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니여친쩔더라-121화 (121/325)

〈 121화 〉 민수만한 샌드백이 없는데.

* * *

마계의 가장 고고한 일곱 개의 탑 중 하나.

그곳의 옥상에서 샤엘은 오늘도 어떻게 하면 중간계로 또다시 넘어갈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마왕은 때가 되면 그렇게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갈 수 있다고 했으나 샤엘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빨리 태양님을 만나야 하는데..."

샤엘은 마계 최고의 화가를 불러서 만든 백태양 초상화를 바라봤다.

굵직한 인상과 진한 눈매 그리고 새하얀 머리칼.

그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태양니이이이임..."

샤엘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마계 최고의 재봉사를 불러서 만든 백태양 인형을 끌어안았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고 첫 경험은 짜릿했다.

또다시 태양님의 몸이 내 몸에 들어와 줬으면...

"왜 인간들은 빌어먹게 약한 거야!"

화가 났다.

마왕에게 대체 중간계에 언제 갈 수 있는 거냐고 명확한 시기를 물었을 때.

마왕은 '인간들이 강해지면 갈 수 있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인간이 강해지는 것과 마족이 중간계로 자유롭게 넘어가는 게 무슨 상관인 지는 모르겠으나 짜증이 났다.

태양님을 빼면 하나같이 다 약해 빠져서 도움조차 되지 않다니.

약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이렇게 애타는 마음을 가득 안고 있는 서큐버스가 사랑을 앓고 있는데 인간들은 약하기만 하다니.

하루라도 빨리 태양님 품에 폭 안겨서 발을 동동 구르며 미래 자녀 계획 이야기해야 하고 싶은데!

뽀뽀도 하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더한 것도 막 태양님이랑 할 건데!

"약해 빠진 것들, 다음에 강림할 땐 제대로 혼내주겠어."

그런 다음에 모두 태양님의 뜻대로 해야지.

샤엘은 히히 웃으며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해답이 없는 이상 백태양 인형이라도 끌고 뒹굴거리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샤엘은 예전 같았으면 야시시한 잠옷을 입었겠으나 지금은 몸을 꽁꽁 싸맨 파자마를 택했다.

'이젠 임자가 있는 몸이니까...'

몸가짐에도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온 거였다.

그녀는 백태양을 생각하며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

자기 손가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굵직하고 우람한 크기.

그래도 지금은 이곳에 없으니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손가락으로라도 달래려는 찰나.

똑똑 똑똑.

"샤엘님! 지금 큰일 났습니다!"

"뭔데? 진짜 큰일이 아니면 넌 나한테 죽어."

태양님 인형으로 하는 자위 시간을 막은 만큼 아주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샤엘은 속으로 말을 씹으며 문을 열었다.

"중간계에서 죄악의 일곱 뿌리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네 그렇...푸하...습니다..."

하인의 말이 맞다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근데 그게 왜 중간계에서 나타나지? 거긴 마족도 없을 텐데.

"일단... 다들 어전으로 모시라는 마왕님의 지시입니다."

"그래, 알겠어."

준비하고 갈게.

샤엘은 문을 닫으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태양님이다.'

오직 그만이 자격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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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준은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넌 대체 뭐냐..."

악마.

눈앞에 악마가 있었다.

"왜 그래? 난 여기서 쓸쓸하게 사라질 거라며, 빨리 뭐 어떻게 해 봐."

"...정녕 인간이 맞는 거냐? 어떻게 그런...모습으로..."

"말을 왜 이렇게 떨어, 겁 먹었어 혹시?"

피부는 석탄처럼 까맣다.

그사이사이 돋아 있는 핏줄이 금색으로 칠해져 금맥이 흐르는 광산을 보는 듯했다.

하얀 머리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며 사자의 갈기처럼 넓게 펴져 있었다.

몸에 걸쳐진 검은색 용포는 놈을 무슨 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쩔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며 몸에 걸친 수많은 장신구들이 빛을 낸다.

"겁 먹었어?"

"여전히 오만하구나!"

이지준은 큰소리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놈의 무기도 바뀌었군.'

들고 있던 곤봉 끝에 흉악한 날이 솟아났다.

언뜻 보면 날이 하나뿐인 곡괭이로 보였다.

'...이건 차원이 다르잖아.'

S급 게이트를 두 번 클리어한 생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웃기지 말라고 동료를 구박 했다.

다 정부가 꾸민 일이고 빅토리 아카데미에서 조작한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유민혁 정도의 헌터가 그런 일했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고작 생도였다.

아무리 컨셉형 게이트였다고 해도 '생도' 주제에.

헌터가 된 지 이년이 넘은 지금도 이지준은 아직 S급 게이트와 던전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어디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껴주질 않았다.

완전히 다른 세상.

밥을 먹는 테이블 자체가 달랐다.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자신은 선택 받은 '선천적' 각성자인데, 왜 이런 취급받는단 말인가.

그래서 노블에 들어갔고 남의 스킬을 빼앗았다.

스킬을 훔칠 때마다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자신을 보며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

의뢰금을 높일 때 당연한 대우라고 생각했으며 양심의 가책 또한 없었다.

"계속 가만히 거기서 생각만 하네, 내가 간다 그럼."

툭.

"어?"

땅을 밟는 소리가 어떻게 저렇게 가벼울 수 있지?

왜 백태양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이지준은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따라갈 수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거라곤 [암흑의 장막]을 펼친 뒤 백태양의 모습이 변했다는 것뿐이었다.

백태양의 주먹을 막으려고 손을 뻗으면 손이 부러진다.

놈의 발차기를 피하려고 몸을 비틀어도 신묘하게 다리가 휘어져 정확히 정강이를 박살 낸다.

짤그럭 짤그럭

기척조차 숨길 수 없는 저 금속음.

목에 걸쳐진 금목걸이부터 옷에 달린 장신구들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낌새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지금.

이지준은 계속해서 장신구들에 집중했다.

'아직은 몸이 따라잡지 못할 뿐... 결국엔 몸에 걸쳐진 장신구가 내는 소리를 듣고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틈을 봐서 놈의 스킬을 빼앗는다.

계획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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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 상대방의 서브 스킬을 훔칩니다. 이때 상대방의 신체와 닿아야 합니다.

(해당 스킬은 열화판이기에 한 명 당 한 개의 스킬만 훔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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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또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상대방의 서브 스킬을 훔치는 말도 안 되는 성능.

열화판이라서 한 명 당 하나라는 제한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순간이다.'

저렇게 강력한 스킬을 저런 놈이 가지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내가 더 잘 써 주도록 하지.'

이지준은 기회를 기다렸다.

"크학!"

그때까지 맞는 거?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어차피 끝까지 가면 승리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정도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었다.

[초회복 발동! 다친 부위를 회복합니다!]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박살이 나도 몇 초만 있으면 금방 회복이 된다.

즉 백태양이 아무리 상처를 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소리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놈의 곡괭이였다.

곡괭이의 날에 찍히는 순간 그대로 몸이 뜯어질 것 같은 미래가 그려졌다.

'저것만... 저것만 피하고 나머지는 다 맞는다.'

그렇게 이지준은 끝도 없이 백태양의 공격을 허용했다.

정신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백태양의 스킬을 빼앗고자 하는 탐욕 하나로 견뎠다.

어차피 글라디르 대회 규칙 때문에 죽을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편했다.

짤랑짤랑.

'지금!!!'

백태양의 목에 걸린 금목걸이 소리에 반응해 놈의 공격을 피했다.

'됐어! 됐다고!'

한 번 익숙해졌다면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오 뭐야, 이제 좀 피하네?"

진즉에 좀 이렇게 하지 그랬어.

백태양의 말에 이지준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하하하! 이제 끝이다!"

놈은 자신을 계속 따라잡으면서 때리느냐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터.

반대로 자신은 초회복을 사용하며 체력을 계속 아껴 놓은 상태였다.

[기어 체인지­스피드 발동! 가속합니다!]

놈은 아까부터 일정한 박자로 자신을 때리고 있었다.

첫 호흡을 내뱉을 땐 주먹을 뻗고 호흡을 멈추며 곡괭이를 휘두른다.

그다음 다시 숨을 들이마실 때 몸이 재정비를 하는데 이때 금속음이 같이 울렸다.

첫 호흡의 주먹.

피하지 못하고 맞는다.

호흡을 멈추며 날아오는 곡괭이.

어쩔 수 없이 팔 한쪽을 주고 놈에게 붙는다.

짤랑.

'바로 지금!'

아무리 날뛰어 봤자 니 놈은 생도라고!

'주제를 알아라!'

대처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

이지준은 순식간에 백태양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스틸! 발동!"

"뭐?"

이지준은 똑똑히 목격했다.

백태양의 오만한 얼굴에 당혹감이란 감정이 깃든 순간을 말이다.

[스틸 발동! 백태양의 서브 스킬을 강탈합니다!]

"스킬빨로 여기까지 올라와놓고! 니 놈이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나?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니 스킬은 내가 잘 써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발판으로 사용할 테니까 말이야!"

이지준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나도 저 스킬만 있다면!

'노블의 간부가 될 수도 있어!'

근데 왜 이렇게 훔치는 데 오래 걸리지?

원래라면 손에 닿자마자 바로 스킬을 훔쳐야 정상일 텐데.

이지준은 그때야 자기 손이 까맣게 물들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스틸 실패! 탐관오리의 것을 빼앗는 건 불가능합니다!]

뭐?

탐관오리?

'그게 뭔데?'

아쉽게도 이지준은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백태양의 주먹이 뺨에 정확히 파고들면서 이지준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꾸아아아아악!"

쾅!

이지준은 볼품없게 땅에 처박혔다.

딸랑.

백태양이 걸을 때마다 보석들이 부딪친다.

딸랑.

피부에서 흐르는 금맥이 짙은 탐욕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다.

짤랑.

놈이 환하게 웃자 새하얀 이가 날카롭게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았다.

짤랑.

이지준은 두려웠다.

겨우 몸을 일으키며 계속 뒷걸음질 쳤다.

자신이 쳐둔 장막에 몸이 막힐 때까지, 막혀도 장막을 두드리며 백태양을 향해 애처롭게 외쳤다.

"오지 마... 오지 마...! 다가오지 말라고!"

스틸도 실패했다.

애초에 전투 능력은 터무니없이 밀렸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 민수만큼 멱 따는 소리가 제대로 나질 않네."

민수 만한 샌드백이 없는데.

백태양은 지금, 이 순간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하며 계속 다가왔다.

공포.

이지준에게 백태양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큰 공포였다.

"그래도 꿩 대신 닭이라고... 스틸 이야기도 자세히 들을 겸... 알지?"

이지준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깃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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