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여느 때보다 더 고요해진 귀빈실이었다.
* * *
'끝도 없이 몰려오네.'
노블은 민수는 지키고 난 탈락 시키는 전략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민수 주변엔 노블로 추정 되는 녀석들이 공격하는 척하면서 민수를 지키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민수를 둘러 쌓아 벽처럼 지키고 있었는데, 전황이 급하게 돌아가서 그런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 했다.
'진짜 암덩어리를 달고 다니는 게 이런 기분인가?'
죽이면 안 된다는 매우 가혹한 조건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 지 모르겠다.
시원하게 민수부터 기강을 잡아 놓으면 이럴 일이 없을 텐데.
그놈의 퀘스트가 뭔지.
"백태양! 저번의 일은 잊지 않았겠지!"
"아까부터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날 습격하는 헌터들은 계속해서 이상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잠자코 들어 보니 나와 원한 관계라는 걸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그냥 다구리를 놓는 건 티가 너무 나니까 나름 수작을 부리는 거겠지.
그냥 두드려 패는 것보다 뭔가 불화가 있는 사이로 관계를 형성 한 다음에 패는 게 더 그럴 듯해 보일 테니까.
심지어 양아치스러운 외모 때문에 대충 저런 식으로만 내뱉어도 납득할 수 있을 터.
안뚱땡이 만든 소설 속 집단치고 머리를 꽤 많이 쓴 편이었다.
쾅!
"죽어라! 너 따위가 넘볼 자리가 아니다!"
"감히 우리를!"
"얌전히 항복해!"
삼류들이나 내뱉을 듯한 작위적인 말들이 오간다.
내가 메인 스킬을 쓰지 못 하는 걸 알고 아주 그냥 살판이 난 듯했다.
뒤에서 날아오는 도끼.
옆에서 파고드는 창.
정면에서 다가오는 대검.
하나하나가 전부 다 위협적이었다.
죽이진 못 하더라도 치명상을 만들어 장애라도 만들 생각인 건가.
최소한의 회피로 동작을 최소화하고 그 움직임을 이용해 팔을 움직인다.
이런 초근접전에선 무기를 사용하는 자체가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다.
몸을 살짝 좌측으로 회전시키며 도끼와 창을 피해내고 손을 뻗어 대검의 면을 쳐 낸다.
그 후 반대 손으로 대검을 쥔 헌터의 목을 잡은 뒤 창을 든 놈 쪽으로 던져 버린다.
"골리앗 프레스!"
도끼를 던진 놈이 어느새 거리를 좁혀 거대해진 손바닥으로 날 짓누르려 한다.
[일점집중 발동! 왼손에 힘이 집중 됩니다!]
다가오는 손바닥을 맞잡은 뒤 손에 힘을 줘 놈의 손을 으스러트린다.
"크아아아악!"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무시하고 그대로 놈을 철퇴 다루듯이 휘둘러가며 계속해서 접근해 오는 헌터들을 쳐 냈다.
골리앗인지 뭔지는 몰라도 몸집이 커져서 그런지 훌륭한 철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슬슬 그만하려는 건가?'
탈골돼서 한쪽 팔이 덜렁거리는 골리앗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상황을 살펴봤다.
처음에는 죽일 듯이 달려오는 놈들도 이젠 예선전 참가를 위해 점점 흩어지고 있었다.
하긴 지들도 합격을 해야 민수를 더 도와주든 말든 할 테니까.
여기서 더 소모전하면 손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내가 지친 기색이라도 보여 줘야 더 달려들었을 텐데.
처음이랑 마찬가지로 너무 쌩쌩하니까 이상함을 눈치챈 거겠지.
물론 아직 간보기 단계이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아무리 신인 헌터들이 참가하는 대회라고는 해도 명백한 급이 있기 마련.
스킬도 제대로 쓰지 않았는데 몇 대 맞았다고 툭툭 맞아떨어지는 놈들이 전부일 리가 없었다.
'진부한 스토리 라인을 쓰는 놈이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단 무조건 지금 다가오는 놈들은 쩌리가 맞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면 사천왕 같은 놈들도 나올 테지.
'사슬낫의 제니라던가...'
그러다가 마지막에 보스가 나오고 결승전에서 나랑 붙게 되는 건가?
민수가 결승까지 올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럴 놈이었다면 진즉 하렘 만들어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었겠지.
'그렇게 되면 너무 지루한데...'
이렇게 선별이 끝나고 예선전하고 본선하고 준결승, 결승까지 계속 싸우기만 해야 한다고?
그 어떤 변화도 없이 그냥 엑스트라들 한 명씩 치고 나가면서 걔네가 한 마디씩 내뱉는 단서 수집하면서?
정말로 끔찍했다.
가장 싫어하는 전개의 중심에서 모든 일을 쳐 내야 되다니.
이럴 때만큼은 민수처럼 아무 생각 없는 순수한 뇌를 장착하고 싶었다.
지금도 민수는 자신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는 걸 기뻐하면서 이상한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크큭... 역시... 내 선비의 힘을 알아본 건지... 아무도 쉽게 다가오지 않는군... 붓검의 희생자가 아무도 없어서...다행이면서 뭐랄까... 아쉽다...랄까나."
저놈은 새로운 상대와 싸움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재미를 맛 볼 지도 몰랐지만 난 아니었다.
진짜 주인공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선별 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탈락한 인원들은 모두 안전하게 후송 됐으며 나머지 분들은 안심하고 이제부터 시작될 예선전에 온 힘을 다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선전에서도 다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니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셔도 됩니다! 그럼 지금부터 곧바로 예선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도 질질 끌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해야 할 일은 많아도 이렇게 중간에 대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을 빨리 처리할 수 있었다.
'춘향이를 풀어서 난동을 피우게 해볼까.'
S급 보스 몬스터를 신인 헌터들이 쉽게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광범위 스킬을 몇 번만 뿌려도 속수무책으로 나가 떨어질 헌터들도 몇몇 보였고 말이다.
사람 수를 효과적으로 줄인 다음에 예선전 인원도 최소화 시켜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아 참고로 지금부터 땅이 조금 움직이는데 다 계획된 일이니 당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선전은 이동이 다 끝난 후 마주 보는 헌터와 이뤄집니다!
예선전이 시작된다는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땅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퍼즐 조각처럼 나눠진 땅은 사람을 태우고 이곳저곳을 누볐다.
서유기에 나오는 근두운이라도 탄 기분이어서 재미는 있었다.
문제는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순간이 아주 지루하다는 거였다.
'글라디르가 이렇게 지루한 줄 알았으면 참가 안 했을 텐데.'
그냥 노블 파티가 열린 곳으로 쳐들어가 볼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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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디르 경기장 안의 귀빈실.
그곳엔 안뚱땡을 제외한 노블의 주요 간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 대 일 전투에서도 백태양을 이기지 못 했는데 일 대 일이라고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긴 하군. 우리라도 나서야 하는데... 그것도 되지 않으니 원..."
"메인 스킬을 못 쓰면 뭐 하나! 그냥 상대가 안 되는데!"
그들은 게이트 안에서 펼쳐진 선별 전투를 다시 재생해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백태양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어떤 힘이 실렸는 지 파악하고 그 위력을 예감했다.
"단순하게 피하는 동작 같아 보이지만 저 반응 속도는 말이 안 됩니다. 저게 어떻게 생도 수준입니까?"
"저희끼리 아무리 뭐 스틸 스킬을 통해 신인 한 명한테 밀어 준다고 해도 백태양을 이길 수 있을지가..."
"흠..."
아! 백태양 선수! 시원한 일격으로 상대방을 끝내버렸습니다. 이거 정말 아무도 못 막는데요?
그렇죠 아무래도 요즘 최고로 잘나가는 신인 헌터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생도라는 신분에 묶여 있지만 언제든지 졸업만 하면 금방 날아오를 것으로 예상 됩니다.
보세요! 저 표정! 저게 어딜 봐서 사람 하나 때려눕힌 얼굴입니까? 그냥 어디 슈퍼에 오징어 다리 사러 다녀온 사람 같아요!
노블의 축 처진 분위기와는 별개로 해설와 캐스터는 정말로 뜨겁게 백태양의 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몇백 개의 예선전 가운데 가장 핫한 것만 중계를 하므로 백태양의 경기를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무난히 가면 우승할 것 같군요."
"후... 그 분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수단을 꺼내야 할 것 같군요."
"본선을 가기 전에 벌써 말씀이십니까?"
"사람이 많을 때 써야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간부들은 그 이후로 뜨거운 논의를 시작했다.
너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등.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야기의 방향은 최후의 수단을 빨리 쓰자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민수만이라도 빼내야겠군요. 휘말리면 안 되니까요."
"김민수가 백태양을 이겨서 모든 걸 차지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됐으면 진즉에 했겠지요. 대련 영상 못 보셨습니까? 질적으로 너무 큰 차이가 납니다."
"참... 이거 저희도 나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서야 한다는 말.
그 말에 아무도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잇는 순간 현장에 나가서 책임을 져야 하는 덤터기를 써야 할지도 몰랐기에.
그들은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신중하게 말을 아꼈다.
"이렇게 말을 아끼시는 분들인 줄 몰랐습니다. 허허..."
누군가의 지적에도 간부들은 그저 헛기침만 할 뿐.
단 한 마디조차 입 밖으로 빵긋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짊어지길 바라며, 자신 대신 희생해 주길 바라며.
그저 침묵하고 또 침묵했다.
여느 때보다 더 고요해진 귀빈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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