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 * *
승자는 백태양 헌터입니다!
'쉽네.'
8강 상대는 노블 쪽이 아니었단 걸 빼면 특이사항은 따로 없었다.
S급 게이트를 두 번이나 클리어한 지금.
글라디르에서 날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헌터는 몇 되지 않았다.
그중에 몇 되는 놈들이라고 꼽자면.
아아! 대단하군요! 여기서도 속전속결! 엄청난 속도로 막스 헌터가 또다시 상대방을 KO시킵니다!
노블로 추정되는 막스 베라미치.
기이하고 알 수 없는 힘의 근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지준 헌터가 재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합니다!
마찬가지로 노블로 추정되는 이지준.
불굴의 용사! 선비의 정신! 진정한 영웅의 길! 김민수 헌터가 시원하게 상대방을 압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선비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김민수 정도였다.
'예상대로네.'
정확히 올라올 것 같은 놈들만 준결승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나저나 안내 방송은 왜 내가 이길 때만 수식어가 없어?'
아무리 대회를 노블이 먹었다지만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차별을 할 줄은 몰랐다.
똑같이 이겼는데 '누구는 뭐 어쩌구 저쩌구 승리합니다.' 이래 놓고 나는 '승자는 백태양입니다!'정도라니.
정말 차별하는 방식이 치사하고 쪼잔했다.
불이익을 줄 거면 시원하게 주던가, 관객들 눈치 보느냐 찔끔찔끔 건드리기만 하는 이 유치함.
정말 딱 안뚱땡 수준이었다.
준결승부터는 전처럼 경기를 동시에 진행하는 게 아닌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본선을 이어서 시작하겠습니다.
확실히 빠르게 끝낸 보람이 있었다.
글라디르 대회는 당일에 시작해서 당일에 끝나는 초고속 신인 헌터 대회인 만큼 체력 안배가 굉장히 중요했다.
어설프게 상대방의 실력을 파악해 보겠다고 경기 템포를 느슨하게 풀었다간 손해를 보기 십상인 것.
실제로 나를 포함해서 준결승에 진출한 헌터들 모두 경기 시간이 극도로 짧았다.
아무리 길게 끌어도 이 분을 넘어가지 않는 걸 보면 글라디르 대회를 모두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민수는...'
아마도 노블이 알려주지 않았을까.
"여어, 백태양. 너도 이겼구나? 뭐 당연한 거겠지만."
"어어 그래..."
양반은 못 된다고 김민수는 자기 욕하는 걸 듣기라도 했는지 잽싸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거리감 제대로 잡지 못하고 달라붙는 버릇은 아마 죽어도 못 고칠 듯 보였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저 막스 베라마치 헌터랑 이지준 헌터는 아마도 노블 쪽인 것 같아. 날 보는 눈동자도 좀... 굉장히 사나웠거든. 그 안에 숨겨진 흉폭한 야수를 봤다고 해야 하나? 조심해.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으니까, 조금 전처럼 몇 분 안에 승부를 볼 수 없을지도 몰라... 특히 내 이 선비의 정신으로 살펴봤는데 아무래도 뭔가 수작이..."
민수는 정말로 긴장이 많이 한 상태로 보였다.
평소처럼 허세와 겉멋에 찌들어서 말하는 게 아닌 목소리가 조금씩 달달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공 특유의 감 같은걸로 뭔가 느낀 건 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놈이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론 넌 절대로 지지 마라 백태양, 내가 널 반드시 쓰러트려야 하니까."
"그래 알겠으니까 제발 말할 때 혓바닥 좀 잘 넣고 말해. 침이 너무 튀겨."
"...미안."
근데 정말 이렇게 되면 김민수랑 결승에서 만나게 되는 건가?
'너무 싱거운데?'
김민수는 고전명작[춘향전] 게이트 이후 극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때 김민수가 잠시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건 메인 스킬이 강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시 발동형 메인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글라디르에선 김민수가 나에게 유리한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붓검도 탐욕의 곤봉으로 얼마든지 상쇄가 가능했고 신체 능력은 내 쪽이 우위였다.
변수가 있다면 놈의 서브 스킬이 얼마나 있냐였는데, 사실 이것도 [강타]가 강화된 내 쪽이 더 유리할 게 뻔했다.
'결국 아무리 많은 스킬이 있어도 양보단 질이었으니까.'
이대로 변수 없이 우승을 한다고 했을 때 그럼 남은 문제는 스킬 헌터였다.
주기적으로 노블에 관한 정보를 장두철에게 보내고 있긴 했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가장 확실한 건 스킬을 훔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자료에 담는 건데 마땅한 기회가 없었다.
'뭘 하긴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뭐 하려고 하면 여자들이 응원하러 오고 조사 좀 하러 다니려고 하면 시합이 시작된다.
아아! 지금부터 바로 준결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준결승 경기 출전자는 김민수 헌터와 막스 베라미치 헌터입니다! 즉시 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말이다.
"먼저 결승전에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래, 힘내라."
김민수가 막스 베라미치한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김민수를 소중하게 여기는 안뚱땡이 주인공의 패배를 이런 곳에서 허용할 리가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안뚱땡도 몰랐던 역할에 빙의를 한 거여서 예외라고 쳐도 노블은 아닐 테니까.
'철저하게 짜인 조직이겠지.'
안뚱땡이 전부 간섭은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김민수를 옹호하는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터.
때문에 이번 경기의 결말은 보나 마나 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승리를 예상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김민수와 똑같은 표정을 하는 막스 베라미치.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는 곧 나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설마 노블에서 져줄 생각이 없는 건가?'
김민수를 포기할 리가 없을 텐데.
막스 베라미치는 김민수를 굉장히 낮잡아 보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력에 과한 자신감이 깃든 미소와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주먹.
설마.
자 그럼 지금 바로 경기를 시자아아아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아아!!!
"끄아아악!"
불안감은 현실로 변했다.
경기가 시작된다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김민수는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크하하하하! 불굴의 용사도 뭐 별거 없구나!"
막스가 호쾌하게 말을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김민수가 나가떨어진다.
붓검을 휘둘러도 제대로 공격이 들어가지 않으며 '용! 용!' 거리며 소환수를 불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
태산을 부술 듯한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민수는 막기에 급급했다.
주먹이 검 면을 때리면 몸이 흔들리고 진각을 밟으며 나아가면 균형 잡기에 신경을 쏟는다.
[불굴의 용사]라는 메인 스킬이 없어진 민수는 본격적인 전력 대결 구도에서 너무나 나약했다.
용사가 용사의 힘을 발휘하지 못 했을 때 얼마나 처참하게 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와, 이건...'
아주 재미있었다.
그래, 이게 소설이지.
결말이 뻔하게 결정 된 대회를 계속 한다는 지루함에 몸이 느슨해진 참이다.
민수야 멘탈이 좋으니 지금 저렇게 처맞고 있어도 금방 회복하겠지.
다 좋았다.
다 좋았는데, 딱 하나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이렇게 찝찝하지.'
김민수는 찌질함의 명대사이자 안뚱땡의 자캐딸 결과물이다.
근데 왜 이렇게 맞는 걸 보니까 짜증이 나는 걸까.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화가 나서?'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건 마치...
'내 동생을 누가 욕했을 때... 느낌?'
나만 놀려야 되는 놈이 근본도 없는 새끼 한테 맞는 걸 보는 느낌이다.
패도 내가 패고, 참교육도 내가 시킬 거고, 꼽 주는 것도 다 내 역할이어야 할 텐데.
묘하게 역할을 뺏긴 느낌이 난다.
김민수 담당일진이 지금 눈앞에 떡 하니 있는 마당에 시원하게 김민수를 패다니.
'내가 더 잘 패는데'
심지어 놈은 김민수의 돼지 멱따는 소리도 내지 못 하는 초짜 중에 초짜였다.
민수를 상대할 땐 일단 뺨따구부터 갈겨서 '꾸에에엑' 소리를 전방에 오초간 발사 시켜야하거늘.
"나 막스 베라미치가 오늘 빅토리 아카데미 생도를 모조리 박살 내고 아직까진 헌터의 벽이 높다는 걸 톡톡히 알려주도록 하지!"
"크헉! 나 아직 안 졌어!"
민수의 말과 다르게 승부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막스는 상처 하나 없이 몸이 멀쩡했지만 민수는 정말 처참한 상황이었다.
머리를 맞은 건지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다리도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명백하게 패색이 짙은 이 상황.
막스는 포기하지 않는 민수를 보고 짙게 웃더니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주먹을 중심으로 빛이 모여 들며 커다란빛의 구가 완성 됐다.
'환하네.'
태양을 뭉쳐 놓은 듯한 밝기와 열기.
직격 된다면 아무리 김민수라도 무사하긴 힘들어 보였다.
"먼저 병실에 가 있어라, 어차피 백태양 그놈도 따라가게 될 테니까!"
"아직 안 졌다니까!"
"입만 살았구나."
짧은 시간에 김민수를 거기까지 파악한 건가?
'만만치 않은 놈이군.'
얕잡아볼 수 없었다.
"잘 가라!"
막스의 주먹이 김민수의 볼에 닿으려는 그 순간.
안내 방송이 울렸다.
경기 중지! 거기까지 입니다! 승자는 막스 베라미치!
후웅.
안내 방송을 듣자마자 막스는 주먹을 멈췄다.
정확히 뺨이랑 닿기 직전이었는데, 주먹이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수는 경기장 밖으로 날아갔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민수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크하하하! 김민수 꼴을 보니 백태양 너도 비슷하겠구나!"
막스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마이크를 잡지 않았음에도 소리가 쩌렁쩌렁해서 주변에 있는 나무를 흔들리게 할 정도였다.
"이게 생도와 진짜 헌터의 차이다. 그리고 백태양! 너와 나는..."
선천적 각성자와 후천적 각성자라는 더 큰 차이가 있지.
마지막 말은 입 모양으로만 움직인 걸로 봐선 노블은 아직 양지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낼 기미는 없어 보였다.
'김민수를 놀리고 패는 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지만...'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곧이어 바로 다음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백태양 헌터와 이지준 헌터는 무대 위로 올라와주시길 바랍니다!
이지준부터 패고 바로 막스를 패야겠군.
곤봉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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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준결승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지준에게 달려가려고 할 때.
이지준은 갑자기 손바닥을 쫙 펼치며 입을 열었다.
"백태양, 넌 너무 오만하다."
"뭐?"
"지금부터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걸 알려주겠다."
이지준이 펼친 손부터 검은 장막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그 몸집을 불려 나간다.
뭔가 있어 보여서 방비하려고 했지만, 그럴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몸집을 빠르게 불려간 검은 장막은 어느새 경기장을 가득 삼키고 있었다.
"이건... 노블에서 내게 내려주신 권능 중 하나다...이제부터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승부가 날 때까지 아무도 알 수 없지."
넌 여기서 스킬을 다 뺏기게 되고 나약하게 나가 떨어질 거다.
이지준의 단호한 말.
누가 봐도 진심처럼 보였다.
게다가 스킬을 가져간다고 말하는 것까지 봐선 놈이 스킬 헌터로 추정 됐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근데 밖에서 못 본다고?"
"그래, 무섭나? 넌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여기서 사라질 거다."
아무도 못 본단 말이지.
[마족화 발동! 장시간 유지할 시 신체에 부하가 걸립니다. 조심하세요!]
"오늘 맞을 놈들이 좀 많네."
먼저 이렇게 정체를 밝혀주니 너무 고마웠다.
복잡하게 추리나 조사 같은걸 할 필요 없이 그냥 두들겨 패면 되는 거 아닌가.
노블의 기둥을 박살 낼 차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