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민수야 여자친구는 꿈에도 꾸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 * *
오랜만에 등교한 아카데미는 이렇다 할 만한 변화가 있진 않았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내 인기가 너무 과하게 올라왔다는 것.
애들 표정만 봐도 얼마나 얘네가 내 기사를 열심히 챙겨 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태양아 너 혹시 김민혁 헌터 만나 봤어?"
"아... 김민혁 헌터? 선별전에 떨어져서 제대로 못 봤어."
"진짜... 너무 아쉽다."
같은 반 애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서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무슨 헌터 봤냐, 어떤 헌터 진짜 이러냐 등등 정말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혹시 그... 헌터 중에 엄청 코 큰 사람 있지 않아?"
"아 그 사람?"
"어어, 실제로 보니까 어땠어? 진짜 코가 엄청 나?"
"장난 아니긴 하더라. 코가 엄청 커."
"그렇구나... 믿기지 않네... 그 코가 진짜였다니.."
아카데미에 편입을 하고 난 뒤부터 끊임없이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되니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어색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고블린이 떨어져야 할 것 같고, 발밑에 S급 게이트가 열려서 급하게 클리어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태양아 근데 오늘 끝나고 뭐 해?"
"오늘...? 오늘은..."
류혜미를 제대로 꼬실 준비해야지.
그렇게 솔직하게 내뱉고 싶었지만 누구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었고, 유민이한테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유민이는 내가 등교를 한 그 순간부터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A반 애들은 당연히 민수랑 유민이랑 사귈 줄 알고 있다가 현 상황에 당황한 게 얼굴에 내보였지만 글쎄.
민수는 전처럼 하하 호호 친구들과 떠들면서 놀고 있어 '애초에 사귀지도 않은 건가?'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끝난 듯 보였다.
'그래도 애들이 착해서 다행이네.'
등교한 횟수로 치면 겨우 두 자릿수가 넘을까 말까 했지만 애들이 나름 잘 받아줘서 다행이었다.
물론 내가 유명해진 부분도 큰 비중을 차지할 테지만 그래도 어색해하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따르르르르릉.
수업 종이 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수다 타임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잡담 그만하고 앉아라."
"넵."
"오늘은 원래 정규 수업을 하려 했으나 최근 노블 쪽에서 스틸 스킬 사용자가 나온 만큼... 그쪽 방향으로 한 번 강의한도록 하겠다."
스킬 이론 쪽을 담당하는 이진석 교관은 인사도 없이 바로 수업을 진행했다.
들어오자마자 칼 같이 판서를 시작했고 난 첫날을 떠올렸다.
'그땐 그냥 졸았었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뇌가 과부하가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류혜미 꼬실 준비해야 한다.'
현재 김민수가 멜라니를 좋아한다고 해도 멜라니가 극도로 혐오하는바.
아예 방향을 류혜미 쪽으로 트는 방향을 택하는 게 더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김민수도 멜라니가 옆에 있으니까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거지... 멜라니는 늘 함께하지 않으니까 집적거리기가 훨씬 어려울 거야.'
그에 반해서 류혜미는 접근성 쪽으로 보면 누가 봐도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상담실에서 늘 기다리고 있는 류혜미는 찾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물론 연구 때문에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멜라니보다는 접근성이 쉬운 편이었다.
게다가 멜라니는 민수를 혐오하지만 류혜미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 진짜 찐내를 맡아보지 못한 류혜미인 만큼 과거의 약속만을 믿고 콩깍지로 민수를 바라보고 있는 바.
민수도 슬슬 그걸 눈치채는 듯했으니 누가 봐도 류혜미는 지금 민수의 잠재적 여자 친구였다.
'이 새끼 진짜 찌질함이 장난 없긴 하네.'
보통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사랑하는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당분간 연애 멈추지 않나?
민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계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이 여자 까이면 다른 여자한테 들이대고 또 안 된다 싶으면 딴 여자 찔러보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방의 의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김민수같은 태도라면 그 어떤 여자라도 싫어할 게 분명한 지금.
그 모든 걸 너그럽게 포용해주는 류혜미가 김민수의 다음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눈치 없는 찐따에게 달려드는 히로인을 먼저 꼬셔야 하는 기묘한 상황.
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장르가 이상하단 말이야.'
이게 NTL인지 구원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찐따의 여자를 뺏는 건지, 찐따의 손아귀에서 히로인을 구출하는 건지.
'류혜미한테 한 게 입싸 두 번인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진도였지만 멜라니보다는 나았다.
허벅지에 틱택토 게임 몇 번한 거가지고 진도를 나갔다고 하면 유치원생도 웃을 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입싸를 두 번한 류혜미가 가장 진도를 많이 나간 미공략 히로인이었다.
'일단 지금은 여기까지.'
어차피 책상에서 볼펜을 놀려봤자 실상황의 모든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계획 짜는 걸 멈췄다.
나머지는 류혜미를 만나면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터.
지금은 오랜만에 등교한 김에 수업을 듣기로 결론을 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스틸 스킬엔 원본과 열화판이 있으며... 열화판은 원본과 다르게 대항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면 뺏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스틸의 가장 무서운 점은 뺏기만 하면 평생 자기 것이 된다는 거다. 가져가기만 하는 이 스킬은 절대로 남에게 다시 돌려줄 수 없다."
그렇기에 유명한 헌터의 서브 스킬 하나만 뺏어도 전력 차가 확 벌어지게 되는 거지.
평소라면 이론 수업을 지루해 하는 생도들도 눈에 불을 켜고 듣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에 스틸 스킬을 가지고 있는 상대와 만난다면 그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쳐라. 스킬은 재산이다. 아무리 등급이 낮더라도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 따라서 무조건 도망치도록."
이진석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만큼 스틸이라는 스킬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겠지.
나도 마족화를 쓰지 않았더라면 뭐 하나 뺏겨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이지준이 스틸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과 탐관오리 속성의 가능성을 믿고 내린 판단의 결과일 뿐.
실제로 갑자기 만나서 기습 당한다면 대처하지 못하고 서브 스킬을 그대로 내줄 가능성이 높았다.
"절대로 맞서 싸우지마라. 살아남아야 더 강해질 수 있는 거다. 너희들은 약하다. 빅토리 아카데미 생도로서 1%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스틸 스킬 같은 경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걸 명심해라. 백태양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그건 그냥 백태양이기 때문이다."
뭐야.
너무 치켜세워주는 거 아냐?
얌전히 수업을 듣고 있다가 때 아닌 날벼락에 고개를 들었다.
보통 이러면 차별 대우라고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와 교관님, 너무 팩트로 때리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희도 도망칠 거라구요."
"혹시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난 너희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내 걱정과는 다르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수업이 막바지로 가고 있어서 이진석이 농담처럼 던진 말인 듯 보였다.
질투심에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 민수는 진담으로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뭐.
'괜찮네.'
상관없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한 일상에 몸의 긴장이 싹 풀렸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아 그리고 백태양과 김민수는 류혜미 교관님한테 찾아가도록, 이유는 알 거라고 생각한다."
""넵""
이진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김민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명 다 목적은 같았다.
'결과가 다를 뿐.'
류혜미를 가지는 건 나였다.
++++++++++++++++++++++
수업이 끝나고 류혜미의 연구실로 가는 길.
나와 김민수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김민수가 몇 발자국 더 앞에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이런 것조차 승부욕을 불태우는 듯했다.
"백태양, 혜미 누..., 아니 류혜미 교관님한테는 내가 먼저 가 볼게."
"그래라."
김민수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또 이상한 연애상담받은 거겠지.
'넌 최고의 타이밍을 놓친 거다.'
김민수가 류혜미를 꼬실수 있었던 최적의 시기는 내가 유민이를 빼앗은 바로 직후였다.
그땐 유민이와 시간을 보내기도 해야 했고 멜라니와 안면을 트느라 매우 바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저 당시엔 '류혜미는 김민수바라기다.'라는 생각 때문에 류혜미한테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류혜미한테 떡밥조차 던지지 않았을 때 김민수가 류혜미를 덥썩 잡았다면?
'퀘스트 평생 못 깰 뻔했지.'
NTL 퀘스트는 절대로 깨질 수 없는 난공불략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민수는 멍청하게도 류혜미를 찾는 게 아닌 멜라니한테 달라붙었었다.
카이반 모델이니 뭐니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강해지니 뭐니 하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그 결과.
멜라니는 김민수를 싫어하고 류혜미는 민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 옅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제는 어떻게 꼬시냐는 거다.'
멜라니 같은 경우는 거의 다 넘어온 상황이어서 데이트 몇 번 하면 바로 공략할 수 있었다.
근데 류혜미는 유사 성행위를 했음에도 공략 기미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웃기게도 멜라니는 정신적 공략 쪽으로 완벽했고 류혜미는 육체적 공략 쪽으로 완벽했다.
둘 다 공략한 정도의 반만큼만 나머지에 투자 되도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굉장히 아쉬웠다.
'아니지 오히려 이래야 더 재미있긴 하지.'
너무 쉽게 퀘스트를 깨면 보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하며 걷다가 류혜미 연구실 앞에 도착했을 때.
김민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나 먼저 검사 받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절대로!"
이건 아까도 말한 거잖아.
갑자기 확 짜증이 났다.
"야, 김민수 너 내가 나랑 말할 때 어떻게 하라고 했어."
"좀 멀리 떨어지고 혀는 꼭 넣어서 침 안 튀게."
"그리고 마지막."
"...급발진 하지 않기."
"늘 명심해라."
"응..."
드르륵.
민수는 그 말을 끝으로 후다닥 류혜미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 그때동안 연구실 앞 게시판에 걸린 여러 공고문들을 읽기로 했다.
'...아카데미 합동 교육?'
이런 것도 하나?
아카데미 합동이라고 하면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타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히로인이 또 등장하는 건가.'
지금도 바쁜데 일이 좀 커지겠네.
성녀일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인물?
드르륵.
새로운 전개가 펼쳐질 지 몰라서 여러 가능성을 펼쳐두고 있을 무렵 연구실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간 지 아직 삼십초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김민수는 울상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같이 들어오래."
"아 그래?"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슬슬 또 내 정액이 필요해진 거겠지.'
민수야 여자친구는 꿈에도 꾸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