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니여친쩔더라-119화 (119/325)

〈 119화 〉 난 엑스트라가 과거 회상하거나 말 길게 하는 거 안 좋아해.

* * *

'별다른 수작은 안 부린 것 같은데.'

안내 방송에 따라 설치된 무대 위에 올라왔을 때 감각을 집중했다.

무대 안에서 미세하게 기계 소리가 들리는 지부터 다른 사람의 기척이 있는지까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모든 걸 살폈다.

노블이 관람객의 눈치를 본다는 걸 알고 있어도 혹시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패색이 짙어질 때 미친 척하고 난입해서 경기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건 결승에서나 그러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약해 보이긴 엄청 약해 보여서 더 신경 쓰이네.'

차라리 엄청 강해 보이는 인상이나 실력자였다면 긴장이라도 되지 않았을 거다.

한 수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보단 순수하게 실력으로 올라왔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근데 박병철은 그런 쪽과 정말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백태양, 넌 여기서 반드시 쓰러지게 될 거다."

전형적인 엑스트라의 대사부터 시작해서.

"나는 절대로 여기서 질 수 없다."

여차하면 과거 회상으로 넘어가기 쉬운 떡밥도 던지고.

"어차피 날 이기고 가도 그분들의 발끝에도 닿을 수 없으니 미리 나에게 쓰러지는 게 서로 좋은 일이야."

흑막을 암시하며 앞으로 있을 고난과 역경을 미리 예보해주는 행보까지.

그야말로 빌런 쪽 엑스트라의 정석 중에 정석이었다.

'예전에 만화 읽을 때 이런 놈들 진짜 싫어했는데.'

어차피 결과는 주인공 쪽의 승리로 정해져 있는 이야기가 진행될 때.

굳이 엑스트라의 과거 회상과 몇 번이고 반복했던 떡밥을 계속 언급하며 분량을 잡아먹는 식의 진행 방식.

심지어 그게 한 화에 끝나는 게 아니라 과거 회상으로 넘어가면서 다음 화를 통째로 엑스트라의 분량으로 채워진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 만화를 읽을 때마다 늘 안 읽고 다음 화가 언제 나오길 손가락 빨며 기다렸던 게 기억난다.

"그러니까 널 위해서 말한다, 백태양. 기권해라. 넌 우리 쪽에선 별로지만 헌터적으로 봤을 때 정말 큰 자산이야. 차라리 여기서 기권을 하고 나중을 기약해라. 그때쯤이면 모든 게 나누어져 있겠지만... 너 정도라면 충분히 우리 쪽에 속할 기반을 다질..."

"그만, 그만 말해. 난 엑스트라가 그렇게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해."

"여전히 예의가 없구나. 너나 김민수 그놈이나... 똑같아."

김민수보다 더 말이 많은 놈이 있을 줄이야.

아주 가만히 있으니까 한도 끝도 없이 말을 할 기색이었다.

본선은 16강으로 진행 되니 앞으로 경기는 총 네 번.

앞으로 준결승까지는 두 번 남은 상황이다.

'박병철 정도면... 그래도 말단은 아니겠지만... 약한 건 맞으니까...'

안뚱땡의 라노벨식 전개를 파악해 봤을 때 최소한 준결승 전까지는 강한 놈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뻔한 걸 좋아하고 누구보다 클리셰를 사랑하는 안뚱땡인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하지 않고 떡밥만 뿌리는 용도의 놈을 오래 상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정답은 '그럴 필요 없다.'였다.

아아! 그럼 양측 다 준비가 끝나신 것 같으니 지금부터 바로 본 경기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경기를! 시~~자아아아아아악!!! 하겠습니다!!!

쾅!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땅을 박차고 움직였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선별전과 예선전엔 전력을 숨겼지만 이제부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주 빠르게 상대방을 끝내버리면 전력을 보여 줘도 제대로 보지 못할 테니까.

여러 명과 싸울 필요 없이 단 한 명과 싸우는 거라면 빠르게 끝내는 게 오히려 더 정보를 숨길 수 있었다.

"당연히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백태양! 하지만 니 놈이 그 커다란 무기 케이스에서 무기를 꺼내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걸 알고 있지! 나는 그 틈에...!"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마, 진짜 없어 보이니까."

박병철의 말은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침대 만한 무기 케이스를 휘두르거나 그 안에 들어 있는 무기를 꺼내는 건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 맞았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카이반에선 '전개' 기능을 넣어서 들어 있는 무기를 전부 사출할 수 있도록 보완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시간이 필요했으니 다 따져 봤을 때 카이반 시리즈는 공격을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 시각은 곧 빈틈으로 이어지고 그사이에 파고드는 상대방의 공격에 굉장히 취약했다.

여태까진 난전이 펼쳐졌기에 무기를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달려들자마자 똑같이 나에게 쇄도하는 박병철은 누구보다 그 틈을 잘 알고 있을 터.

'내가 무기를 꺼내기 전에 한 방 먹이려는 거겠지.'

놈의 작전은 정말로 완벽했다.

내가 '카이반 시리즈'를 쓴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쾅!

상대와 몸이 가까워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

무기 케이스를 내려놓는다.

비교적으로 가벼워진 신체는 처음에 돌진했을 때의 속도보다 더욱 가속한다.

"크하하! 속도를 위해 무기를 포기한 건가! 가소롭구나! 날 맨몸으로 제압할 생각하다니! 메인 스킬의 격차를 뼈저리게 알게 해 주마! 금강 발동!"

이걸 노린 거였나.

왜 무기를 안 들고 했나 했더니 몸 전체를 무기로 사용하려고 한 거였다.

스킬 명을 외치면서 쓴 덕분에 놈의 메인 스킬이 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신체 강화계, 그냥 포X몬 단단해지기 같은 거네.'

다른 점은 몸이 다이아처럼 반짝 거린다는 정도.

도대체 어떻게 예선전을 뚫었는 지가 의문이 드는 스킬이었다.

"거기다가 이어서!!! 로켓 추진력!"

스킬 하나하나 몰래 발동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정보를 오픈 한다.

정말 구석구석 하나도 빠짐없이 엑스트라다운 행보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가뜩이나 가까워진 놈과 내 사이의 거리가 더 빠르게 좁혀진다.

박병철의 척추 부분에 불꽃 같은 게 일렁이는 걸로 봐선 저게 그 '로켓 추진력'인 듯 보였다.

"고생이 많다."

놈과 부딪치면 뼈가 부러지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 일촉측발의 상황.

난 누구보다 여유로웠다.

[일점집중 발동! 신체의 모든 부분을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신체 능력을 극도로 강화하는 '알파메일'과 집중을 통해 힘의 이동을 더 자유롭게 하는 '일점집중'.

이 두 가지의 시너지는 인간의 신체를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박병철과 닿기 직전 발끝으로 땅을 차 속도를 순식간에 감소 시킨다.

신체의 균형은 항상 유지 되어 있고 관성으로 인한 제약도 제대로 받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다른 시간에 사는 것처럼.

날 단숨에 테이크 다운시키려고 뻗는 박병철의 팔.

가뿐하게 옆으로 몸을 돌리며 놈의 몸 옆으로 이동한다.

"하하! 피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맨몸으로 내 몸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거다!"

박병철은 내가 공격을 피한 걸 예상하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금강의 신체를 맨몸으로 피해 입힐 수 없다는 말.

맞는 말이었다.

'처맞는 말.'

[뒤처리 발동! 지저분한 공간을 정리합니다!]

뒤처리를 발동하자마자 손에 탐욕의 곤봉이 생성 된다.

구석기 시대에서나 볼 법한 투박한 모형의 나무 곤봉.

겉모습만 이럴 뿐 실제로는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파괴적이었다.

'역시 되는군.'

[뒤처리]는 지저분한 공간을 정리하는 것으로 본인의 신체로만 할 수 있는 행동에 한한다는 조건을 가진 스킬이다.

난 여기서 [뒤처리]의 효과와 조건을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없을까 고민 했다.

탐욕의 곤봉 같은 경우 강한 무기인 건 맞지만 무기를 착용하거나 회수할 때의 제약이 많았다.

카이반 시리즈는 침대 케이스에 다 보관이 가능했지만 곤봉은 일일이 들고 다녀야 했다.

또한 카이반 시리즈는 무기를 투척하는 방식으로 사용해도 자동 회수 기능으로 인해 돌아왔지만 곤봉은 그런 기능조차 없었다.

즉 강한 무기지만 처음부터 그 강한 무기를 상대방에게 노출해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 했다.

하지만.

[뒤처리]를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이후부터 그 단점이 완전히 사라졌다.

무기 케이스에 탐욕의 곤봉을 넣어 두면, 원래 정리된 공간에 '탐욕의 곤봉'이라는 이물질이 침입 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때 내가 무기 케이스에 [뒤처리]를 발동하면, '탐욕의 곤봉'이 정돈 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되는 원리였다.

"이걸로는 될 거야."

빡!

손에 들린 곤봉으로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쾅!

몸이 단단해진 것과 충격을 흡수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아무리 타격에 면역이 있다고 해도 타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빨리빨리 끝내자."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머리가 경기장 바닥에 박힌 박병철의 뒷머리를 잡아들었다.

"끄악! 뭐야! 왜 안 되는 거야! 무슨 일이야.!"

"뭐긴 뭐야, 니 그 금강이 제대로 안 먹힌다는 거지."

박병철의 금강은 몸을 단단하게 만들 뿐 다른 건 없어 보였다.

몸 하나 믿고 육탄전을 선택했나 본데, 단단히 잘못 선택했다.

놈의 메인 스킬보다 더 단단한 무기가 지금 내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붕 붕.

놈은 머리채를 잡힌 순간 다음 미래를 직감했는 지 거칠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뜰채에 올라온 미꾸라지처럼 팔딱팔딱 거리는 게 불쌍했다.

"놔! 놓으라고!"

박병철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팔을 움직이려고 하면 팔꿈치에 곤봉을 휘둘렀고 다리를 움직이려고 하면 정강이를 후려쳤다.

아무리 단단한 금속이라고 해도 두드리면 금이 가고 금을 치면 부서지기 마련.

실제로 놈의 신체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뭐 더 보여 줄 거 없냐?"

"끄허...어...어..."

"아... 시끄러워서 입을 너무 많이때렸나... 말을 못 하네."

더 할 필요도 없겠지.

잡고 있던 박병철의 뒤통수를 경기장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승자는... 백태양 헌터입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전광판을 확인하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백태양 승리="" ,="" 35초="" KO="">>

'나쁘지 않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병철이 비장의 수단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다.

궁지에 몰리면 뺏은 스킬을 활용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런 기색이 아무것도 없었다.

노블과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16강까지 올라온 놈이면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약해.'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그러고 보니 놈이 중간에 내뱉은 말이 걸렸다.

'왜 안 되냐고 했던가?'

만약 그게 훔친 스킬에 대한 발동과 관련된 발언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쩌면 나와 박병철이 격돌하기 직전에 내 무기를 보고 급하게 스킬을 회수한 걸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작 스킬 몇 개 더 추가한다고 해서 박병철이 날 이길 리 없다고 판단한 걸 수도 있고 말이다.

'생각보다 똑똑한 건가?'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있었다.

'준결승까진 가야 모습을 드러내겠군.'

노블은 위에 반드시 존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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