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 이 여자도 진짜 정상이 아니구나
* * *
합동 교육은 무난하게 흘러 갔다.
중간에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사실 때문에 잠깐 떠들썩하긴 했지만.
그 부분만 제외 한다면 이렇다 할 만한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굳이 달라진 점을 콕 집어서 이야기하자면 두 개 정도.
"음하하하하! 내가 바로 불굴의 용사 김민수다!"
첫 번째는 게이트 클리어 이후에 급격히 달라진 김민수의 태도다.
게이트 보상이 상당했던 건지 놈은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며 자기 힘을 과시했다.
막 엄청 압도적으로 쎄졌다 이런 건 아닌데,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타입으로 변했다.
'과하긴 한데...'
보통 대련하게 될 경우 스파링의 개념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힘을 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살살 하는 게 기본 전제지만 민수는 그런 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빼고 하기는 하는데 굉장히 저돌적으로 바뀌었다.
'보상으로 재생력을 얻은 건 확실하네.'
문제는 그 재생력의 수준이 꽤 상당해 보인다는 것.
예전에 바엘슨이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을 땐 숨도 못 쉬었던 김민수는 이제 없었다.
놈은 멧돼지처럼 상대의 품 안에 들어가 목검으로 상대방을 압박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되나.'
김민수가 죽으면 NTL 퀘스트는 종료가 되는 셈이니, 잘 안 죽게 된 건 좋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강해지는 건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진짜 몸에 좋은 보상 많이 먹었나 본데요, 그쵸?"
"...예? 아, 아아 네, 그래 보이네요."
"말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요? 태양 씨!"
"처...천천히 놓겠습니다."
두 번째는 성녀의 달라진 태도였다.
예전에는 그냥 겉을 빙빙 도는 경계하는 고양이 같았는데.
요즘은 아예 대놓고 근처에서 존재감을 어필하는 공작 같았다.
'왜 이래.'
그녀가 공략 대상이기에 이런 태도가 좋게 작용하는 건 맞지만.
너무 뜬금없이 이러니까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더더욱 말이다.
'그만 째려 봐라 나도 힘들어.'
저 멀리서 유민이와 수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최소 2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정확히 나한테 시선을 꽂아 넣다니.
각성자는 이래서 문제였다.
'쓸데없이 신체 능력이 좋단 말이야.'
근데 진짜 얜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짐작 가는 것조차 없어서 성녀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리고 할 거면 좀 자연스럽게 하던가.
"유...유후."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그... 인터넷에서 보통은 이렇게 매력을 어필한다고 해서요."
"제발...제발 인터넷 그만 보세요."
수녀복을 입고 마릴린 먼로같은 포즈를 취하는 게 무슨 어필이 된다고.
심지어 얼굴은 면사포로 다 가리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는 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저 말 끝마다 나오는 인터넷 소리.
'씹덕인가?'
29금 마녀, 집착하는 선도부, 정액 먹는 교관, 츤데레 아가씨, 마조 춘향의 뒤를 이을 히로인의 속성이 씹덕 성녀라니.
최근에 만난 흑갸루와 츤데레 아가씨를 제외하면 정상이 없었다.
'아니지 수진이도 정상인가...?'
히로인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까고 보면 다 벌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여자들인지.
김민수가 절대로 컨트롤하지 못할 여자만 모아 놓은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성녀님 근데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라면 이상하게 보일까요?"
"방법이 좀..."
하얀 면사포를 쓰고 성녀복을 입은 여자가 요상한 포즈를 취하면 이상해 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성국 내에서 위치가 있다 보니 무슨 짓을 해도 다 괜찮게 받아들여서 그런 건지, 생각보다 이상한 여자였다.
난 그 말을 끝으로 대련을 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엣헴, 아주 바람직한 태도였어요."
"...?"
대련장에 올라가려는 순간 들리는 멜라니의 말.
그녀는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얜 또 갑자기 왜 이래.
"앞으로도 쭉 그런 태도를 고수하세요. 아시겠죠?"
"너까지 이러면 나 진짜 힘들어."
"대답하세요!"
"...알았어."
조금 전에 했던 말 다 취소.
이 망할 소설 속의 히로인들은 하나 같이 다 정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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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 많았다. 물론 앞으로도 고생할 일이 많지만, 쉬는 것도 자기 관리의 일환인 법."
따라서 빅토리 아카데미에서 축제를 할 예정이다. 많이들 참가하도록.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모든 일정이 끝나고 시작된 장두철의 말에 모두가 환호했다.
'축제라...'
라노벨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싸구려 라노벨의 향기가.
'곤란한데.'
게이트로 지친 마음을 축제로 달래준다, 뭐 이런 의도인 거겠지.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지만 나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자가 너무 많아.'
축제가 시작 되면 팀 멤버와 상관없이 아무나랑 같이 다닐 수 있게 된다.
그럼 당연히 유민이부터 시작해서 멜라니, 혜미, 심지어 지금으로선 성녀까지.
전부 다 내 곁으로 붙는 게 확정인 상황.
이런 사소한 이벤트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장두철한테 말해서 불참해야겠네.'
쉬는 것도 좋지만 김민수한테 지분율을 뺏길 수 있다는 걸 안 지금.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태양 씨도 축제에 참가하실 거죠? 성국과 아카데미의 화려한 합동 축제는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랍니다?"
"이건 성녀님 말이 맞아요, 참가할 거죠 태양 씨?"
"후후, 성녀님 그리고 멜라니 난 왜... 안 물어봐? 어쩌면 난 너무 당연하게 참가할 거라고 생각하는..."
"민수씨는 잠깐 이쪽으로..."
내 표정을 읽었는지 성녀와 멜라니가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참가할 생각이 없다는 걸 팍팍 티 내고 있으니까 눈치챈 거겠지.
"아 저는..."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이 시간에 강태민이랑 함께 게이트나 던전을 찾아서 도는 게 더 효율적이었다.
때문에 거절을 하려는 찰나 성녀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잠시 이 축제 때문에 둘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괜찮죠?"
속삭이듯이 내뱉는 말.
대담한 태도에 민수의 눈동자는 튀어나올 만큼 커졌고 멜라니는 어이없다는 듯 성녀를 바라봤다.
나도 근데 멜라니와 비슷한 눈으로 성녀를 쳐다 봤다.
'진짜 뭐야?'
살살 간을 보는 걸 넘어서 이젠 솔직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지금요?"
"네, 지금요."
면사포 때문에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너무 단호해 보이는 말과 행동.
난 고개를 끄덕였고 성녀는 박수를 치면서 바로 내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파악도 못하고 주변 풍경만 슉슉 바뀌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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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니 귀빈실이었고 성녀는 익숙하게 소파에 쏙 들어가 앉아 날 올려다봤다.
"앉으세요."
"아니, 이게 무슨..."
"알아요, 너무 제가 급발진 같은 거. 근데 이런 이야기는 둘만 할 수밖에 없어요."
다 같이 있으면 하기 좀 그렇고, 지금 태양 씨 못 잡으면 내일모레까지 못 볼 것 같아서요.
이어지는 성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사장실 옆에 있는 귀빈실.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인데 정말 티 안 나는 사치의 최종판이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 보이는 카페트도 최소 몇천만 원은 할 테고. 소파만 해도 몇억짜리였다.
'진짜 돈 많네.'
아는 만큼 보이는 귀빈실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어? 그냥 평범한 가정집 같은데?' 같은 소리가 나올 만한 장소였다.
나도 최영남 회장이 집을 해주지 않았다면 모를 만한 스케일.
"저는 최근에 한 가지 생각을 했어요."
"네?"
한참 딴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사님이... 아니 김민수가 정말로... 음... 계시 속의 그 남자가 맞을까? 뭐 이런 거요."
"...?"
내 의아한 시선에 그녀는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판단 했는 지 말을 이어갔다.
"행보가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음... 페르쿠스랑... 아 그니까 교황이랑 진지한 논의도 해봤거든요."
사석에선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구나.
근데 보통 호칭을 수정하면 '님'자를 꼭 붙이지 않나.
'성국의 조직도를 이번 계기로 확실히 알았다.'
클리셰처럼 교황이 뭐 성녀를 부려 먹는다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성녀가 교황을 그냥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부르는 걸로 봐선, 루베니아는 오직 성녀 1인 체재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성 교육 때부터 칭호가 붙는 거...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그냥... 솔직히 그런 시절에 두각을 드러낸 예비 생도들은 엄청 많았거든요, 당장 장두철 교관님만 봐도 맨손으로 C급 게이트를 단독 돌파하기도 했었구요."
그녀의 말은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공했다.
'그렇게도 볼 수 있구나.'
소설 속의 세상을 독자의 시선으로 봤기 때문에 몰랐던 사실들.
주인공이니까 당연히 그런 취급을 받아야지, 라고 생각해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부분들이었다.
"근데 그냥 단지, 인성 교육에서 엄청났다... 이런걸로 용사라는 칭호를 받고... 물론 메인 스킬도 큰 몫을 차지 했지만... 그래도요. 메인 스킬 이름이 특별하다고 해서 다 그렇게 불리는 건 아니잖아요? 너무 작위적인... 그런 의심에서 시작 됐었죠."
인성 교육 때부터 엄청 떠오르는 유망주로 주목을 받는 점부터.
변변찮은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학년 1위로 급부상한 것까지.
그녀는 소설 속에서는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클리셰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출처는 말 못 하지만... 그가 엄청난 여미새... 그니까 여자에 미친 새... 그런 사람인 것까지 알게 됐거든요."
"네네... 그건... 뭐 그렇죠."
이건 그냥 김민수를 한 시간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놈만큼 발정 난 버팔로는 보기 드물테니까.
"해서... 좀 그런 점을 잘 이용해서 뒤를 캐내보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네?"
"질투 유발 작전 같은 거죠. 이번 게이트에서도 너무 수상했으니까요. 그래서 원래는 바엘슨으로 하려고 했는데... 바엘슨이 그... 여자 친구가 있는 바람에..."
"아..."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그래서... 아무래도 같은 조니까 태양 씨가 저랑 어떻게 좀 알콩달콩해서... 민수의 질투를 유발해서 막... 좀 그런 걸 해 보는 건... 어때요?"
말이 알콩달콩이고, 질투 유발이지.
결국, 내가 여태까지 했던 걸 똑같이 한 번 하겠다는 말이었다.
'이 여자도 진짜 정상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 하나.
저 말을 내뱉은 성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미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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