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저랑 데이트 가실래요?
* * *
점심시간.
나는 식당으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류혜미가 있는 연구실로 향했다.
'류혜미는 거의 다 넘어왔으니까.'
이제 그녀를 아카데미 밖으로만 끄집어낸다면 완전히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 달라진다면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더 색다르게 느껴지기 마련.
그렇기에 혜미를 밖에서 만나 진한 데이트를 진행한다면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밥을 같이 먹어야 하기도 했고 말이지.'
원래라면 검사하면서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자고 말을 꺼내야 했는데.
민수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까먹어 버렸었다.
'식당 쪽으로 가면 유민이랑 수진이가 있어서 방해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 시켜 먹어야지.'
빅토리 아카데미는 '이런 것도 된다고?'라고 말할 정도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 했다.
그중에서 놀란 부분 하나가 바로 배달이었는데.
훈련을 하다가 밥을 거르거나 바쁜 업무 중에 식사하러 갈 시간조차 없는 경우.
빅토리 식당 앱에 들어가서 메뉴를 선택하고 주문하면 음식을 배달 시킬 수 있었다.
즉 류혜미와 단둘이 연구실에서 느긋하게 먹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음?'
그렇게 연구실 쪽으로 걸어가며 김민수를 오열 시킬만한 계획을 짜던 중.
반대편에서 김민수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연구실은 김민수와 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으니 놈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NTR남의 위기 센서가 작동해서 류혜미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챈 걸까.
놈은 꽤 결연한 의지를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그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계속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기 위해서 귀를 기울였다.
"내가 반드시 고백을 해주겠어... 좋아한다고...백태양은 고작 나한테 말했을 뿐이지만 난 당당하게 류혜미 교관님...아니 혜미 누나한테 직접 말함으로 내가 더 대단하다는 걸... 그리고 그 뭐냐...아무튼...데이트 약속도 잡고...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해서 이것저것도...다 할 거야...할 수 있어...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나는 빅토리 아카데미 1학년 2위 김민수니까 충분히 그럴 자격이 돼...나도 좋아하고...누나도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건 진짜 역겹네.
민수의 많은 면을 봐 왔기 때문에 웬만한 건 끄떡없다고 생각 했는데.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행위였다.
차라리 민수가 잘생겼다면 모를까 평균에서 그나마 한 단계 정도만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는 외모에 저 꼴이라니.
더벅 머리를 하고 꾸밀 줄도 모르면서 아무 이유 없이 여자한테 인기 많은 포지션이어서 그럴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소리를 내뱉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기도 이젠 없잖아.'
히로인들에게 현실을 깨우쳐주자 민수를 칼 같이 손절하는 이유?
그야 그게 순리이기 때문이다.
꾸밀 노력조차 하지 않고 인기는 많은데 감정 표현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게 바로 김민수였다.
상식적으로 인기가 있으면 안 되는 놈이 안뚱땡 빨로 여기까지 꾸역꾸역 온 거나 다름없었다.
"야 김민수, 뭐 해."
저러고 가다간 혜미한테 안 좋은 기억만 심어 줄 게 뻔해서 놈을 멈춰 세웠다.
김민수는 정말 내가 있는지도 몰랐는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어 뭐야 백태양... 네가 여기 왜 있어?"
왜긴, 류혜미 구원해주려고 그러지.
"나 그때 그 정밀 검사 아직 안 끝나서, 류혜미 교관님이 따로 보자고 말씀하셨거든."
"뭐...? 어...아니 그...점심시간인데 무슨 검사야. 밥 먹어야지."
"부르신 걸 어떻게 해."
추가적으로 넌 왜 여기 있어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김민수가 입을 제대로 열었다 하면 구구절절하게 말을 할 텐데 듣고 싶지 않았다.
민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방해꾼이 나타나서 굉장히 당황스러워 보였다.
"어...아니 그...나도 볼일이 있거든 류혜미 교관님한테...그래서 아무래도 같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래? 난 분명 혼자 검사받는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넌 뭔데?"
"그...그때! 그 설욕을 위해서다!!!"
민수는 늘 그렇듯 급발진을 시도 했다.
복도에서 큰 소리로 말하면서 침까지 튀기는 주인공이라.
'진짜 미치겠네.'
여기서 비웃으면 분위기가 다 망가지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인데.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데.
"풉..."
히죽거리는 입가 사이로 바람이 픽하고 빠져나와 버렸다.
"나...나도 이제 생선 먹을 수 있고! 생선뼈를 발라줄 수 있어! 그때 너처럼! 난 이제 아무것도 뺏기지 않아!"
민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옆구리를 간질거렸다.
누가 발바닥을 깃털로 살살 긁는 듯한 감각이 온몸에 전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점심시간이라서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웃지 마!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되는 줄 아냐고!"
열등감과 질투심.
놈은 이왕 입을 연 김에 모든 걸 토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는 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난 민수의 말을 들으며 그 어떠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여기서 빵하고 터져서 깔깔 거리며 웃으면 민수가 얼마나 창피하겠는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선 가만히 있는 쪽이 정상으로 보이는 게 진리였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상황을 연출하기 딱 좋은 장면이기도 했고 말이다.
'남극의 눈물 다큐멘터리...슬픈 영화...소설...'
그렇게 민수의 뻘소리를 들으며 한참 동안 가슴 아픈 기억들을 곱씹는 사이.
드르륵.
"김민수 생도?"
연구실 문이 열리고 류혜미가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소리가 이만큼이나 들렸는데 당연히 안에서 나올 수밖에 없을 터.
이게 바로 내 노림수였다.
"어 아... 류혜미 교관님. 저 그...!"
"밖에서 너무 소란스러워서 나와봤어요.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큰 소리를 쳐가며 말을 한 건가요?"
류혜미는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는지 머리를 뒤로 묶어 포니테일을 한 상태였다.
또한 하얀색 가운 속으로 보이는 겨드랑이는 없던 취향도 만들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저는 그...단지...!"
이제 김민수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사실 다짜고짜 교관이 업무 중인데 들어가서 밥을 권유하는 게 상당히 무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민수가 급발진을 함으로 류혜미를 불러냈기에 말을 걸 수 있는 상황이 자연스레 나오게 된 것이다.
"류혜미 교관님 안녕하세요."
"어, 백태양 생도도 있었군요? 무슨 일이예요?"
"조금 전에 했던 정밀 검사가 살짝 부족하다고 느껴져서요."
식사 시간이기도 하구요.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민수 쪽을 눈짓했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으로 와 부드럽게 내 팔짱을 꼈다.
"그러면 마저 검사를 할 수밖에 없겠네요... 근데 김민수 생도는 무슨 볼일이 또 있는 건가요?"
"아 저는 그...! 고...고...!"
"미안해요, 지금 바빠서... 일단 점심시간 끝나고 올래요? 그때 다시 들을게요. 나중에 봐요."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만 절며 우리가 연구실 안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사실 지금이라도 놈이 진지하게 고백했다면 상황이 바뀔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정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소꿉친구 순애라면 더더욱 포기가 어려울 게 분명했다.
몇 년간 한 명만을 짝사랑한다는 게 어디 보통 쉬운 일인가.
꿋꿋하게 지켜 온 마음은 갑자기 더 멋진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김민수가 포기하게 만들어줬지.'
그러나 오히려 그러므로 그런 애정은 당사자에 의해서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김민수는 마음을 말로 내뱉는 걸 하지 못하는 찌질함의 결정체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기회를 놓친 놈에게 더 이상 봄날은 없었다.
드르르륵 탁.
문이 천천히 닫히며 망연자실한 김민수의 표정이 보인다.
고백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민폐만 끼쳤다는 걸 뒤늦게 자각한 얼굴이다.
난 놈을 향해진한 비웃음을 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조만간 좋은 경험을 한 번 더 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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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내부.
류혜미와 나는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식사는 당연히 입에 뭐 안 묻히고 먹을 수 있고 간단한 샌드위치로 결정 됐다.
배달시켜서 먹을 건데 생선구이 같은 헛소리나 하는 민수는 절대로 떠올릴 수 없는 메뉴였다.
'첫 데이트에 김치찌개 같은 거 먹을 놈이야.'
생선뼈 발라주는 거에 집착하는 걸 보니 어디 이상한 연애 관련 동영상을 본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내가 발라준 게 인상 깊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히로인과 식사 메뉴를 고르는 놈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진짜로 온 이유가 뭔가요?"
"아직 제 고백에 대한 답을 제대로 듣지 못 해서요."
"아...그건..."
류혜미는 진실된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에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었다.
지금도 '고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우물쭈물하는 것만 봐도 견적이 나오는 수준.
하지만 동시에 너무 과하게 대쉬하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 적절한 완급 조절이 필요했다.
'그래도 일단은 성공이네.'
단호한 거절도 아니었고 '생도와 교관'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선을 긋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대답이라면 이미 절반 정도는 성공한 거였다.
"알아요...갑작스러우시겠죠...그래서 아직 저에 대한 모습을 제대로 못 보여드린 것 같아서 이번 주 일요일에 데이트 어떠세요?"
"데...데이트...?! 저랑... 백태양 생도랑요?"
"네, 혹시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여기선 살짝 불쌍한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고개는 숙이고 올려다보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류혜미는 절대로 데이트 권유를 거절하지 못할 거다.
내가 처연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꿈꿔왔던 여인이 류혜미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감정을 주고받고 데이트하는 것.
이거야말로 그녀가 꿈꿔왔던 상황일 터.
"...아...안 싫어요...좋아요...해요...데이트."
혜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푹 숙였다.
풋풋한 순애의 시작이었다.
'아...그러고 보니까 토요일은 수진이랑 데이트하는구나.'
풋풋한 하렘 순애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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