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넌 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 *
"...으아...나 너무 힘들어."
"보건실 갈래? 누워 있는 게 낫잖아."
"사람 허리를 박살 내놓고 되게 태연하네."
"아아, 아아아 꼬히이마."
"백태양 아주 그냥 나쁜 것만 배웠어."
유민이는 내 볼을 계속 꼬집어가며 괘씸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과하긴 했지.'
쉴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보지 즙을 뽑아냈으니 화를 내는 게 이해 됐다.
오랜만에 하니까 달달하게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화라기보단 귀여운 투정 느낌.
'그래도 일석이조니까.'
김민수 멘탈도 박살 내고 유민이도 만족시키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핸드폰 너머 민수가 뭐라고 빼액빼액 소리 지르는 건 가볍게 음소거를 했다.
영상통화를 할까도 했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 이젠 더 이상 예전처럼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슬슬 내 여자 보여주는 거 그만해야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놀려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같은 패턴만 두 번째이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되도록 김민수한테 히로인들의 몸을 보여 주지 않으면서 더 큰 굴욕을 줄 만한 무언가 말이다.
"나 보건실 침대에 눕히고 다른 여자 만나러 가는 거 아냐?"
"아니 점심시간에 다 해산하고 너랑만 남았었는데 무슨 소리야."
"아주 그냥 선수가 다 된 것 같아서 그래, 원래도 그랬지만 얄미워."
"또 꼬지히마아"
꼬집 꼬집.
꾸욱 꾸욱.
고양이가 투정을 부리듯 툭툭 집게손가락이 볼을 건드린다.
난 주기적으로 유민이 볼에 입을 맞추며 사람들 다 보란 듯이 당당하게 돌아다녔다.
생도들이 이 모습을 보고 소문을 퍼트려도 상관 없다는 태도.
'꾸준한 이미지 메이킹.'
흔히 말하는 얼굴값 한다는 소리를 그대로 재현한다.
'백태양이니까', '백태양이라면', '그럴 줄 알았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로.
여태 난 빅토리 아카데미에서 이미지를 단단히 구축해 둔 상태였다.
생긴 것만 양아치스러워 보이지 누구보다 선의에 앞장서는 생도.
그 와중에 틈틈이 여자는 다양하게 만나는 새끼.
대놓고 문어 다리를 걸치니까 아무도 말 못 하게 하는 놈.
'좋네.'
딱 좋았다.
여자를 끌어안고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녀도 아무런 태클이 걸리지 않는 삶.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푹 쉬고 있어, 괜찮아지면 바로 연락하구."
"그럼 캠프파이어 같이 보는 거지?"
"그러엄."
모두를 구할 순 없었다.
김민수가 무슨 수작을 벌일 거란 걸 알아도 대응할 수 있는 게 극히 한정적이란 소리였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변 사람들을 최대한 멀리 떨어트리는 게 다였다.
'유민이는 됐고.'
드르륵 탁.
보건실을 나서며 왜 짜증이 났는 지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소설에 너무 많이 적응 했어.'
히로인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김민수에게 더 이상 히로인들의 몸을 보여주기 싫은 마음마저.
전부 다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일어난 생각과 감정들이었다.
처음에 주변 사람들을 다 활자 조합물 취급을 하며 무시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걱정하면서 가까운 사람부터 피신을 시킬 생각마저 하다니.
'...나쁘지 않네.'
받아들일게.
까드득 까드득.
툭 투툭.
손 관절을 풀며 캠프파이어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젠 행동으로 증명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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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이 기다리시고 기다리시던 캠프파이어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축제 첫날 화룡점정의 분위기를 만드는 뜨거운 불꽃이! 지금 막 아카데미 중앙에 설치 되었습니다!
학생회장 김지혁의 안내 방송에 축제를 구경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아카데미 중앙 광장으로 모인다.
축구장 세 배 정도 되어 보이는 크기의 운동장 한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다 의미 없어.'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이 저 불길이 장작을 벗어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지, 원래 난 주인공이었어, 주인공이었는데.
'그놈이 다 망친 거야.'
그러므로 백태양 그 개자식이 천벌을 받는 건 너무 당연한 거지.
김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캠프파이어 중앙으로 몸을 이동했다.
화기애애하게 노는 가족들과 천진난만하게 청춘을 즐기는 생도들.
하나 같이 다 가증스러웠다.
내가 방금까지 무슨 꼴을 당했는 지도 모르고 저렇게 해맑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열등감과 피해 의식이 김민수의 감정을 지배한다.
내가 잘못한 거라곤 그냥 감정을 빠르게 말하지 못한 거 말고는 없었잖아.
근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난 용사였고, 용사이며, 앞으로도 용사로 남을 텐데.
어째서 태닝 양아치한테 모든 이목이 끌리는 거야.
"지금 만 봐도 그래."
저벅저벅.
약속이라도 한 듯 내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빌어먹을 놈.
백태양.
"넌 어떻게 그러고 오는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지마!"
타닥타닥.
타고 있는 장작불 소리에 김민수의 외침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소음 자체가 멀리 나가지 않았다.
"성녀님이 왜 니 쪽에 있는 건데?"
성녀.
그녀가 자신을 포함한 백태양과 김민수 주변에 투명한 장막을 쳐 소리가 새어 나가는걸 막았다.
김민수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주변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해도.
왜 내 곁이 아닌 저놈 곁에 있는 거지? 나랑 별반 차이도 없는데.
그는 이 상황을 토씨 하나조차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게 지금 상관있어?"
"당연히 상관 있지! 이 모든 게 지금 너 때문에 일어난 건데!"
"아까부터 진짜 개소리 할래?"
"또! 또! 모르는 척!"
김민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너 같은 새끼들이 뭘 알아! 얼굴 좀 잘생겼다고 바로 그냥 여자 좀 어떻게 해 먹을 생각밖에 안 하고! 겉으로만 착한 척하면서 정작 이럴 땐 나 등쳐 먹는! 어! 그런 쓰레기잖아! 성녀님! 그놈 진짜 나쁜 새끼입니다! 이쪽으로 오셔야 해요!"
성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심각하네.'
정확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캠프파이어가 시작되자마자 김민수의 발밑에 교류회 때 봤던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선 신성력을 사용해서 외부로부터 격리된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이것도 결국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뭔가 씌인 것 같기도하고...'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김민수가 아무리 찌질하고 열등감에 푹 절여져 있어도 중요한 인물인 건 다름없는 상황.
그가 자신의 의지로 최악의 사건을 만들려는 건지, 아니면 조종 당하는 건지를 명확히 해야만 했다.
"너 이거 열등감이야."
백태양의 말에 김민수는 더 화가 난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을 올렸다.
"개소리하지마! 그냥! 그냥!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억지 부리지 마."
"억지? 이게 어떻게 억지야! 너만 아니었다면! 네가 그따구로 날 막 대하지만 않았다면!"
"야, 말은 제대로 해. 아직 제대로 완성 되지도 않은 관계를 네가 멋대로 넘겨짚고 행동하니까 그런 거야."
김민수는 백태양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넘겨짚고 행동했단 말인가.
"넌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거랑 이성적으로 좋아서 대해주는 거랑... 구별을 못 해서 그래, 막 이성이랑 사적으로 연락 몇 번 주고받으면 예비 여자 친구인 것 같고 그래?"
"사적으로 연락 주고받는 이유가 그거 말고 그럼 뭐가 있어!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줄 알아? 서로 호감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잖아!"
"그니까 그 호감이 그냥 딱 친구로서... 하... 아니다 평생 말해 줘도 모르겠지, 넌."
"또! 또 그딴 식으로 사람을 무시해!"
민수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지만 차마 백태양에게 당장 달려들진 못 했다.
일단 보는 눈, 그러니까 성녀님도 있었고.
그동안 백태양에게 맞았던 패배의 쓰라린 기억들이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놈의 얼굴을 보니 심사가 뒤틀렸고, 감정을 내보이는 짓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넌 결국 남의 여자 친구 뺏은 쓰레기에 불가해."
"불과야 민수야."
"아무튼!"
타닥타닥 타닥.
장작불이 더 뜨겁게 타오른다.
김민수의 감정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끔 커다란 불똥을 밖으로 뱉어내며.
뜨겁고, 뜨겁게.
열등감을 연료 삼아 분노를 피워 낸다.
"너만 없었으면...!"
"그게 문제야, 왜 항상 가정이 니 노력이 아니라 외부 요인에... 그리고 솔직히 너랑 나랑 비슷하거든? 넌 대체 왜 그렇게 사람을 등급별로 구분하고 그러는 거야?"
"네가 한 짓거리잖아!"
"난 그간 저지른 니 행동을 보고 널 판단한 거야."
겁쟁아.
툭.
'겁쟁이?'
그 말에 민수의 이성이 끈이 끊겼다.
좋게 좋게.
말로 해결하려고 했던 생각이 싹 사라진다.
민수의 발밑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던 빛이,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다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나도 이제 더 이상 참지 않겠어.
빛이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찰나.
성녀가 때를 기다리며 모아놨던 힘을 터트렸다.
화아아아아아아.
빛과 빛의 대결.
핏.
승부의 결과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고.
성녀와 백태양 그리고 김민수가 있던 자리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래 왔다는 듯.
그렇게 조용히.
타닥타닥.
장작불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