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96.5화) 농축액 단 "한 컵"
* * *
왁자지껄한 술자리.
인싸들만이 질펀하게 놀고 간다는 이곳.
민수는 가면 속으로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여기도 가슴... 저기도 가슴... 옆에 있는 사람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술자리라는 걸 해보는구나.'
인성 교육을 받으면서 상시 발동형 메인 스킬 보유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많은 걸 경험하지 못했었다.
조금만 엇나가려고 하면 자제력을 잃으면 폭주할 수도 있다며 사람을 어찌나 시한폭탄 취급하는지.
패트 보이 사건을 수도 없이 들먹이면서 애걸복걸하는 걸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인성 교육도 완벽하게 수료 했고 빅토리 아카데미까지 들어온 지금.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모두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중간중간 백태양이라는 망할 자식의 방해를 받아서 일이 많이 틀어졌지만...
뭐... 괜찮았다.
'난 불굴의 용사니까.'
민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앞의 여자에게 술잔을 건넸다.
"원래 이런 건 사랑하는 만큼 따르는 거라면서요?"
"아...하하...네네 그렇죠..."
민정이라고 했던가.
민수와 민정 이름도 비슷한 걸 보면 이건 천생연분이나 다름없다는 증거였다.
이 넓은 장소에서 우연히 민정이라는 가명을 쓴 여인과 술자리를 가진다?
이건 무조건 연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하늘의 뜻 아니겠는가.
민수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민정이의 술잔에 술이 넘치도록 가득 술을 따랐다.
"꺅! 뭐 하시는 거예요, 술 다 넘쳤잖아요... 제 손도 젖구요."
"...아차차 이게 그 사랑하는 만큼이다 보니까아, 하하"
위트와 유머 그리고 약간의 센스와 가면으로도 감추지 못 하는 치명적인 윙크.
웬만한 여자들은 이런걸 좋아한다고 순애일지작가님의 답변에 적혀 있었다.
사실 그 답변대로라면 첫 만남부터 이미 푹 빠져 있어야 정상이었겠지만.
'만만치 않은 레이리다.'
내가 민수의 이름을 가지고 불굴의 용사가 된 만큼.
그녀도 가명으로 민정을 쓰고 있으니 그만한 급이 된다는 이야긴가?
후후.
호승심이 들끓었다.
'마침 안주랑 술도 다 떨어졌고 슬슬 기어를 올려야겠어.'
탁, 탁.
민수는 오늘 끝장을 볼 걸 다짐하면서 손가락을 튕기며 웨이터를 불렀다.
'멋진 모습을 계속 보여 줘서 제대로 작업을 치기도 전에 함락을 시켜야겠어.'
민수는 혼자만의 망상으로 꿈을 무한대로 키워나가는 동안 민정의 표정은 단 한 번도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자기 간지와 멋으로 킹카가 되는 것뿐이었다.
"웨이털, 여기 지금 가장 비싼 안주와 가장 비싼 술 하나 내오도록."
"그... 손님? 죄송하지만 현재 저희 노블에서 제공하는 음식과 음료는 전부 무료이기 때문에 정확한 명칭을 말씀해주셔야 됩니다."
"...아하."
이건 좀 곤란했다.
'뭐...비싼 술이면 그냥 양주? 양주 아냐?'
보통 영화 같은걸 보면 과일에 양주를 깔지 않나?
도움을 바라는 눈길로 민수는 태옥을 바라봤다.
"그래서 제가 그때 말했었죠, 저기 괜찮아요? 이랬는데 그 사람이 뭐라 했는 지 아세요?"
"뭔데요? 뭔데요 오빠. 빨리 말해 봐요 궁금해진짜루."
태옥은 이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반대편의 여인과 하하 호호 떠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으로 뭘 할지 고민하는데 혼자서 하하 호호 노는 꼴이라니.'
정말로 괘씸했다.
나중에 정체를 밝히고 내가 김민수인 걸 알았을 때 대체 얼마나 미안해하려고 이러는 지 원.
같이 술잔을 나눈 정을 봐서 인스페이스 맞팔로우를 하는 영광을 주려고 했었거늘.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종업원에게 다시 시선을 뒀다.
"그럼 그... 양주랑... 안주는 어... 과일이랑..."
민수가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답답함을 참지 못한 민정이 결국 입을 열었다.
"양주는 맥나렌 44년이랑 안주는 카나페로 주세요."
"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향연이 끝나고 종업원이 사라지자 민수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우후~ 민정씨가 방금 제 시험을 통과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네? 그건 또 무슨..."
"조크입니다. 조크, 어 리를 좈. 보통 술자리에서 상대방이 뭘 좋아하는지 모를 때 제가 자주 쓰는 수법 중 하나죠."
"아...아하하... 뭐... 일부러 그런 척 하셔서 제가 주문 하길 유도 했다는...?"
"네네, 바로 그런 거죠. 이게 참... 민정 씨가 눈치가 빠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하마터면 곤란해질 뻔했어요."
좋아, 자연스럽게 화제도 돌렸고 분위기도 제대로 환기 시켰어.
민수는 속으로 주먹을 꽉 쥐며 강한 자신감을 발산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대화의 유도란 말인가.
초보자들이라면 여기서 더 진도를 나가지 못 했겠지만 난 아니었다.
'연애 코칭을 괜히 받은 줄 아나.'
본격적인 제왕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온 거였다.
"민정씨는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네? 갑자기요?"
"아... 너무 일렀나요? 저는 이 자리를 뭐... 단순히 즐긴다보다는 조금 더 진중한 그런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어서요. 가볍지 않은... 뭐랄까 저희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 같은...?"
가면은 눈동자를 감추지 못한다.
민수는 진한 눈길로 민정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갔다.
테이블에 무방비하게 올려져 있어 추워 보이는 그녀의 손.
이 손을 부드럽게 잡아서 따듯하게 감싸줄 생각이다.
"그...꼭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근데 진짜 두 분이서 일행 분 맞나요?"
"네? 아... 그 뭐... 당연한 거 아닌가요? 딱 봐도 비슷한 그런 급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급이요...? 아니 뭐 사람끼리 급이 어디 있겠어요... 너무 날카롭게 반응하셔서 놀랐네요."
"아하하 다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이 노블적인 커뮤니티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까나요."
민수는 술과 음식이 더 빨리 오길 기도 했다.
술과 음식이 없어도 재미 있게 이야기를 막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테이블에서의 공백이 이렇게나 무서울 줄이야.
'양주를 좀 조절해서 먹을 걸.'
기본적으로 깔린 게 육회랑 닭강정 류인 게 문제라고 보면 문제였다.
연애 공부 때문에 밥을 굶고 파티에 참가하다 보니 배가 너무 고픈 참이었다.
근데 그 와중에 육회랑 닭강정?
'그건 못 참지.'
즉 술과 안주를 시키게 된 계기는 '민수가 너무 음식을 빨리 먹어서'였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다 보니 늦게 올 것 같은데... 할 수 없네.'
민수는 나중을 위해 아껴 놨던 이야기보따리를 열기로 했다.
"혹시 헌터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여기... 다 각성잔데요?"
"아... 맞군요... 하하..."
아 그랬지 참.
게이트를 클리어한 경험과 헌터의 세계를 알려주면서 폭넓은 세계를 경험한 티를 내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노블은 선천적 각성자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최소 생도부터 시작해 최대 1급 헌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민수는 그중에서도 '생도'급이었으니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죠... 일단 어... 음... 레이리는 이 파티에 왜 오셨습니까?"
"네? 아 잠시만요 연락할 곳이 있어가지고."
"아...아아 네 편하게 하시죠."
민정은 옆에 있는 친구에게 몇 번 눈짓을 하다가 그 뒤로 아예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 시켰다.
여자의 사정을 이해하고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신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었으므로 민수는 가만히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태옥이 여자와 술 게임하면서 조금 농밀한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태옥의 여자는 어느새 태옥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한 상태였다.
'아예 젖을 비비는구나... 천하네... 민정씨는 그런 기색도 없이 핸드폰에 열중하며 노는 중에도 업무? 같은 거에 신경을 쓰는데... 태옥이라고 했나... 여자 보는 눈이 아예 없구나.'
난 진국을 고른 거나 다름없지.
민수는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게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뿐이어서, 계속 미어캣 마냥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안주를 언제 가져오나 기다리던 찰나 고대하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말씀하신 술이랑 안주 가져 왔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네네, 당연하죠... 아니 근데 웨이럴?"
"네 무슨 일이시죠?"
고마움을 전하며 웨이터를 보내려는 찰나 민수는 살짝 짜증이 났다.
"이.. 카르페? 라는 거 너무 양이 적은 거 아닙니까?"
"카나페 말씀하시는 건가요? 조금 더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네네 그렇게 부탁드려요."
사람이 둘인데 이 과자 쪼가리 같은걸 이렇게 조금 가져와서야 쓰나.
해봤자 열 몇 개면 많이 먹어도 다섯 개밖에 먹지 못 하는 거 아닌가.
딱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 이렇게 적게 가져오다니, 아무리 무료라지만 상술이 너무 티가 났다.
이런걸 정확히 콕 집어서 말하는 남자.
어떠신가요 민정씨.
민수는 그런 눈빛을 담아 민정을 쳐다 봤다.
이 정도로 어필 했으면 슬슬 마음을 열 때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민수의 기대와 다르게 전혀 다른 말이 민정의 입에서 나왔다.
"...? 아...음... 워리어씨... 라고 하셨나요? 혹시 술자리 처음은 아니죠?"
"네? 허... 저 진짜 술 많이 마셔본 놈입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 하셨는 지는 몰라도 음... 그러면 제가 좀 티를 내기 위해서 게임이라도 간단히 할까요? 산 넘어 산 같은..."
"...산 넘어 산이요?"
"네네 산 넘어 산..."
산 넘어 산.
스킨쉽을 하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술 게임 중 하나.
그냥 단순하게 '산 넘어 산'이라는 구호와 함께 양팔로 세모를 만들며 율동을 추는 게임이다.
이때 사이사이에 스킨쉽을 진행하는데 스킨쉽을 받은 다음 사람은 점점 그 강도를 높여야 한다.
예를 들어서 처음 타자가 구호를 부르며 허벅지를 만졌다면 두 번째는 허벅지를 쓰다듬는 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야말로 남녀가 몸을 섞기 가장 최적화된 게임!
민수는 이 게임을 완벽하게 연습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매우 많이 찾아봤다.
처음엔 어떤 스킨쉽을 해야 하는지부터 시작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끝까지 나아가는 법까지 말이다.
"...제가 그걸 왜 워리어씨랑 해요? 싫은데요?"
"아...음... 그렇군요."
얼어붙은 분위기.
민수는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히 이런 식으로 하면 정신을 차릴 땐 눈앞의 여자가 이미 침대에 누워 있다고 했는데...'
준비한 계획들이 하나하나씩 틀어막히자 민수는 회심의 한 수를 입에 담았다.
"근데 그... 유진씨랑 민정씨는 섹스 판타지가 어떻게 돼요?"
태옥이란 놈에게 붙은 여자까지 단숨에 대화를 집어넣으며 이목을 끄는 기술!
'이걸로 판도를 뒤바꿔 주지.'
이로 인해 민수가 백태양에게 얻어맞고 기절한 건 조금 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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