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새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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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처럼 마음을 막 쉽게 내뱉고 하지 않아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에만 그 말을 꺼낸다고나 할까... 말의 무게를 굉장히 중요시하게 여기는 타입이어서 말하지 못 했을 뿐 나도 상황만 됐다면 얼마든지..."
"아오 시끄러워,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검사가 끝나고 난 뒤 민수와 나는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었다.
김민수는 류혜미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백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는 지 나한테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었고 말이다.
'변명할 사람을 잘못 골랐어.'
아니 애초에 변명할 거리조차 생기면 안 되는 일이었다.
민수는 정말 전제부터 글러 먹은 놈이었다.
나한테 이렇게 장황하게 변명할 시간에 당장 류혜미한테 가서 고백을 해도 모자랄 판에.
되도 않는 변명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정당함을 합리화 시키려는 게 굉장히 꼴불견이었다.
"...네가 진실한 사랑을 알기나 해? 진실한 사랑이라는 건 누구 앞에서 그렇게 막 떠들 수 있는 그런 게 아냐... 그리고 자기 마음을 여자에게 고백하지 않고 라이벌에게 말한다는 건 전형적으로 러브 코미디에서도 패배 히로인이 되는 플래그나 다름없다고... 원래 이런 건 뒤늦게 어...? 어? 무슨 소리야 라고 말하는 쪽이 정실인 게 국룰이야...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정답에 가까운 순간을 기다린 거나 다름없..."
"야 그만하라고."
"...지...허...원래 여기까지 말하고 훈련하러 가려고 했어. 그럼 이만."
아디오스.
참다 참다 내뱉은 한 마디에 민수는 꼬리를 바로 말고 내가 쫓아올 새라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최근 놈은 주인공다운 행보를 하나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한 거라곤 노블과 손을 잡지 않았다 정도인데, 사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반면에 난 글라디르 대회도 우승 했고 류혜미의 마음마저 얻어냈다.
같은 시간을 사는데 그 밀도가 너무나도 다른 이 상황.
웃긴 건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인공 입지는 20.1%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여자를 뺏어야만 올라가는 건가.'
백태양은 백태양의 방식으로만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건지 뭔지.
다른 소설 같았으면 이미 주인공 자리를 차지 하고도 남을 만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뚜르르르ㅡ, 뚜르르르.
그렇게 이것저것 고민을 하며 복도를 걷던 중 전화가 울렸다.
'장두철?'
어차피 반으로 가는 중인데 굳이 전화할 필요가 있나.
아니면 전화로만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 건가.
뚝.
"여보세요?"
예전에 제어팔찌를 줬던 곳 기억나나?
"네 나죠."
콘돔을 팔에 끼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 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인 언급이 나오자 시선이 자연스레 팔목에 향했다.
탱탱해 보이는 고무링이 팔에 착 감겨 있는 불쾌한 감각.
그 와중에 능력 수치를 조절하기 위해서 동그란 톱니바퀴가 작게 있는 것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곳으로 오도록, 줄 게 있다.
"알겠습니다."
새로운 콘돔을 주려는 걸까.
'쓰고 나면 갈아주는 부분까지 비슷하네.'
왜 이런 불쾌한 속성까지 비슷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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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능력제어팔찌를 받은 곳으로 도착했을 땐 장두철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천해일이잖아.'
그를 칭하는 말은 너무나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두 천해일을 초인이라고 불렀다.
초인.
인간을 초월했다는 뜻은 단순히 강하다는 의미와는 궤를 달리 했다.
각성만 하면 평범하다는 수준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렇게 강해져 봤자 '인간'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 했다.
결국에는 한계를 맞이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었으나 천해일은 그런 상식을 거부했다.
모든 예상을 꿰뚫어 버리고 인간이라는 범주 속에서도 담을 수 없는 무력을 소유한 사내.
그게 바로 천해일이었다.
겉보기엔 생활 한복을 입고 있는 정갈한 노인이었으나 그 속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었다.
'이건 진짜 빡센데.'
유민혁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 내며 그의 전력을 파악했을 땐 '힘들겠지만 할 만하다.'라는 견적이 나왔었다.
심지어 그땐 마족화를 얻기 전이었고 지금은 탐관오리 속성까지 추가 됐기에 '충분히 할 만하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뀐 참이었다.
하지만 천해일은 처음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겠구만, 나 천해일일세."
잘 부탁하네.
그 말을 끝으로 천해일이 손을 뻗었을 때.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악수나 하지."
천해일은 순식간에 기세를 펼치며 주변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개 생도의 무력을 시험하겠다고 하기엔 너무 강력한 압박이 몸을 짓누른다.
'내 강압이랑 비슷한데?'
난 아직 강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 나보다 더 위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뜬금없는 실력 행사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클리셰대로 가는 거겠지.'
교장, 이사장, 뭐 어디 대단하고 강력한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하는 행위 중 하나 였다.
오히려 이렇게 해주지 않았으면 서운할 뻔했다.
유망주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이사장과 유망주.
[일점집중 발동! 전신에 힘이 깃듭니다!]
아무리 강한 압박이 와도 내부에서부터 흔들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대응할 여지가 존재 했다.
애초에 실력 파악을 위한 압박인데 천해일 쪽도 그렇게 강하게 힘을 넣을 리는 없을 터.
'일개 생도가 내 힘을 이 정도까지 받아 내다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만 힘을 발산하면 되는 문제였다.
"호오?"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무렵.
난 천해일의 표정이 완전히 흥미로 가득 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철이, 자네도 봤나? 우리를 좀 호구로 보는 구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힘을 조절하고 있군요."
"아무래도 우리 빅토리 아카데미의 미래는 너무 밝은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다.
'안 좋은데...'
불길한 기운이 뒷목을 휘감았다.
마치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감각.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고양이의 얼굴과 천해일의 얼굴이 왜 겹쳐 보이는걸까.
"글라디르에선 메인 스킬도 쓰지 않고 막스 베라미치를 압박하고... 스틸 스킬도 통하지 않고... S급 게이트에서조차 제대로 된 전력을 내 본 적이 없을 테지..."
끼익 끼익 끼익.
천해일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짓이겨진다.
아무런 스킬도 쓰지 않고 단순히 기세를 내뿜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 위력이라니.
왜 그가 초인이라고 불리는 지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꽤 위험해. 전력을 내지 않았다는 건 자기 한계를 모른다는 말이니까 말이야... 그러다가 만약에 생명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팔찌를 벗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자신도 모르는 전력을 내게 된다면?"
자네만을 제외한 모두가 죽을 수도 있네, 물론 주변에 적군만 있다면 괜찮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편리하게 돌아가지 않아서 말이야.
천해일은 말을 계속 이어가며 힘의 강도를 높여갔다.
그 모습은 마치 나에게 힘을 더 내보라는 듯, 여기서 끝이냐는 듯 도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압 발동! 생명체를 지정합니다. 대상 천해일, 장두철!]
장두철까지 강압 대상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반 생도가 당하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는 모습이 너무 괘씸했다.
'힘들어 보이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장두철이 사회생활을 저런 식으로 하는 편이었다니.
쩍 쩌적.
장두철과 천해일의 발밑에 실금이 그어진다.
강압의 효과로 짓눌러지는 걸 서 있는 상태로 버티고 있어서 일어난 결과였다.
"지금 출력이 몇 프로지?"
"1%입니다."
"흠... 역시 예상대로 팔찌가 제 기능하지 못하고 있구만."
대화만 들어 본다면 능력에 대한 조언해주려는 이사장과 생도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앞으로 세 걸음만 더.'
현실은 바닥에 처박힐 듯한 압박을 견뎌 내며 악수하기 위해 걸어가는 생도의 고군분투기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렇게 천해일의 앞에 도착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거짓말처럼 모든 압박감이 사라졌다.
"내가 왜 다짜고짜 자넬 불러서 이런 짓을 했는 지 짐작하겠나?"
"아까 말씀하셨던 팔찌의 기능 때문입니까?"
"맞네. 자네가 방금 정말로 1%의 출력만 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뭘 더 어떻게 생각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천해일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최근 우리는 정말로 이 콘돔처럼 생긴 게 상시 발동형 메인 스킬의 출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네."
이 부분은 나도 어느 정도는 의심하고 있던걸였다.
근데 방금 콘돔이라고 하지 않았나? 역시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구나.
"상시 발동형 메인 스킬도 제각각인데 팔찌는 고작 이거 하나밖에 없다는 게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네. 아직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하는 아이들은 상관없지만 자네와 김민수 생도처럼 메인 스킬을 잘 다루는 아이들이... 이 팔찌를 차고 게이트나 던전 속에 들어갔을 때 과연 팔찌가 제대로 메인 스킬을 제어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이번에 더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걸 준비했네, 디자인도 바꿨고 말이지.
천해일은 그렇게 말을 하며 몸을 돌려서 한 상자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이건 자네 전용으로 제작된 거네."
마음에 들 거라고 확신하지.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상자를 열었을 땐.
'뭐야 이게.'
금팔찌 하나가 빛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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