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농축액 단 "한 방울"
* * *
'멜라니는 아직 보이지 않는군.'
방명록을 확인했을 땐 멜라니의 이름이 떡 하니 써져 있었다.
근데 보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 그녀의 성격상 이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직 나와 만나지 못 했으니까 재미가 없을 만도 하지.'
진정한 술자리의 익살꾸러기 김민수를 냅두고 어떻게 즐겁게 파티를 즐길 수 있겠는가.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찾아서 옆자리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달래주고 싶은 달콤한 마음뿐이었다.
물론 그녀만을 찾느냐 파티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건 그것대로 예의가 아니었기에.
김민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최대한 아리따운 여자를 찾아 나섰다.
'나중에 혹여나 혹시나 만약에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멜라니 질투용으로다가.'
가면을 써서 자신을 못 알아볼 게 분명 했으나 오히려 그럴 때 질투심을 느낀다면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영문도 모를 상대가 사실은 불굴의 용사 김민수인 걸 알아버린다면?
생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S급 게이트 2개를 클리어한 초 거물 생도 김민수의 또 다른 술자리 면모를 안다면?
이건 그 어떤 여자라도 홀라당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생각하느라 이런 발상이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게 순애일지작가님의 덕분이었다.
'근데 아까부터 시선이 묘하게 달라졌네.'
몇 분 전만 해도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들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근데 지금은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부끄러움에 적응한 건가?'
가면을 쓰고 있어도 드러나는 포스는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민수는 훗하고 웃으며 가면 위로 코 밑을 쓱쓱 문질렀다.
주변을 살펴보니 몇 명만 그런 게 아니라 아예 주변에 있는 모든 여자가 다 똑같은 상태였다.
뭐에 홀린 듯 고개만 올리고 쳐다보는 게 가면 속의 표정이 어떤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굴러 들어오는 여인들을 쳐 내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었기에 민수는 입을 열었다.
"자자 레이디들 저는 늘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을 거셔도..."
"저기 뒤쪽에 계신 분이랑 일행이세요?"
"네?"
말 허리를 자르며 들어온 한 여자의 말에 민수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화려한 금발에 구릿빛 피부.
각성자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근육질 몸매였다.
보디빌딩 선수처럼 보이는 단단하고 강인해 보이는 신체.
큰 키와 떡대 그리고 염색을 한 것으로 봐선 외국 계열의 헌터로 추정 됐다.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고?'
민수는 그제야 가면 속 여인들의 눈동자를 명확하게 인식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망신을 당할 뻔했다.
민수는 침착하게 뒤로 두어걸음 물러서며 뒤에 있는 남자와 몸을 밀착 했다.
최대한 친근하게 접근해 보이기 위한 수작이었다.
원래라면 팔짱까지 자연스레 끼고 싶었으나 어깨 높이가 너무 많이 차이나서 그럴 수 없었다.
"아 그..."
이제 일행이라고 말만 하면 되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빨리 답을 해야 이 여자가 떠나지 않을 텐데.'
그때 자연스럽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저음과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묵직한 울림통.
"네, 맞아요. 일행입니다."
백태양을 연상케 했으나 그것보다 조금 더 낮고 진중한 감이 있었다.
'한국인이었네.'
민수는 동질감을 느끼며 금발 사내가 조금은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자칫하면 자신이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을 다 받아주며 이렇게 멋진 대응을 해주기까지.
잠깐이나마 백태양을 떠올리면서 동일하게 봤던 자기 태도를 반성했다.
"와 그럼 저희도 마침 두 명인데 같이 한 잔 하실래요? 그 일행분이 불편하시면 그쪽만 오셔도 괜찮은데..."
말을 건 여자는 순식간에 금발 사내에게 달라붙어 적극적으로 대쉬를 시작했다.
가슴골이 푹 파인 티셔츠에 짧은 핫팩츠의 육감적인 몸매가 금발 사내의 몸에 껌처럼 부착된다.
민수는 그 가슴골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닙니다. 저도 갈 거니까 전 걱정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리."
"아...네..."
방금 간지 지렸다.
특히 일부러 '레이디'라고 말 안 하고 '레이리'라고 끝발음을 살짝 흘리는 스킬!
민수는 이 모든 걸 알려 준 순애일지작가에게 속으로 무한 감사를 보냈다.
여자 쪽도 감동을 먹었는지 자기 일행과 계속 시선을 교환하며 곁눈질로 자신을 체크했다.
아마 두 명 다 자신에게 빠져서 누가 나와 함께하고 싶은 지를 정하는 모양.
'깜찍이들... 그냥 아주 앙큼하네.'
민수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금발 사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아주 약하게 쿡 찌르며 윙크를 보냈다.
찡긋.
사교계 파티가 이렇게 재미있었다니.
'이제부터 열릴 때마다 와야지.'
민수는 그리 다짐하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면 저희 쪽 테이블로 오실래요?"
"저는 그게 좋은 것 같군요."
"아뇨 그... 그쪽 말고 여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면 썼는데 이름 밝히기는 좀..."
"아 맞다 아 제정신 좀 봐요. 깜빡했네요. 그러면 나이가...?"
"스물 일곱이요."
"헐 대박 완전 젊어 보이는데,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되죠 오빠?"
"이미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아앙~ 오빠라고 부를래요오~"
"편하게 불러요 그럼."
금발 사내에게만 여자들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부끄러워서겠지.'
애초에 처음부터 대쉬를 받았을 때도 나와 같이 앉고 싶어서 일행이 있냐고 물어봤을 터.
혼자서 나에게 말을 걸기엔 부끄러움이 많았을 테니 두 명이서 상대하고 싶다는 그 마음.
예전에 소심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가 됐다.
이럴수록 먼저 나서서 말을 터 줘야 하는 법.
민수는 금발 사내와 여인의 사이를 끼어들었다.
달콤한 중저음은 함께였다.
"저는 스물 입니다. 레이디들."
"아... 그러시구나. 네네."
대화 흐름도 나쁘지 않고 티키타카도 너무 완벽하게 잘되어 가고 있는 이 상황.
민수는 멜라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보내며 이 여인들과 잠깐 찐하게 즐기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워밍업 정도로만 끝내려고 했는데 참... 아주 내 말에 경청을 하는구나.'
지금이야 금발 사내에게 환장하며 젖을 들이밀고 있다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였다.
아마 몇 마디를 섞어본다면 곧바로 자신에게 앵기며 아양을 떨 것이기 때문!
"그러면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지 말고 테이블로 가는 거 어떨까요? 제가 잡아 놓은 곳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모시죠. 후훗."
"아...네...그...음...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앉아서 이야기해요, 우리."
"오빠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헤헤..."
"저두요... 아니 원래 제가 먼저 말을 걸려고 했는데 가위바위보 져가지구..."
"오빠 쟤 말 다 거짓말이니까 속지마세요."
"하하 그럼 일단 테이블로 갈까요? 안내해주실래요?"
"그럼요. 근데 다들 가명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다크니스 워리어로 정했는데. 편하게 워리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됐다, 됐어.
민수는 속으로 박수를 치면서 테이블로 안내하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다크니스 워리어라는 이름을 듣고 뿅 가지 않는 사람은 몇 없지.'
참고로 이 닉네임은 몇 날 며칠을 밤 새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가명이었다.
만에 하나 정체를 숨기고 활동할 경우를 미리미리 대비해 놨기에 다행이었다.
가면을 쓴 파티인 만큼 이름을 부르는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 가명은 필수일 터.
이럴 때일수록 멋진 가명이 빛을 보기 마련이다.
"아...그러시구나... 저는 유진이요."
"네네...저는 민정이라고 불러 주시면 돼요."
"저는 태옥이라고 불러 주세요."
"진짜 오빠는 가명도 너무 멋지다."
"저도, 저도 그 생각했어요 오빠."
뭐야 내 가명에 대한 칭찬은 없는 건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봉황의 수준이어서 그런 걸까.
민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테이블에 도착하자마자 음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다 같이 먹는 음식인 만큼 수량이 한정 되어 있기에 많이 먹는 사람이 무조건 이득이었다.
'태옥이라고 했나? 아마 니 놈이 지금은 겉모습 때문에 좀 날뛴다고 해도 이런 전략을 가지고 있는 나랑은 상대가 안 될 거다.'
이제부터 술자리의 제왕 김민수의 모습을 드러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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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가 안내한 테이블에서 술자리가 시작된 지 정확히 30분 후.
"근데 그... 유진씨랑 민정씨는 섹스 판타지가 어떻게 돼요?"
"네? 뭐라구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네네, 섹판이요 섹판. 페티쉬 같은 그런 거 있잖아요. 원래 술자리에서 이런 거 말하면서 놀고 그러는 거잖아요."
민수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공기를 얼어붙고 분위기를 박살 낸다.
"워리어씨 조금 취하신 것 같은데... 잠깐 바깥 공기 좀 쐬고 오는 거 어때요?"
"아히이, 참나 저기요 태옥씨.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씁! 제가 누군지는 말 못 해드리는 데... 저 누군지 아시면 진짜 깜짝 놀라요. 어쩌면 그냥 이 자리에 나랑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엄청 영광이 될 수도 있는 거라니까? 알려줄까요? 알려줄까요? 우헤헤 안 알려줄 거지롱."
민수는 제대로 신이 났는 지, 막 여기저기 삿대질하면서 자기 정체를 가지고 혼자 재미있게 추리하면서 놀고 있었다.
테이블에 총 네 명이 앉아 있는데 웃고 떠드는 목소리는 단 하나.
민수는 좀 다른 의미에서 술자리의 신이었다.
'이건 좀 힘드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면서 멜라니한테 데려가 바람 몇 번 잡아주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남의 술주정 수발이나 들어 주게 생겼다.
'그럴 수는 없지.'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곱게 참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이건 선을 넘었다.
"야."
"야아? 태옥씨 지금 저한테 야.라.고 하신 겁.니.까? 진짜 제가 누군지 알면 가장 놀랄 사람이 허 참..."
참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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