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왠지 모르게 성녀한테서 동족의 향기가 풍겨왔다.
* * *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해맑게 웃고 떠드는 김민수와 헛소리를 모두 즐겁게 받으며 걷고 있는 성녀.
일단 김민수가 저렇게 여자와 화기애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놈이 어떤 놈인데 여자랑 웃고 떠든단 말인가.
술자리에서 첫 만남부터 대뜸 남의 섹스 판타지나 물어보는 무례한 놈이었다.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도 없으며 자기 성욕이 우선인 찐따.
게다가 얼마 전까지 혜미한테 들이댔던 건 다 잊어 버리고 바로 성녀 왔다고 히죽거리는 꼴이라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용사와 성녀.
이 두 가지만 놓고 봤을 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조합이 없을 정도였다.
뒤늦게 나타난 히로인이 정실일 가능성은 원래 한없이 낮아야 정상인데.
오히려 성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태까지 존재하던 모든 히로인들이 무색무취가 될 판이다.
요망한 마녀, 츤데레 아가씨, 소꿉친구 순애 누나 그리고 성녀.
이렇게만 놓고 봤을 때 누가 승리할 것 같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성녀를 택할 게 분명했다.
'일단 나가자.'
김민수가 알아서 말실수를 하길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불안 했다.
성녀가 얼마나 김민수를 좋게 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김민수가 하는 헛소리 혹은 개소리를 모두 좋게 받으면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여자라면?
진짜 정말로 최악의 경우엔 안뚱땡이 김민수의 개그도 웃게 만드는 여자를 설정한 걸 수도 있는 거였다.
그렇기에 일단은 방해를 하는 게 먼저였다.
"와 이게 누구야 민수 아니야?"
내가 사는 곳까지 온 걸 보면 밤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데.
이제 더 이상 성녀와 즐거운 산책 시각은 끝이었다.
"...? 뭐야 백태양 너 어떻게 여기에 있어?"
"여기 내가 사는 집 앞이야. 보금자리 쪽에서 집 봐준 곳."
"아...아아 그래? 그렇구나..."
김민수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느낀 건지.
성녀와 날 번갈아쳐다보며 조금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둘의 오붓한 시간이 끝났다는 걸 직감 했는지 눈동자가 계속 좌우로 흔들린다.
처음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표정이었다면 저 표정을 내가 지었을 텐데.
다행이 아직은 깊은 이야기한 건 아닌 듯 보였다.
"옆에 분은 누구셔?"
"아...그러니까..."
난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김민수와 나의 대화에 성녀를 집어넣었다.
아는 사람 둘과 모르는 사람 하나.
이 조합이 만났을 경우 자칫 잘못하면 한 명이 굉장히 소외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서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지거나 한다면 기존의 있던 사람이 끼어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놈은 나한테 성녀를 소개해주는 걸 극도로 꺼리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김민수가 갑자기 말을 멈춰서 묘한 어색함이 흘러가려는 그때.
성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국 루베니아의 성녀 들어보셨나요? 그게 저랍니다. 당신은 백태양 생도님 맞나요?"
성녀는 날 잘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면사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즐거워 보였다.
"성녀님이셨군요? 기사에서 봤습니다. 합동 교육 때문에 오신 걸로 아는데... 제가 알기로는 아직 날짜가 좀 남은 걸로 알아서요."
"아 그건 제가 사정이 생겨서 조금 일찍 들어왔거든요. "
"사정이요?"
"그건 비밀이랍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김민수가 끼어들 수 없을 만한 대화 소재를 생각해냈다.
급발진해서 대화에 억지로 들어왔을 때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거나 할 만한 것들.
가장 중요한 건 대화가 끊기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일단 자리부터.'
가만히 서서 길거리 위에서 대화를 한다면 오래 같이 있기가 매우 어려웠다.
서로가 스쳐 지나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단편적인 대화만 몇 개 하고 지나가는 게 일반적일 터.
내 위치도 마침 성녀와 민수 중간 부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포지션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어...? 너 안 가?"
김민수는 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했는 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눈앞에서 여자를 뺏길 것 같으니까 눈치가 빨라진 건가.
"아 나도 마침 가는 방향이 같아서 말이야. 너 어디 가는데?"
"아...어...그..."
놈은 지금 상황이 굉장히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녀와 용사의 오붓한 데이트가 망가지는 걸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여기서 목적지를 말한다면 내가 악착같이 따라올 거란 것도 직감했을 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아낀 건데 문제는 성녀가 김민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저희는 따로 목적지 없이 그냥 한 바퀴 돌고 있었어요."
"아 정말요? 그럼 저도 같이 껴도 될까요?"
"그럼요. 그게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요."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고 같이 걸어도 된다는 동의까지 구한 이 상황.
게다가 내 위치는 성녀와 김민수 사이였기에 같이 걷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 둘 사이에 들어간다.
이 말은 즉 김민수와 성녀와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였고 난 그만큼 성녀와 가까워진다는 것.
'아무 말이나 대충 하면서 김민수가 성녀랑 한 마디도 못하게 하는 게 핵심이야.'
목적지 없는 산책이라는 건 정말 말만 잘한다면 끝도 없이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소리다.
아무리 김민수가 매력이 없어도 벼락 맞을 확률로 수많은 대화하다보면 매력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왠지 모르게 성녀가 김민수를 좋게 보고 있는지금 더더욱 방심할 수가 없었다.
'김민수가 성녀한테 넘어가기 전에 혜미쪽도 작업을 쳐야겠어.'
당분간은 류혜미한테만 인생을 올인하면서 다닐 줄 알았는데.
이 쓰레기 새끼는 진짜 구제 불능이구나.
"성녀님은 그럼 혹시 이번에 합동 교육을 뭘 할지 알고 계신가요? 저희 쪽은 아직 들려오는 게 없어서요."
"음...글쎄요 아무래도 용사와 성녀가 있는 교육이다 보니까 게이트나 던전 위주로 하지 않을까요? 그쵸 용사님?"
"아아 맞죠 맞죠, 맞아요! 저와 성녀님의 끝내주는 조합이 있다면야 S급 게이트 아니면 그 이상! 혹은 미궁 던전이 와도 상관없을 겁니다!"
"풉...아...그 호호 그러네요. 맞아요."
성녀는 김민수를 굉장히 좋게 보고 있었다.
대화를 사전에 차단하려고 깔아둔 판을 다 무시하고 민수에게 말을 거는 걸 보면 만만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안뚱땡이 이번엔 정말로 작정하고 김민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히로인을 만든 건가.
마망계 같은 느낌으로 푸근한 가슴으로 모든 걸 자애롭게 껴안거나 하는 쪽이라면 위험했다.
근데 아까 민수의 말을 비웃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정말로 성녀가 김민수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큼흠... 그 뭐 솔직히 성녀님과 내가 아무리 정처 없이 길을 떠돈다고 하더라도 내 친우의 집까지 오게 될 줄이야...내가 그..."
김민수는 성녀가 말 한 번 걸어줬다고 기세가 등등해져서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걸쳤다.
여기서 평소처럼 김민수를 취급할 수는 없어서 얌전히 걷고 있으려는 찰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어머, 역시 용사님이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용사님이 백태양 생도님이랑 아주 친하다고 들었거든요."
"아 그런가요? 혹시 무슨 말을 더 했나요?"
"그거 말고도... 아! 맞아 그 비밀 대련을 몇 번 하실 때마다 용사님이 멋지게 이겼다던데 사실인가요?"
성녀의 입이 열릴 때마다 김민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여자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떨자마자 바로 팩트 체크의 시간이 찾아온 거다.
'그냥 S급 게이트 두 개만 뚫었다고 해도 될 텐데.'
거짓말을 굳이 굳이 넣어서 과장을 하는 건지.
"글쎄요...비밀 대련을 한 기억이 저는 없는데... 제가 착각하는 게 있나봅니다."
"풉큽..읍...후우...아 그 기침이 나서요... 그렇군요... 용사님이 착각하신 걸 수도 있구요."
"아 그...뭐... 비밀 대련은 말 그대로 비밀이어서 원래 보통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점 사과 드립니다."
민수는 거짓말을 덮고 싶어서 어떻게든 급하게 말을 내뱉었다.
난 이때 성녀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김민수가 이상한 소리를 할 때마다 나오는 웃음.
'설마 비웃고 있는 건가?'
면사포는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는 지 모르겠으나 성녀의 얼굴을 완벽하게 가려서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뭔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놈이 헛소리를 할 때마다 적나라하게 비웃었던 것과 지금 성녀의 웃음이 너무 겹쳐 보였다.
그럴 리 없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용사를 비웃는 성녀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안뚱땡이 그런 설정을 가진 히로인을 만들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성녀님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이만 저희 둘 다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페르쿠스 경도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습니다. 저에게 성녀님을 호위하라는 엄중하고 굳건한 의뢰를 하신 지금..."
"아아 네, 그만 말씀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해했으니까요. 그럼 백태양 생도님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김민수의 말을 싹둑 자르며 성녀는 그렇게 김민수를 데리고 사라졌다.
'뭐지?'
왠지 모르게 성녀한테서 동족의 향기가 풍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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