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김민수만 착각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 * *
"네네, 누나 그렇게 돼서 원더랜드는 다음주 쯤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난 너만 괜찮으면 다 좋아.
"죄송해요. 되도록이면 누나랑 빨리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일이 겹치네요."
아냐 기업에서 그렇게 나오는 건데 어떻게 할 수 없지.
"전 솔직히 누나 쪽이 더 소중해요. 근데 하... 보고 싶어요 누나."
헤헤...나두...그럼 우리 다음주 주말에 보는 거지?
"네네."
알겠어, 연락 먼저 줘서 고마워~ 쪽!
"네~ 들어가세요."
툭.
핸드폰을 내려놓고 현 상황을 한 번 점검했다.
우선 카이반 한국지부로 가서 무기를 테스트 하기로 이미 결정이 나있는 상황.
수진이쪽은 이사 관련은 잘 타이르면서 데이트 약속을 자연스럽게 뒤로 미뤘다.
남은 건 김민수와 멜라니 그리고 류혜미였다.
'멜라니는 연결 시키는 게 어렵고 류혜미는 뺏는 게 어렵다.'
이건 예전에도 몇 번씩이나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소꿉친구가 NTR쪽으로는 찢어죽여도 마땅한 존재가 맞긴 하지만 그게 류혜미에게도 적용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류혜미는 굳이 분류하자면 누나계 혹은 마망계 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입 안에 정액 몇 번 넣어주긴 했지만 그걸로는 턱도 없이 부족할 게 뻔했다.
최소한 처녀보지라도 뚫어놔야 대화가 통할까 말까 했다.
'그럼 일단 가장 빠른 순서대로 멜라니부터 노려야 하는데.'
이쪽은 멜라니가 김민수를 극도로 싫어하는 게 또 문제였다.
평소에 민수에 대해서 입을 열 때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수준이다.
그냥 좋고 싫고를 떠나서 생리적인 혐오감이 드는 수준의 불쾌감이 얼굴에 나타나곤 했었다.
'이게 문젠데.'
사실 멜라니가 김민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민수만 멜라니를 좋아하게 만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인간적으로만 잘해줘도 김민수는 알아서 멜라니한테 영원한 사랑을 속으로 맹세할 게 분명하니까.
'아마 손주 이름까지 생각하고 있겠지.'
민수의 망상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수진이와 통화하기 전 멜라니와 연락을 했을 때 들었던 것만으로도 유추가 가능했다.
웃긴 유머랍시고 뜬금없이 보내는 동영상부터 시작해서 돼먹지도 않는 썰 풀기까지.
여기에 추가적으로 새벽에 뭐하냐고 톡 때리는 건 기본이었다.
'예전에 전화한 적도 있었는데 뜬금없이 사랑 노래를 불렀다 그랬나?'
하나하나 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놈이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식으로 눈치를 주면 더 이상 안 하기 마련인데, 이 놈은 진짜 '진짜'였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왜 굳이 멜라니한테 한 단 말인가?
'널 찍었어' 이런 대사를 멋지게 내뱉는 남자 주인공 로맨스물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민수는 그 말을 내뱉을 만큼의 개연성을 가진 얼굴 보유자가 아니었다.
아무튼 이런 민수의 악행 반복으로 인해서 멜라니는 정말 극도로 민수를 싫어하게 됐다.
아마 나와의 사이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민수의 효용 가치가 낮아지니 나중엔 연을 끊을테지.
'딜레마네.'
내가 멜라니와 가까워질수록 멜라니는 김민수와 멀어진다.
김민수도 사람인 이상 계속 멀어지는데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냥 멀어지는 게 아니라 싫어하고 혐오하기까지 하는데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
'민수라면 될 지도?'
놈은 보통이 아닌 '진짜'였다.
멜라니가 싫어하는 티를 내도 답장만 꾸준히 해준다면 알아서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빅토리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게이트 클리어 보상으로 긴 휴가를 받은 상황.
지금보다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
생각은 정리 됐으니 바로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멜라니)
>아직 김민수랑 모델 계약 안 깼다고 그랬나?
>아니 그냥 궁금하잖아. 내가 카이반 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니까.
>언제 괜찮은데?
>ㅇㅇ.
>(건성으로 ㅇㅇ~ 하는 팻말 들고 있는 양아치 이모티콘)
'쉽군.'
츤데레 처녀 하나 요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있을까.
허벅지에다가 OX 게임 하면서 딱 거기까지만 선을 지키는 걸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 뒤로 보금자리몰에서 통화할 때 일부러 다른 여자 목소리 들려주기.
옷 예쁘게 입고 오라고 한 다음에 제대로 칭찬 안 하기.
고의적으로 연락 늦게 해서 기다리게 만들기까지.
부잣집 아가씨를 먹을 차례가 드디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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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약속 시간까지 두 시간 전.
혹시라도 벗을 일이 생길 수 있을 지도 모르니 간단하게 운동부터 시작했다.
맨몸운동을 쉬는 시간 없이 한 시간 동안 반복하며 최대한 펌핑 시켰다.
중량 팔굽혀펴기, 버핏,중량 턱걸이,15kg 사이드 레터럴 레이즈로 몸을 계속 다진 뒤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 거울로 포징과 외모 점검을 간단하게 한 뒤 말끔히 몸을 씻었다.
짙은 눈썹과 진한 T존 그리고 양아치스러운 눈매.
"완벽하군."
멜라니는 지금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약속 시간까지 당기면서 점심 약속을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특히 내가 다른 여자랑 섹스까지 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다는 게 중요해.'
짝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짙은 호감이란 걸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란한 걸 뻔히 알면서도 점심 약속까지 잡으면서 얼굴을 보려고 한다?
호감이 없다면 그냥 대충 알려주고 끝낼 수 있는 문제를 일부러 키운 거였다.
그렇기에 될 수 있으면 오늘 안에 최대한 많이 꼬셔두는 게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 주소도 미리 받아 놨겠다.
[로시난테 발동! 안전 운전 하세요!]
'금방 가겠네.'
최근 이 명마를 제대로 몰 일이 없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학창 시절에도 이런 오토바이가 있었다면 매일매일 경주에서 이겼을 텐데.
'쩝... 이 소설 엔딩이나 빨리 보고 지구로 가야지.'
첫째도 귀환이고 둘째도 귀환이었다.
'이태옥'으로서의 삶을 절대로 포기할 일이 없기에 마음가짐을 다잡으며 헬멧을 썼다.
부릉 부릉.
오랜만의 산책이라서 로시난테도 신났는 지 마음껏 배기음을 내뿜고 있을 때.
빵! 빵!
'뭐야?'
느닷없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귀를 때렸다.
"또! 또 그 말도 안 되는 소환수를 타고 이동하려는 건가요? 제가 몇 번이나 주의 드렸죠? 그런 행동은 안 좋다구요. 이제 좀 자각하면 안 돼요?"
"아니 내가 가면 되는데 무슨 마중까지 오고 그래?"
"다...당신이 엄한 길로 빠지면 약속 시간이 늦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어서 타기나 해요!"
소리의 정체는 멜라니의 리무진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창문을 내리고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는 게 꽤 귀여웠다.
금발 롤빵머리가 돌돌 말려 있는 건 정말로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근데 그 머리 맨날 그렇게 스타일링 하는 거야? 얼마나 걸려?"
"두 시간 정도요...근데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 타요."
"알겠어, 근데 어디서 먹길래 이렇게 데리러 와?"
한 번 타봐서 그런지 두 번째엔 리무진에 대한 큰 감동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리무진에 처음 탈 때부터 여자 허벅지에 OX게임을 한 영향이 크긴 하구나 싶었다.
능숙하게 리무진에 탑승해 자연스레 멜라니 옆에 가까이 붙었다.
완전 밀착이 아닌 아슬아슬하게 옆에 앉을 때 다리 벌리면 무릎이 닿을 정도의 거리.
아직 어떤 핵심적인 케미조차 생기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완급 조절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대 되죠? 빅토리 아카데미 식당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훨씬 위가 있다는 걸 오늘 알려드릴게요."
"대체 뭘 먹이려고... 그나저나 오늘 엄청 예쁘게 하고 왔네?"
말대로 멜라니는 게이트 들어가기 전에 '예쁘게 입고 기다려'라고 말했을 때보다 더 힘을 준 상태였다.
찬란한 금발의 롤빵 머리는 윤기를 내며 가슴깨에 얌전히 안착해 있었고, 짧은 청 하이웨스트 치마에 하얀색 시스루와 검은 브레지어의 조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부잣집 아가씨라는 타이틀에 그대로 맞는 성격 때문인지 앙칼짐이 더 해져서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칭찬도 별로 없더니 오늘은 무슨 일이래요? 김민수씨 모델 계약이 궁금하긴 한가봐요? 입에 막 침도 안 바르고..."
"아니 그냥 진짜 순수하게 말한건데, 너무하네."
"오늘 태양씨 때문에 이렇게 입은 거 아니거든요? 사교계 파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구요."
"사교계 파티?"
"네, 노블에서 여는 거라서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참여해야 하는 거거든요."
"노블?"
노블이 뭐지?
내 물음에 멜라니가 친절히 설명을 더했다.
그리고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요컨데 김민수도 온다 이거지?'
최고의 기회가 알아서 찾아온 격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