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멜라니가 기분이 안 좋은 이유.
* * *
"..."
멜라니는 어제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백태양에게 문자를 보낸 이후부터였다.
"왜 나한테 답장을 안 하지?"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겠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집과 관련된 아주 중대한 사안인 만큼 백태양도 무조건 답변을 해 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 쪽 근처로 이사 오는 게 아닌 건가?'
설마.
멜라니는 그럴 리 없다며 코웃음을 치며 핸드폰을 노려봤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도움 요청으로 멋지게 게이트를 클리어한 백태양.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예쁘게 입고 기다리라고 한 것도 백태양.
카이반 퍼스트 시리즈을 지원 해주니까 멋지게 활약한 것도 백태양.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예쁘게 입고 있으라고 했고 무기까지 다 썼으면서... 내 연락을 안 받는다고?'
너무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했다.
보통 이 정도까지 했으면 자신에게 연락 한 통 정도는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
멜라니가 여태까지 쌓아 올린 사회생활 빅데이터 기반으로 봤을 땐 너무 당연하였다.
근데 백태양, 이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신이 먼저 연락을 넣었음에도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바쁘거나 무슨 사정이 있다거나 할 수도 있었으나, 게이트 끝나고 난 직후가 뭐 그리 바쁠 게 있단 말인가.
"아가씨 어쩌면 백태양 헌터가 달콤한 낮잠을 청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무슨 낮잠을... 저번에도 그랬던 거 보면 따...딴 여자랑 마...막...!"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멜라니는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보금자리몰 앞에서 무슨 짓을 계획하고 있냐는 마음으로 전화했을 때 들려오던 여자의 신음 소리.
'그런 건 밤에나 하는 줄 알았었는데...'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리는 게 백태양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마음먹고 준비한 미인계도 완벽하게 간파하고 돌파해낸 남자이기도 했다.
근데 그런 남자가 낮잠? 그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차라리 딴 여자랑 막...하고 있겠지...'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찝찝하지?
멜라니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부근에 자리 잡음을 느꼈다.
띠링!
한참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원래라면 무음으로 해 두는데 이번에만 특별히 백태양 때문에 켜둔 알림음이었다.
"역시 나한테 바로 보낼 줄 알고 있었어요."
멜라니는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시지창을 확인한 멜라니의 활짝 펴진 표정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김민수)
"아."
멜라니는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선천적 각성자 중에서 가장 높은 잠재력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여겨본 김민수.
그러므로 카이반 한국 모델로 세우려고 했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단 한 번 살갑게 대해줬다는 이유로 김민수는 거리감을 엄청나게 좁혀왔다.
서로 좁혔다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김민수 혼자만 그런다는 게 문제였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는 건 기본.
혼자만 낄낄 거릴 법한 영상 링크를 보낸다거나 자기 착장을 찍어 보내는 짓까지 서슴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손절할 수 없는 이유는 김민수가 '아직'까진 쓸 만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민수니까.
이 빌어먹을 여론 하나 때문에 멜라니는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며 민수와 연락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타이밍이 안 좋았다.
(김민수)
>제가 나중에 연락 드릴 테니까 그전까진 절대로 먼저 연락하지 마세요.
"하아..."
"김민수 생도였습니까?"
"이 집사님은 어떻게 아셨어요?!"
"늘 김민수 생도와 연락하실 때 나오는 표정과 한숨이어서 제가 주제넘을 지도 모르겠으나 한번 말을 꺼내봤습니다."
"맞아요. 왜 이럴 때 연락 와야 할 사람은 안 오고 이상한 놈한테만 연락이 오는 거죠? 남자들은 원래 다 이런가요?"
"큼..."
이 집사는 여기서 바르게 말을 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김민수를 대변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가씨가 왜 이렇게 화가 나있는지부터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싶었다.
'드디어 우리 아가씨에게도 봄이 오는 건가...'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경영에 뛰어들어서 험난한 일을 모두 견뎌 냈던 아가씨였다.
인성 교육을 받을 때도 틈틈이 기업에 힘을 보탰으며 그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회복까지 해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또래가 누려야 할 다양한 감정을 아직 맛 보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우정과 사랑 그... 특유의 또래들과 함께하는 어떠한 정...'
과도한 성취 욕구가 불러낸 반작용이나 다름없었다.
'백태양 헌터께서 아가씨를 진정으로 일깨워주실수도...'
물론 아가씨의 말만 들었을 땐 아주 문란해 보였지만 그런 부분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잠깐 연애라는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일깨워준다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문란한 것도 추측일 뿐이지 대외적인 이미지는 인성조차 완벽하다고 평가받을 정도이니 더할 나위 없었다.
'여기선 백태양 헌터를 조금 밀어 줘야겠군.'
이 집사는 모든 생각을 정리한끝에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백태양 헌터에게 전화라도 해 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정말 바쁜 사정이 있어서 문자를 미처 못 봤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김민수는 왜 맨날 바쁘다고 하면서 저한테 허구한 날 연락하고 뻘소리만 하는 걸까요?"
"그건... 이제 김민수 생도는... 약간의 그 허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허세요?"
"네 그니까 뭐... '나는 항상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남자'라는 걸 어필하고 싶은걸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와중에도 너에게 연락하는 사람 뭐 그런 어필... 같은 거 아닐까 조심스럽게 사료 됩니다."
"...그걸 왜 저한테 하는데요?"
이 집사는 멜라니의 마지막 대답을 듣고선 아차 싶었다.
'아가씨가 이렇게 모르시는구나!'
미인계를 한다 뭐다 하면서도 정작엔 연애에 있어서는 초보나 다름없었다.
풋내기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수준!
이런 건 바로 알려주는 것보단 스스로 자각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됐기에 이 집사는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음...뭐...아무래도 같은 상시 발동형 능력자들끼리의 기 싸움...아닐까요?"
"참나... 허구한 날 이상한 유머 동영상이나 공유 하면서 무슨 기 싸움을 한다고... 웃기지도 않네요."
"아가씨 지금 중요한 건 김민수 생도가 아니라 그..."
"알겠어요! 전화해볼게요. 아 그... 저 방금 소리 지른 거 아니예요 그...그냥."
"네네 괜찮습니다. 아가씨."
멜라니는 지금 자신이 왜 소리를 질렀는 지, 전화를 하려는 데 긴장은 왜 되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떨리지?'
예전에 전화 할 때는 안 이랬는데 대체 뭐가 변한 거지?
멜라니는 심호흡하면서 핸드폰을 들었다.
'진짜 짜증 나.'
여러모로 백태양은 멜라니를 아주 열받게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아니 예쁘게 입고 오라고 해서 입고 왔으면 뭔가 더 추가적인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난 직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인간적인 칭찬 밖에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당시 자신도 카이반 그룹의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힘쓰느냐 까먹었다고는 하지만.
엄청 예쁘게 입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먼저 전화까지 걸려니까 자존심이 상해 죽겠어.'
그래도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멜라니는 결국 백태양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뚝.
여보세요? 어 멜라니, 왜?
"아니 그... 톡도 안 보고 그러길래 제가 그 혹시 뭐..."
아 보고 싶어서 연락 했구나?
"무슨...! 그냥...! 아니 이사 관련으로 빨리 연락해야 되니까 그런 거죠!"
아 그랬구나?
이 남자랑 대화하고 있으면 점점 짜증이 난다.
능글맞게 말하면서 상대방을 슬슬 긁는 거.
딱 질색이야.
"그랬구나는 무슨! 메시지 보셨으면 답해주세요! 당연히 카이반쪽으로 오는 거 맞죠?"
아니 그거에 대해서 말이 많았었는데 나 그냥 그... 보금자리몰 쪽에서 알아봐준 게 있어서 그쪽으로 갈려고,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멜라니.
"허! 신경은 무슨 그냥... 진짜 어쩔 수 없이 준비 했던 거죠! 태양 씨가 이상한 곳 가면 저희 카이반 그룹 이미지가 아주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카이반 하니까 저번에 썼던 무기 내 전용 같던데, 테스트 따로 더 해야 하는 거지?
"안 그래도 그런 것 때문에 전화한 이유도 있어요. 정말로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라구요!"
알겠어 그니까 내가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일단 저희 쪽으로 오셔서..."
이 집사는 아가씨가 통화를 하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기립박수를 쳤다.
'아가씨에게도 봄이 오는구나.'
늦은 저녁의 달달한 티키타카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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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도 참... 나랑 뭐 먹을 지 생각하느냐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내가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멜라니가 연락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착각하는 불굴의 용사 김민수.
그는 공복을 4시간째 유지하며 멜라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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