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나 빼고 다 비정상이네
* * *
"그건 곤란합니다."
백태양의 단호한 대답에 성녀는 꽤 놀랐다.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확고한 표정으로 거절할 줄이야.
'이유가 뭐지?'
성녀는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죠?"
"너무... 주목도가 높아서요."
성녀.
그것도 보통 성녀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존재랑 함께 김민수 엿을 먹이다 보면 좋든 싫든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봉황이 날갯짓 하는 것과 참새가 날갯짓을 하는 게 똑같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 때문이란 건데...'
근데 그런 것도 결국 다 재량껏 하면 되는 영역 아닌가?
성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몰래 하면 되잖아요?"
"언젠간 다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몰래 하더라도 김민수의 반응은 얌전하지 않구요."
처음엔 질질 짜면서 '민수의 절규'라는 짤을 유행 시켰고, 그다음은 아카데미 복도에서 쌩 난리를 피웠다.
백태양의 입장은 김민수를 교육 시킨 후의 미래가 신경 쓰인다는 거였다.
성녀는 이해가 되면서도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근데 후환을 걱정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다고...?'
성녀는 김민수의 모든 연애사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백태양이 김민수 연애사의 가해자라면 성녀는 관찰자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가 얼마나 대담한 방법으로 김민수를 엿 먹였는 지 알고 있었다.
"음... 그냥 별거 없이... 김민수가 절 구하려는 순간에 못 구하게 한다는 그런 정도는요?"
"근데 그렇게 해봤자 뒤를 캐는 것과는 연관 없지 않습니까?"
"네?"
"김민수가 아무리 당해봤자 며칠 뒤면 금방 회복 됩니다. 그리고... 뒤가 있다고는 해도 굉장히 애매했거든요."
백태양은 어리둥절한 성녀에게 글라디르 대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노블의 권유를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협력은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
'멍청하지만... 신념은 있는 건가.'
김민수의 질문글은 철저하게 김민수의 처지에서 쓰인 글이다.
아무리 김민수가 자세하게 써도 양심상 불리한 부분은 쏙 빼놓고 쓴다는 거다.
해서 성녀는 김민수에 대해 잘 알 수는 있어도 전체적인 상황을 전부 파악하지는 못했었다.
'노블 말고는 뒤가 있을 리가 없는데...'
왜 있는지도 모르겠는 그 그룹이 민수의 뒷배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김민수를 지지하는 걸까.
"성녀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이런 부분은 저 혼자 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아... 그래도..."
"...혹시 성녀님은 김민수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
"예? 네? 아, 아뇨? 제가 왜요?"
"..."
백태양의 깊은 시선에 성녀는 눈을 휙 돌렸다.
새삼 이렇게 단둘이 있을 만한 자리가 없어서 몰랐던 사실이었다.
김민수가 처맞고 있는 걸 찍거나, 게이트를 함께 탐험할 땐 잘 몰랐는데.
'자...잘생기긴 했네.'
물론 이것 때문에 눈을 돌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네네."
"그리고 김민수에 대한 건 일단 저한테 맡겨 주시길 바랍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믿을게요."
성녀는 여기서 더 대화해봤자 쳇바퀴 굴리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히 문을 열어줬고.
백태양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렇게 귀빈실을 나갔다.
"...합동 작전... 꼭 하고 싶었는데."
언젠간 기회가 찾아오겠지.
성녀는 그가 나간 문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달콤한 게 먹고 싶어졌다.
"페르쿠스, 그나저나 어땠나요?"
끼익.
성녀의 말에 페르쿠스가 모습을 보였다.
그가 나타난 곳은 귀빈실 구석에 있는 장롱이었다.
성녀와 페르쿠스는 김민수만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혜성처럼 나타나서 급속도로 성장하는 백태양.
그도 의심 선상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게... 파악하지 못 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페르쿠스의 서브 스킬 중 하나인 정의의 천칭.
생명체를 대상으로 그가 얼마나 많은 죄악과 선의를 했는 지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스킬로 단편적으로나마 그의 과거 행보를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적은 처음인데.'
심지어 천해일조차 분석했던 스킬이었다.
"왕은 아랫것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김민수에 이어 백태양까지.
'정상이 없네.'
괜히 빅토리 아카데미가 아니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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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나만 빼고 다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어.'
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뒷골이 땡긴다.
'처녀를 데리고 무슨...'
처녀가 아니어도 거절했을 판에 처녀 성녀는 두 팔 들고 거절이다.
거절한 이유는 주목도도 한몫하긴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존재 자체였다.
어설프게 김민수를 엿 먹일 생각을 하려는 그 생각이 아주 불순했다.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자기 합리화의 신.
불굴의 멘탈.
비 오는 날 먼지가 나게 두들겨 패도 멀쩡하게 이튿날 인사를 해 오는 강철의 마인드.
이런걸 가지고 있는 게 김민수였다.
근데 무슨 작전으로 뭘 어떻게 해 보겠다니.
그걸로 됐으면 유민이 따먹었을 때 아예 아카데미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류혜미 때는 아예 섹스 장면을 보여주기까지 했어.'
웬만한 사람이라면 완전히 정신이 붕괴 돼서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의 충격파.
그걸 두 번이나 맞고도 김민수는 여전히 여자에 미쳐 있었다.
"진짜 하..."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학교 뒤편 벤치에 앉아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사실 성녀의 제안을 수락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김민수가 멜라니보다 성녀 뒤꽁무니를 줄줄 따라다니고 있으니 분명 효과적이긴 했겠지.
그러나 그녀가 직접 개입하게 되는 순간, 100% 완벽 통제가 불가능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페널티는 너무 큰 짐이다.
'그래도 성녀가 김민수를 엿 먹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성녀는 김민수의 편이 아니다.
이거 하나 알아내고 두통 좀 겪는다면 굉장히 남는 장사였다.
"백태양."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음?"
김민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게이트 보상이 확실히 크긴 컸는지, 예전에 보였던 쭈글찌질 민수는 어디 가고 눈앞엔 당당한 김민수가 있었다.
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는 게 왜 이렇게 열 받는 지, 참.
"너도 알다시피 난 매우 강해졌다."
"...그래, 근데 나 지금 되게 바쁘거든? 귀찮게 할 거면 그냥 가라."
"너와 내가 승부를 벌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싶군."
"말투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이번엔 또 무슨 컨셉인데."
근데 승부라니.
마냥 개소리를 하러 온 건 아니라는 생각에 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민수는 내 바뀐 태도를 보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넌 그냥 딱 여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돼. 나머지는 축제 날... 캠프파이어 하는 순간을 기다려라."
"...어 뭐... 그래."
그 말을 끝으로 김민수는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음?'
그런 놈의 뒷모습에 트롤 킹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
잠깐만.
그럼 결과적으로 축제에 참여를 해야 한다는 건가.
'이거 또 머리 아프네.'
그냥 스토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여자들이랑 질펀하게 떡이나 치면서 놀고 싶었다.
그때 모모하라 유이만 해도 바로 박을 수 있었던 거, 언젠가 김민수 엿 먹이려고 한 번 참고.
이번에도 데이트 하다가 또 이상한 거 신경 써야 하고.
'내일 축제 때... 아... 뭐야 그러면 되잖아.'
캠프파이어 할 때가 김민수 턴의 시작이라면.
그전까진 쭉 내 차례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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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멋있었어.'
김민수는 방금 내뱉었던 대사를 하나하나 곱씹어가며 키득거렸다.
멋지게 공헌도 1위 보상받고 라이벌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나 자신.
몇 번을 생각해도 간지 폭발 폭풍 그 자체였다.
"순애일지작가님이 주신 기회... 소중하게 써야지."
승리와 패배에는 모두 흐름이라는 게 존재한다.
지금까지 백태양에게 당했던 수모가 패배의 흐름이었다면.
이젠 승리의 흐름 밖에 남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순애일지작가님의 최측근)
>조만간 큰 거 옵니다.
>결행일은 축제 날... 그러니까 내일 캠프파이어 할 때... 기대해주세요.
>당신이 진정한 주인공이자 용사라는 걸 보여줍시다.
>그때 하려고 했던 거, 다시 합시다.
1시간 전에 날아온 메시지는 김민수에게 수많은 정보를 안겨 줬다.
'그때... 그것.'
교류회에서 게이트를 제대로 소환하지 못한 걸 말하는 거겠지.
확실히 그것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더 이상 백태양은 활약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활약은 할 수 있어도ㅡ.
"나만큼은 못한다는 말이지."
드디어.
드디어!
"백태양 참교육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가 굉장히 기다려지는 김민수였다.
[축제, 인연! 당신과 가장 연이 깊은 존재가 축제 때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절대 안 돼!"
이 망할 놈의 업적.
트롤과의 인연이 그를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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