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설마?
* * *
민수는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 지 고민했다.
기세등등하게 춘향이를 데리고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니.
지금의 결과는 민수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싸움은 이긴다고 쳐도...'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었다.
얼굴은 묘하게 백태양을 닮았지만 그놈이 여기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무리 게이트 내라고는 하지만 일반인에게 힘을 쓰는 게 망설여졌다.
'자칫 힘 조절에 실패했다간 완전히 도륙을 낼 수도 있다.'
춘향이는 겁을 많이 먹은 것 같지만 걱정할 게 전혀 없었다.
문무겸비가 현재는 이야기 초반을 진행 중이라 비활성 중이라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그런 특성이 존재하지 않아도 자신이 용사라는 사실은 변함없으니.
"진정한 힘을 만나지 못해서 타락해 버렸구나. 아주 작은 권력에 취해서 나의 기세조차 알아보지 못 하는 저급한 자식,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설쳐 대는 꼴을 더 이상 내가 묵인할 수가 없구나!"
김민수는 말하면서도 힐끗힐끗 춘향이를 쳐다 봤다.
특히 앞섶의 도드라진 라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춘향이가 몸을 가릴 정도였다.
속옷이 제대로 발달 되지 않은 시대라 그런지 윗가슴이 도톰하게 올라와 있는 앞섶.
버터를 핥아 먹는 짐승 마냥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다시 포주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지금이라도 잘못 했다고 싹싹 빌면 여태 저질렀던 과오를 모두 용서하고 다시는 너를 처벌하지 않을 테니 지금 당장!!! 춘향이에게 사과하고 나에게 사과하며 절을 올리도록 하여라!"
방금 대사를 곱씹으면서 민수는 짧은 희열마저도 느꼈다.
'이러니 뻑이 가지, 나한테 안 반할 수가 있나.'
다 헤어진 마당에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유민이도 사실 다 자기 적극적인 리드에 홀라당 넘어왔었다.
물론 마무리가 아주 씁쓸했지만, 그것조차 자기 리드를 받지 못해서 벌어진 일.
'멜라니도 뭐...'
아마 지금쯤 게이트에서 자신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아예 클리어 축하를 위해서 기자들을 쫙 깔아놨을 지도.
상상만 해도 짜릿함이 몰려온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구애를 하는 모습의 멜라니라니!
그 도도하고 까칠한 카이반 그룹의 딸이 자신에게 애걸복걸 할 줄이야.
역시 잘생기고 볼일이었다.
아직 남들한테 들은 적은 없지만.
'진짜 잘생긴 사람한테는 원래 그렇게 말 못 하니까.'
민수는 호탕하게 웃으며 포주를 쳐다 봤다.
아무것도 못 하고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걸 보니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하긴 원래라면 겁에 질린 게 이몽룡 쪽이었을 테지.
원작과는 묘하게 다른 거로 봐서 아마 포주가 중간 보스 정도는 될 터.
하지만 용사가 몸에 깃든 이상 이몽룡에게 패배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의와 협 그리고 사리를 깨달은 내가 말하는 것이니 귀담아듣고, 알아 들었으면 썩 물럿거랏!"
평소에 자주 뿜어내던 목소리가 긴장 때문인지 혀를 씹고 나온다.
포주는 계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만 한 상황.
내키지 않으나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밀어 주기만 해도 그 안에 담긴 묘리와 힘을 깨닫고 알아서 빌빌 거릴 게 분명했다.
'여차하면 돈키호테의 허언을 발동 시킬 수도 있다.'
S급 게이트이기 때문에 아무리 일반인이라고 해도 몬스터였다.
뒤늦게 생각난 그 사실에 거짓말을 칠 준비까지 하며 포주 앞으로 걸어갔다.
신장 차이가 나서 민수가 묘하게 위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에 몸이 절로 위축되는 걸 억제하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곳에서 패배하려고 온 게이트가 아니었다.
굳은 결의를 다지며 포주를 밀치려는 그때.
"도련님, 저 계집년을 감싸시다가 정말 큰 화를 당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냥 얌전히 계시지요."
"이 노옴!!!"
고작 게이트에서 탄생한 몬스터 따위가 자신을 무시하다니!
분노가 순식간에 온몸을 지배한 민수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피할 리 없다는 믿음에서 근거한 최단 거리 스트레이트!
가드조차 올리지 않은 건 중간 보스에게 당할 리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김민수의 뇌리에 불현듯 예전에 백태양과 했던 대련이 떠올랐다.
'어라?'
그때도 이렇게 첫 타격에 전력을 다 했는데.
김석구 교관님이 무슨 피드백을 해주셨더라?
허리춤에 얌전히 자는 검에 시선이 잠깐 흐르는 사이 통쾌한 타격음이 들렸다.
퍽!
"꿱!"
문제는 그 소리가 포주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라 민수한테서 나왔다는 거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포주를 바라봤지만 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거 도련님이 먼저 치신 겁니다."
의와 협, 사리를 깨달으신 분이니 뒷일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뒤이어진 포주의 말에 민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주를 쳐다 봤다.
'말이..!'
목젖 부분을 타격 당했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뒤틀린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며 몸의 균형이 망가진다.
일반적인 타격이라면 이 정도까지 흔들리지 않을 텐데.
'내 이미지가...!'
짧은 시간이지만 이미 수차례 꿀 발린 말들을 했던 차였다.
근데 이제 와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준다면?
포주의 주먹이 연이어 날아오는 와중에 춘향이를 바라봤다.
일그러진 춘향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민수는 몸에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끄히익...어..."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빅토리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최고의 유망주가 바로 김민수였다.
비록 첫 타격에 당황 했으나 바로 몸의 균형을 바로잡고 날아오는 주먹을 잡아챘다.
"허억...허억... 좀 치나 보구나... 허나 어림도 없다!"
중간 보스부터 이렇게 강하다니 S급 게이트는 만만치 않구나.
민수는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더 이상 패배 할 수는 없었다.
용사 김민수로 반드시 멋지게 복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득 안고 몸을 움직였다.
'춘향이가 멋지게 생각하겠지?'
말을 실행으로 옮기는 남자.
끝까지 책임 지는 남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애일지작가님의 말씀대로만 카사노바가 된다더니.
정말로 그 말이 이뤄지는 기분이었다.
'최악이다.'
한편 춘향이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악이라고 느낀 건 김민수가 입을 연 그 순간부터였다.
'여태 저질렀던 과오를 왜 용서한단 말인가.'
포주가 저지른 죄악은 정말로 끝도 없었다.
아녀자 희롱부터 시작해서 수 없는 폭력과 갈취 행위를 일삼는 게 바로 놈이었다.
교묘하게 선을 지키면서 이곳저곳 돈줄을 대는 놈이라 잡히지도 않았는데.
그런 놈을 용서한다고?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이몽룡이 맞는 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머리를 올려주며 구원해주겠다던 그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이상한 말까지 들먹이면서 책임지지도 못할 결과를 만드는 꼴을 보아라.
사또의 아들이지만 이몽룡이 이 고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미흡했다.
나중이야 대성할 인재라지만 지금은 존대만 겨우 들을 수준의 인물.
하지만 포주는 달랐다.
'기왓집보다 큰 기생집이 왜 이 고을에 있는지 도련님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구나.'
애초에 포주가 저렇게 당당하게 양반의 아들에게 거들먹 거릴 수 있는 이유?
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거다.
퍽! 퍽!
도련님과 포주가 공방이 오가고 있다고 하나 애초에 평민과 양반이 주먹다짐하는 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본래 선비란 논리로 백성을 설득하고 깨닫게 해야 하는 법.
근데 서로 똑같이 짐승이 되어 치고받고 있다니.
'포주에게 끌려가는 건 확정이구나.'
춘향이는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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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슬슬 끝내겠습니다."
"그게 무슨...!"
김민수는 아주 커다란 착각하고 있었다.
게이트 안에서 싸우는 전투는 곧바로 생명과 연결된다는 걸 모르는 걸까.
분명 인성교육까지 받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멍청한 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역할에 충실하다고는 하지만 가지고 있는 서브 스킬조차 활용하지 않다니.
보나 마나 혼자만의 생각을 통해서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도출해낸 게 분명했다.
김민수가 오른손을 쭉 뻗어서 얼굴을 타격하려 할 때 같은 손으로 응수한다.
포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용물은 백태양의 그것이었다.
신체 강화형 스킬 잔뜩 중첩된 백태양의 몸은 폭주기관차보다 강렬했다.
쾅!
주먹과 주먹이 맞닿았을 뿐인데 터지는 소리가 주변을 울린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민수가 힘을 끌어올리기 전에 반대손을 뻗는다.
오른발을 앞으로 뻗고 왼발 축과 허리를 함께 돌리며 그대로 왼손을 뻗는다.
공기를 가르는 듯한 시원한 직선이 그대로 김민수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웩!"
스토리를 봐도 이몽룡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건 장원 급제를 한 후다.
즉 지금은 포주의 힘과 백태양 본연의 힘이 합쳐진 자신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김민수는 이걸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겠지.
"이리 와 이 년아."
"꺅!"
머리통을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고 있는 김민수에겐 시선조차 두지 않는다.
춘향이의 머리칼을 거칠게 휘어잡고 기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뭐지?'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보통 이렇게 머리칼을 붙잡고 움직이면 당연히 비명 소리가 더 이어지는 게 정상이다.
근데 춘향이는 첫 비명 이후에 이렇다 할 만한 고통을 티 내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려 머리채를 잡히는 데 가능한 일인가?
의아한 얼굴로 춘향이의 얼굴을 보자 잔뜩 붉어진 홍조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만약 그게 진짜라면…
'일이 더 쉬워지겠어.'
김민수가 동정을 떼는 일은 내가 있는 한 평생 없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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