜 멜라니가 계속 뒤로 밀리는 거지.'
만난 시간만 치면 멜라니는 류혜미보다 진도가 먼저 나갔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들이 계속 겹치고 터지면서 정작 그녀와 나간 진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죽하면 답답함을 못 이겨 그녀가 찾아올 정도니 말 다 한 거였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맨날 변명이 똑같아서 지겨워요 이제, 뭐... 근데 지금은 그거 탓하려고 온 거 아니예요."
"아...아아 응, 내일 실습 때문에 온 거야?"
"네."
이번엔 던전이라는 말이 있어서요.
그 말을 끝으로 멜라니는 내 옆에 조신하게 앉았다.
힐끗.
안 보려고 해도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눈에 들어온다.
첫 만남에 저기서 틱택토 게임을 했던 게 새록새록 기억난다.
정말 좋은 추억이었어.
"당신 빼고는 다들 무슨 생각하는 지 알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이런 거 도움 청할 사람이 당신 말고 없긴 하구요."
"뭔데?"
멜라니는 사람들이 많을 때 날 '태양 씨'라고 부르고 둘이 있을 땐 '당신'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부르게 된 건 얼마 안 됐는데, 아마 그녀 나름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의 표현으로 보였다.
"제... 약혼자가 오기로 했어요 언젠지는 모르겠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너무 급발진인데?'
자세히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