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성녀
* * *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김민수와 성녀가 만나기 훨씬 전.
성녀는 침대에서 경전을 읽고 있었다.
『 세계에 게이트와 던전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종교는 존재 의의를 대부분 상실했다.
그 어떤 경전에도 나오지 않았던 내용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은 기존의 '신앙'을 완전히 박살 냈다.
각성의 명백한 기준도 없던 시대.
신을 믿는 자가 신을 대변하다가 죽고, 신앙심이 없던 자가 신을 자처하던 그때.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의지하고 함께 신앙을 만들며……』
텁.
'이딴 걸 누가 믿는다고...'
성녀는 경전을 덮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게 말이 될 리가 없는 건데 사람들은 마냥 좋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신봉할 때 자기 자신을 지속해서 뒤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맹목적인 믿음 만큼이나 위험한 게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경전의 내용이 모두 거짓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슥 슥
성녀는 자기 새하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새하얀 머리칼.
성녀가 됐다는 증명이자 신이 깃들었다는 증거라고 소리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
실제로 그녀는 각성을 한 뒤로 머리칼 색이 변했으니 마냥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성국 루베니아는 모든 걸 방금과 같은 방식으로 꾸미며 자기 덩치를 키워갔다.
각성을 했을 때 나오는 특징적인 부분을 모두 '기적'으로 치장하며 루베니아엔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고 광고를 했다.
'웃기지도 않지.'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증명이니 광고니 하지 않아도 될 터.
성녀는 이 모든 게 그냥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각성 시기가 겹치고 '어쩌다가' 스킬이 비슷한 사람들이 '운 좋게' 같이 있었을 뿐이라고.
그렇다고 그걸 전면으로 부정하거나 나쁘게 생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성국은 실제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는 만큼 돈을 뿌리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엔 수많은 로비와 어떤 더러운 물질욕이 포함 되어 있었지만.
글쎄.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생긴 지 이백 년도 안 된 종교가 어떻게 독립 국가로 성장하겠는가.
'그냥 조금은 편하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성녀 혼자 침대에 걸터앉아 외로이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똑 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접니다."
"...들어오세요."
성녀의 방에 들어오면서 신원을 제대로 밝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교황 페르쿠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 누구보다 저울질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성국의 이익과 전 세계의 평화를 저울에 놓고 평화 쪽에 저울을 딱 두 세 개만 더 올린 사람.
그게 바로 페르쿠스였다.
페르쿠스는 문을 활짝 열고 성녀를 보며 무릎을 꿇고 짧게 기도를 올린 뒤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도 한복을 입고 계시네요... 그리고 그... 삿...갓?...그거랑요."
"하하, 용사가 있는 나라 아닙니까. 언제 어디서 카메라에 찍힐 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비해두는 것이지요."
"페르쿠스, 너무 속물 같아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원래 보이는 것만 보이는 겁니다."
그는 성녀의 말을 모두 사람 좋게 받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용사가 드디어 인성 교육을 다 끝내고 빅토리 아카데미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정말 그 어린아이가 한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저흰 그렇게 시작했으니까요."
페르쿠스는 이 정도 반응은 예상 했다는 듯 그때 그 계시를 다시 읊었다.
"용사와 성녀가 모든 것을 구원하고 마왕을 물리치리라... 멋지지 않습니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다니요."
"진짜 동화 수준이라는 게 문제죠. 너무 두루뭉술하잖아요. 구원의 기준은 뭐고... 마왕은 애초에 있기는 한 건가요?"
"허허... 제가 누누이 말했지만, 이건 어디까지 제가 요악한 내용으로... 저희 경전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경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성녀는 페르쿠스의 얼굴을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페르쿠스는 그 행동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한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대충 뒤집어진 경전을 집어 들었다.
"2년째 읽으시는데 아직 50페이지도 못 넘기셨군요... 이거 만드는데 오 년 걸렸습니다... 성녀님 제발 경전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정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책은 너무 눈 아프단 말이예요. 글자 간격도 조절하기 어렵고..."
"...그래서 이북화도 진행 했습니다만..."
"이북은 책 냄새가 안 나서 싫어요."
그럼 어쩌라고.
페르쿠스는 어제 등 운동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광배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한복이 전신을 가리는 옷이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온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들킬 뻔했다.
'왜 하필 신은 이런 자를 성녀로 만들어서 나에게 깊은 시련을...'
루베니아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몸, 한 줌의 재가 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성녀'라고 칭할 만한 스킬을 보유한 각성자가 나타나고 한 어린아이 입에서 계시가 나오는 그 순간.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모든 걸 보답 받았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페르쿠스는 성국을 키우는 데 모든 힘을 다 했고 성녀를 극진히 대접 했다.
그래.
그 극진한 대접이 문제였다.
'오냐오냐 하니까 끝이 없어... 끝이...!'
차라리 업무라도 소홀히 했다면 뭐라고 했을 텐데.
성녀는 정말 영악하게도 대외적인 업무에 있어선 완벽했다.
오직 그녀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인성이 파탄 난 모습을 보였다.
무례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오직 나만 견뎌야 한다는 거지.'
성녀는 그런 페르쿠스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해맑게 웃었다.
"페르쿠스, 제가 어제 봤던 만화 캐릭터랑 표정이 똑같아요."
"어떤 캐릭터였습니까?"
"웃고 있는데 그 막 이마에 빠직 마크가 달린 거 있잖아요...? 심지어 대머리인 것까지 비슷해요."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모근이 다 살아 있습니다. 대머리도 아니고 탈모도 아니며 그냥 패션입니다."
성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급하게 침대 머리맡에 있는 면사포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페르쿠스는 이런 취급이 익숙한 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면사포 속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성녀는 지금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성녀님 제발 면사포를 표정을 숨길 때 이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름 저희 교단의 상징 중 하나인데 그걸..."
"면사포에 특별한 기능도 없으면서 무슨..."
"성녀님 다 들립니다."
"어머 그랬나요? 미안해요. 요즘 업무 때문에 힘들어서..."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할 수가 없군.
페르쿠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제 슬슬 제대로 본론을 말할 떼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각설하고... 용사가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니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할 것으로 생각 됩니다."
"그래서요?"
"그럼 저희도 발을 맞춰서 슬슬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이야기에 열광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서로를 위해 열심히 성장하는 둘! 그리고 커져나가는 유대감! 뭐 그런 거요. 게다가 그는 아마도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빅토리 아카데미에 들어가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낼 게 분명합니다! 흐흐 하루라도 빨리 용사를 만나고 싶군요. 마침 또 얼마 전에 '우연히' S급 게이트에서 성검을 얻지 않았습니까? 이걸 바위에 박아 두고 아무도 못 뽑았다는 연출까지 곁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 그를 성국에 초대하여 검을 뽑게 하는 거지요. 여기서 디테일한 부분은 바로 뽑게 하는 게 아닌 성녀님이 기도를 한번 해주시고 하신 다음에 함으로 약간 축복 같은 의미로...하면...좋을 것 같은데 안 듣고 계시는군요."
"아 그... 어... 와아...우..."
"뒤늦게 리액션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페르쿠스 믿어요. 특히 그 제가 검을 뽑는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성검을 휘두르는 성녀, 멋진데요?"
"..."
페르쿠스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 감정을 어디에 소모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얀 장갑을 끼고 교단 오르골 청소 검사를 한번 해야하나...? 아니면 로자리오를 일렬로 잔디밭에 깔아 두고 빛이 반사 되지 않는... 관리 안 한 로자리오의 주인들을 색출해서 벌을 내려야 하나...'
그가 스트레스 해소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성녀는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성녀라는 신분 때문에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매우 한정적이기에, 그녀는 필연적으로 인터넷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온라인은 익명으로 활동할 수 있어서 그 누구보다 성녀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꼈다.
'흠...오늘은 안 올라왔네.'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확인하는 글이 요즘은 올라오지 않았었다.
최근에 무슨 일이 있나?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그거 보는 게 요즘 삶의 재미였는데.
그녀는 아쉬움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그 성녀님 저는 화를 내는 게 아닙니다."
"네?"
"네...?"
"예?"
"어...그...제가 아무 말도 안 해서 분위기가 조금 쳐진 것 같기에..."
"아뇨 그냥 요즘 인터넷에 재미있는 게 없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 일단... 제가 말했던 용사와 성녀 이야기 다시 한번 더 깊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시 후 식사 시간이니 이번에는 꼭 제시간에 맞춰 내려와주시길 바랍니다."
페르쿠스는 성녀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방을 나왔다.
'한 번 들어갈 때마다 10년씩 늙는 것 같군.'
딸이 있었다면 저랬을까.
페르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루라도 빨리 성녀를 한국에 떨어트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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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갔나?'
페르쿠스가 떠나고 난 뒤.
성녀는 면사포를 벗었다.
'용사.. 좋아, 좋은데.'
용사와 성녀.
페르쿠스의 이야기.
다 이해할 수 있었고 납득할 수 있었다.
뭐 정략결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좀 친하게 지내라~' 이런 의미나 마찬가지였지만 성녀는 그것조차 힘들었다.
페르쿠스가 용사 이야기에 열 번을 토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용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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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스윗생도]님의 질문글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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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아무리 기다려도 울리지 않던 알림벨이 울렸을 때.
성녀는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며 눈과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오늘도 웃기네.'
세상에 이런 재미가 또 있을까?
그녀는 '스윗생도'의 질문글을 읽은 뒤 친절히 댓글을 달았다.
'이건 관람료.'
교황한테도 절대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녀의 정체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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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ㅇ:: 말투 봐라 씹ㅋㅋ 내 옆에 있었으면 진짜 심심할 때마다 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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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와 안뚱땡의 저격악플러 'ㅇ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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