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성녀님이 면사포를 벗었는데 안 예쁘면 어떻게 하지?'
* * *
"그럼 지금부터 빅토리 아카데미와 성국 루베니아의 합동 교육을 시작하겠습니다."
시각은 빠르게 흘러서 합동 교육 당일.
빅토리 아카데미 대운동장 안에 수많은 사람이 정렬해 있었다.
대운동장 절반을 기준으로 빅토리 생도가 반, 성국이 반 나눠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언제 쓰려고 이렇게 크게 지었나 했는데, 다 쓸 데가 있구나 싶었다.
'인원수가 우리 아카데미랑 비슷하네.'
차이점은 아카데미는 당장 투입이 불가능한 생도가 있는 반면 성국은 전부 다 즉시 무장화가 가능하다는 것.
딱 봐도 사람을 한 번에 짓뭉갤 것 같은 메이스와 사람 하나는 거뜬히 가릴 만한 방패 그리고 전신 갑주까지.
'우리 수준 높다'라는 걸 전신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우리도 근데 삼사학년들은 확실히 쎄긴 하네.'
1% 중의 1%.
군계일학.
'빅토리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면 1급 헌터는 기본이다'라는 말이 떠도는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따로 무장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교복 하나만 입고 표정만 진지하게 바꿨을 뿐인데 기세가 살벌했다.
기 싸움이라도 하려는 건지 1열에 선 4학년 생도와 성국의 기사들의 표정이 매우 사나웠다.
합동 교육이지 합동 전투가 아닌데 벌써 이러면 어쩌자는 건지.
운동장쪽은 얼추 다 본 것 같으니 이제 주변을 둘러볼 차례였다.
'저 사람이 페르쿠스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화창한 태양 빛을 머리로 반사해내며 광명을 비추고 있는 교황.
그냥 딱 봐도 신실한 교황 그 자체의 이미지였다.
사람 겉만 봐선 모른다고 하지만 저런 사람이 속이 검다면 세상 믿을 사람 하나 없을 정도였다.
'그 옆이 성녀고...'
성녀는 그때처럼 면사포를 쓰고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민수의 네 번째 히로인이자 묘하게 동족 냄새가 나는 여자.
자세한 건 더 알아가 봐야 하겠지만 정말로 애매모호한 히로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맞은편에 허허 웃으며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는 이사장까지.
'딱 대치 구도가 나오네.'
성녀와 용사가 있다는 것만 제외 한다면 완벽한 데칼코마니였다.
일부러 이렇게 해서 경쟁심을 부추기게 유도하려고 만든 건지, 우연인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냥 그렇게 설정하는 게 짜기 쉬우니까 그랬을 수도 있고.
"페르쿠스 교황님과 천해일 이사장님의 개최사가 있겠습니다."
내 잡생각과는 무관하게 합동 교육 일정은 자연스레 진행 되어 가고 있었다.
개최사를 두 명이나 하다니.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이연타는 너무나 가혹했다.
"아아, 우선 저부터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빅토리 아카데미 생도 여러분 그리고 먼 타지에서 감사하게 자리해주신 성국 여러분. 연례 행사처럼 해왔던 빅토리 아카데미와 성국 루베니아의 합동 교육이 이번만큼은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최근 나날이 증가하는 게이트와 던전 그리고 힘을 그릇 되게 사용하는 헌터들까지. 저희는 늘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옛말에……"
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옛말'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로 연결 다리를 만들고 '환영합니다!'로 매듭 짓는 최악의 콤비네이션!
심지어 전신 갑주를 입고 있는 성국의 기사들은 굉장히 괴로워 보였다.
가뜩이나 날도 좋을 텐데, 갑주에 쿨러라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힘들 게 눈에 훤했다.
"정말 감동이 있는 천해일 이사장님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저도 여러 생각이 많아지는군요. 저희 성국과 빅토리 아카데미는 정말 예전부터 같이 훈련을 해왔기에 어쩌면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똑같은 훈련과 반복 그리고 대결까지. 그게 나쁘다거나 그릇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해야 하는 일들을 묵묵히 수행해왔고 그 결과를 늘 증명해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신의 계시도 그렇고 아주 안 좋은 일들이 범람하는지금!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늘 마음에 품고 다니는 기도문 하나를 낭송하고 개최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거룩한 이 땅에……"
더 큰 게 따로 있었네.
천해일의 '옛말,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환영합니다!' 삼단 콤보가 애교로 보일 정도의 위력.
기도문 낭송이라니.
페르쿠스 교황의 기도문 낭송이 다 끝날 때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 정도가 흘러가 있었다.
왜 개최사 예상 시간을 한 시간씩 집어넣나 했더니 이런 것 때문이었구나.
'천해일이 이십 분, 교황이 사십 분.'
어떤 의미에선 시간 분배가 정말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말 감동 깊은 개최사였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학생 대표들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학생 대표, 앞으로."
지루했던 시간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학생 대표라는 말에 나와 성녀가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걸 왜 내가 하냐고.'
개최식을 하기 전.
학생 대표가 왜 1학년인 내가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어보기까지 했다.
4학년도 있고, 3학년도 있고, 2학년도 있는 마당에 왜 내가?
'다 거절하는 게 말이 되나.'
4학년 대표는 앞에 나서기 싫다고 거절하고.
3학년 대표는 자신은 맞지 않는 자리라고 거절하고.
2학년 대표는 대놓고 그냥 '백태양 있지 않나요?'라며 거절하고.
용사와 성녀 그림 나오는 게 예쁘니까 김민수가 하는 게 어때요 했다가 그놈이 결석하고.
폭탄 돌리기를 아주 제대로 당했다.
성녀와 나란히 섰을 때.
그녀는 내 곁에 은근슬쩍 다가와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선행을 많이 베푸셨다죠."
"과찬이십니다. 성녀님에 비하면 새 발에 피죠."
"김민수 생도가 오늘 오지 않은 것과 당신의 선행에 연결 고리가 있나요?"
"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개를 돌려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선서가 곧바로 시작 됐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긴 어차피 봤어도 면사포 때문에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겠지.
'이게 지금 민수 편을 드는 거야 아니면 날 떠보는 거야?'
용사 괴롭힌 걸 어디서 알고 와서 나한테 바로 뭐라고 하는 건가?
"선서 우리는 교육을 함께 받음에 있어 공정하고 공평하며 정의로운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또한……"
아니 그전에 김민수 괴롭힌 건 어떻게 아는 거고, 그걸 바로 나한테 말하는 거지.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성녀는 수상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선서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난 고개를 돌리는 척하며 그녀를 똑바로 직시했다.
[깊은 눈 발동!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냅니다!]
팅.
'팅?'
[실패! 상대방의 정보를 알아낼 수 없습니다.]
'뭐야.'
튕겨지는 소리와 함께 뜨는 메시지.
'깊은 눈이 먹히지 않는다고?'
적어도 기본 정보는 알아야 뭐 하고 사는 여자인지 파악이라도 할 텐데.
그것조차 되지 않으니 벌써 막막해졌다.
꽤 험난한 합동 교육이 예상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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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욱...후욱..."
환기가 아무리 잘되도 뜨거운 열기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는 방 안.
그곳에서 민수는 열심히 근육을 키우고 있었다.
"순애일지작가님이 연락도 해주시지 않으니 이젠 내가 스스로 해 보는 수밖에 없어."
늘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답변이 올라 왔었는데.
사흘 동안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이상했다.
여러 가지 변수가 머리에서 떠올랐지만 당장 생각나는 건 단 하나.
"나 혼자 이제 일어설 때가 되셨다고 하는 걸 지도 모르지."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달은 나라면 여기서 스스로 해결해나갈 거라고 믿고 계신 게 분명해.
그렇기에 민수는 과감하게 아카데미를 빠지는 결정을 했다.
유민이를 뺏기고.
'사실 별로 크게 안 좋아했지만.'
혜미 누나도 뺏기고.
'사실 그렇게까지... 사랑하진 않았지만... 의무 느낌인 것도 있었지... 원래 성녀님을 정실로 생각하고 있던 것도 좀 컸고.'
백태양에게도 졌지만.
'각성만 온전히 끝났다면 한 방 컷이었을 텐데 그 비겁한 놈이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해... 그리고 뭐... 애초에 같은 생도를 상대로 진심으로 힘을 쓴 그놈이 더 이상한 거고.'
민수는 다시 일어났다.
그게 불굴의 용사니까.
합동 교육 당일 날 빠진 이유?
그야 그 시간 동안 더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훈련, 오로지 훈련.
합동 교육 도중에 완벽하게 달라진 내 모습을 본다면 1학년 대표가 누군지 다시 사람들은 알게 되겠지.
"어차피 합동 교육 전반 부분은 생 중계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야."
민수는 티비를 틀어 빅토리 아카데미와 성국의 합동 교육을 중계하는 채널을 시청했다.
본격적인 훈련 과정이나 게이트 혹은 던전 실습 같은 건 비공개지만.
이렇게 개최식과 단체 훈련은 사기 증진을 위해 맛보기로 잠깐 보여줬었다.
"저놈이 왜 또!"
4학년 대표는 뭐 하고 백태양 저 개자식이 성녀님과 함께 있는 거지?
하얀 면사포를 쓰고 성스러운 기운을 마음껏 뽐내는 그녀 옆에 어떻게 저런 백발 양아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자리는 내 것이어야 했는데!
잠시 작전상 후퇴를 하고 있을 뿐.
금방 차지할 수 있는 자리긴 했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깐만 근데.'
그렇게 훈련을 이어가던 민수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몸이 저절로 굳었다.
'성녀님이 면사포를 벗었는데 안 예쁘면 어떻게 하지?'
일생일대의 난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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