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그동안 가짜들이 우릴 사칭해서 아주 화가 난 상태야.
* * *
'저기네.'
딱 봐도 굉장히 화려해 보이는 집.
대놓고 '귀족이 살고 있습니다'를 알리는 듯한 화려한 건축물.
다른 집들은 평범한 벽돌인 반면 귀족의 집의 벽돌은 새하얀 색이었다.
더러워도 금방 바꾸면 된다는 생각인건지, 오물이 묻어도 청소할 여력이 충분한 건지.
이건 왕궁에서도 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사치였다.
'아무리 건물 크기 차이때문에 못 하는 거라고는 해도...'
왕궁과 비교가 된다는 그 발상을 끌어낸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하단 이야기다.
난 우선 귀족의 집에 노크부터 하기로 했다.
똑똑.
"누구세요?"
"첫째 왕자다."
"화...화살...이...!"
"말이 짧군?"
소설의 주연이라면 보통 상황 그 자체가 전개를 이어나가게 만들어 준다.
숨만 쉬고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말을 건다거나 갑자기 뭐 기연을 만난다던가 말이다.
그러나 조연은 경우가 아예 다르게 적용 됐다.
"헉...! 죄...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도 모르고...!"
"문이나 열어라."
"넵...! 귀...귀...빈실에서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금방...!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숙명.
그게 바로 조연의 숙명이었다.
'컨셉형은 이래서 빡세단 말이야.'
귀족의 집 안으로 들어가 귀빈실로 안내 받기를 잠시.
난 현 상황을 간단히 요약했다.
'김민수를 지금 당장 견제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군.'
[춘향전] 때와는 완전 말이 다른 상황이다.
그땐 억지로 춘향이를 데리고 김민수가 있는 곳에 갔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아내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시간 낭비였다.
'그냥 스토리고 뭐고 다 무시하고 김민수부터 조져?'
타고난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보이는 고전명작[개구리 공주]
반드시 '이반'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민수를 납치하고 내가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했을 때 일이 꼬였을 경우.
다시 민수를 풀어 주고 스토리를 정상화 시키면 될 터.
"아가씨가 지금 막 오고 계십니다."
"오고 계셔? 여기 시종은 한 나라의 왕자보다 귀족의 딸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오고 있습니다...!"
일단은 망나니 컨셉으로 밀고 가기로 결정 했다.
어차피 멍청하고 착한 역할은 김민수가 할 테니까 포지션이 겹치지 않는 게 좋았다.
또각또각.
메이드의 말대로 문밖에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급해 보이지 않으며 차분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발걸음.
묘하게 귀에 익은 구두 소리까지.
'에이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겠어?
그렇게 여러 변수를 떠올리며 김민수 조지기를 떠올리고 있을 때.
내 신부가 될 사람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저는 귀족의 딸 멜라니라고..."
"멜라니?"
멜라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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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지?'
게이트에 빛이 나고 역할 배정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읽은 후.
멜라니는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화려하게 치장 된 방은 여느 백화점 명품관 부럽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 깔린 맹수의 가죽부터 시작해서 웬만한 단칸방보다 커다란 침대 사이즈.
정말로 그냥 딱 '부유한 귀족의 방'의 표본 그 자체였다.
심지어 이불에 놓은 자수조차 금실로 되어 있었다.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라도 무방할 정도의 사치.
'...난 귀족의 자녀인 건가?'
판단은 금방 내려졌다.
난 귀족의 자녀 역할로 배정이 된 거구나.
거기에 첫째 왕자의 신부라는 역할까지 있는 거로 봐선 아마 곧 결혼할 운명일 터.
멜라니는 이런 식의 컨셉형 던전은 처음이었기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돈키호테]때처럼 단순히 적을 쓰러트리는 게 아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게이트라니.
말로 들었을 때와 실제로 그 상황에 부닥친 건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는 법.
"큼흠...흠... 밖에 아무도 없는냐?"
"네 아가씨,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내 이름은 뭐지?"
우선 대략적인 건 파악했으니 이 배역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이름도 모르고 어떤 성격인 지도 모르는데 배역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멜라니는 대략적인 정보를 알기 위한 최선의 판단했다.
"네? 어...아...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판단이 최선이라고 해서 결과가 무조건 좋을 거란 보장은 없는 법.
멜라니는 설마 이름조차 듣지 못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몇 가지 더 질문을 했지만 메이드는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기본 정보가 얼마나 제한이 되는 거지?'
이름도 모르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 지도 모른다.
고전명작과 이름 없는 배역.
그러고 보니 역할 배정 메시지에서도 이름이 있는 건 단둘.
셋째 왕자 이반과 그의 부인 바실리사 뿐이었다.
그 외는 모두 이름이 표기되지 않았으며 신분을 표시하는 단어만 존재했다.
'대놓고 주연 몰아주기를 한단 말이지.'
멜라니는 생각이 정리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드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결혼은 언제 하는 거지?"
"하실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수도 있습니다. 화살이 집에 꽂혀야지만 왕자님이 오시기 때문에..."
우선 첫 번째로 난 오늘 반드시 결혼하게 된다. 첫째 왕자의 신부란 역할은 그걸 의미하는 거니까.
"왕자님이 온 후에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대로 왕궁으로 가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짐 같은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 모든 준비를 다 끝낸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이 게이트는 부부가 서로 파트너가 되는 개념이었다.
결혼하는 건 세 쌍, 그렇다면 총 세 팀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팀당 하나씩 시련 같은 게 생길 건 분명하고...'
그렇다면 나는 누구와 팀하게 되는 가.
멜라니에겐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남자와 여자가 파트너를 이루는 게 거의 기정사실이 된 지금.
그녀는 같이 게이트에 들어온 남자들의 능력치를 세분화하려고 했다.
'할 필요는... 없구나.'
무조건 백태양.
비교할 필요도 없이 백태양이 최고의 파트너였다.
'바엘슨이랑도 궁합이 좋긴 하지 성기사니까... 근데 좀... 아무래도 합을 안 맞춰 봤고.'
바엘슨 같은 경우엔 일단 무슨 스킬이 있는지 모를 뿐 더러, 메인 스킬을 사용했을 때 걱정된다는 게 문제였다.
김민수? 이것 또한 백태양과 마찬가지로 비교할 필요도 없이 최악의 파트너였다.
무력부터 시작해 모든 신체적 능력치가 가장 낮았으니까.
가끔 보이는 잠재력이 눈에 띄긴 했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미래가 아닌 현재였다.
"아가씨, 첫째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정신을 차린 지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스토리가 벌써 진행 되다니.
빠르다고 말해도 부족할 정도의 속도였다.
"금방 간다고 전해드려, 최대한 예의 있게, 웃으면서 사근사근. 알지?"
"네 아가씨."
첫째 왕자는 무조건 우리 팀 멤버다.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그게 방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괜히 책 잡힐 일을 만들었다가 상황이 꼬이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딸깍.
문이 열리고 첫째 왕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태 했던 고민이 모두 무의미했단 걸 깨달았다.
"태양 씨?"
"멜라니?"
가장 기다렸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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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인의 집에 화살을 맞힌 바엘슨.
그는 스토리가 안내한 대로 상인의 집에 가려고 했으나.
"크허...으..."
온몸이 피 칠갑이 된 체 지하 수도에 쓰러져 있었다.
"음... 너무 약한데? 아무래도 넌 '주인공'이 아닌가보군?"
"누...누구...냐...!"
바엘슨은 길을 가던 중 습격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S급 게이트 내의 습격,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문제는 습격자의 수준이었다.
그 무슨 공격해도 먹히지 않으며 놈이 뻗은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었다.
목이 잡히자마자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지하 수도에 끌려왔고, 제압 당할 정도로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다.
'이 정도 수준을 가진 자가 있었나?'
아니 애초에 게이트에 들어온 건 우리 다섯 뿐일 텐데, 어떻게.
난 설마 여기서 죽는 건가?
현 상황을 부정하는 눈과 달달달 떨리는 턱.
바엘슨을 습격한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다.
짝, 짝.
"걱정하지 마라,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 근데 되게... 슬프군 우리가 누군지 모르다니..."
"모를 수도 있지 뭘 그러나?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 텐데."
사내의 말을 받은 건 바엘슨의 뒤에서 나타난 한 여인이었다.
"아...뭐...그렇긴 한데 꼭 말해주고 싶단 말이지. 굉장히 기념비적인 첫 등장이잖아, 여태까지 나오고 싶어도 못 나왔고."
"때가 됐을 뿐이잖아, 호들갑 좀 떨지 마 쪽팔리단 말이야."
여인과 사내의 관계는 아주 친근해 보였다.
특히 여인은 나타나자마자 바로 사내의 품 안에 쏙 안겼는데, 마치 그게 부부 같았다.
"근데 정말 이렇게까지 연기 해야 하는 거 맞아? 너 나 속인 거면 진짜 죽여 버린다?"
"진짜라니까, 고전명작[개구리 공주]는 원래 이렇게 해야 의심을 안 받아."
"무...스..."
바엘슨은 힘겹게 입을 열며 어떻게든 동료들에게 이 상황을 알릴 방법이 없나 궁리했다.
습격과 습격자의 명수 그리고 그들의 무력 수준까지.
이것만 알려 줘도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왜 난 이렇게 무기력한 걸까.'
바엘슨이 좌절하는 것과 별개로 사내는 그 꼴을 보며 몇 번 깔깔 웃더니.
잠시 후 바엘슨 머리 위로 포션을 부었다.
"기절 약효랑 같이 섞은 거니까... 어... 푹 자고 일어나면 게이트는 클리어 되어 있을 거야."
"되게 잘해주네?"
"노블리스 오블리제니까."
"...?"
바엘슨은 그 말을 듣자마자 경악 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얘 눈 좀 봐, 뭔가 알아냈다는 눈치네?"
"그래 뭐... 탐정놀이는 어차피 이제 끝났으니까... 잘 자."
"그...!"
"그래그래, 맞아. 그동안 가짜들이 우릴 사칭해서 아주 화가 난 상태야. 정답정답, 축하한다 성기사."
털썩.
수면제의 약효가 얼마나 강력한지, 바엘슨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바로 고개를 떨궜다.
짝, 짝.
다시 사내가 박수를 치자 허공에서 이불이 튀어나와 바엘슨의 몸을 덮었다.
위장도 하고 길바닥에서 자니까 입 돌아가지 말라는 그만의 배려였다.
"이놈의 역할은 둘째 왕자군..."
"그럼 난 둘째 왕자 신부겠네?"
"딱 우리한테 알맞은 역할이야."
사내와 여인은 그 말을 끝으로 지하 수도에서 사라졌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주인공을 죽이러 가자."
이야기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오직 그것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