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여자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 * *
"머리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어...그 다듬...어 주세요."
"어떻게 다듬어드릴까요? 고객님은 머리가 전체적으로 좀 뜨는 머리여서 숱을 쳐도 안 될 것 같은데 혹시 생각해 두신 머리 따로 없으신가요?"
유민이의 머리 이쁘게 하고 오라는 말에 커다란 샾에 오는 것까지는 좋았다.
근데 그 이후부터 놀람과 경악 그리고 당황의 연속이었다.
'자주 가는 집에서 그냥 자를 걸 그랬나...'
그곳은 아무 말도 필요 없이 '늘 하던 대로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면 알아서 '김민수컷'을 해준다.
그 머리 모양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면 알아서 잘라주는 머리, 서로 말없이 묵묵하게 머리만 잘라주는 공간.
지금 단골 미용실이 너무나 그리웠다.
"따로 없...는데요."
"저희 샾 오늘 처음 오신 건가요?"
"네네..."
"헉 혹시 데이트 때문에?!"
샾에서 내뿜는 직원들의 친화력에 민수는 점점 마음이 괴로워졌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아줬으면 좋겠고, 왜 그런 사적인 걸 물어보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애인 없었으면 어쩌려고...'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여자 친구 있는 사람처럼 보인단건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콧대가 높아진다.
"맞아요."
"어머 그러면 모처럼 샾까지 오셨는데 다듬기만 하는 건 너무 아깝다. 펌도 한번 해보시는 거 어때요? 머리 길이도 적당하고 괜찮을 것 같은데."
"펌이요?"
"네,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질걸요? 고객님한테 어울리는 펌이 꽤 많아요. 마스크가 좋으셔서 그런지 다 전체적으로 너무 멋질 것 같은데, 사진 몇 개 보여드릴까요?"
"네네..."
에세인스샾 수석디자이너 빈첸스에겐 풋내기 손님 하나 구워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빈첸스는 민수가 샾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용사 김민수... 평소 우리 샾에 온 게 아닌데 갑자기 왔다... 꾸미기 위해서? 남자가 꾸미는 이유는 단 하나 여자뿐...! 오늘 작정하고 머리를 하러 온 거다.'
손님의 니즈를 사전에 파악하고 그에 맞춰서 철저하게 움직인다.
빈첸스가 여태까지 말한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거짓이 없었다.
어수룩한 손님이라고 사기를 친다? 그건 정말 쓰레기 같은 짓이었다.
'방향성을 제시해드리는 거지.'
자기 머리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늘 자르던 대로만 자르다니.
그러고 데이트에 나가는걸 애인이 좋아할까? 확신할 순 없지만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모델 헤어스타일 보시면 지금 두상도 고객님이랑 굉장히 유사하거든요? 어머 근데 외모는 고객님이 훨씬 낫다. 호호."
"그래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대신 너무 부담스럽지 않고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야 한다.
샾의 수석디자이너는 단순히 머리만 잘 자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친화력과 커뮤니케이션으로 담당 손님을 얼마나 많이 끌어 모으느냐도 중요한 척도였다.
"그럼요, 전 이런걸로 빈말 막 하거나 하는 사람 아니예요. 아무튼 그래서 보시면 두상이 비슷하다는 건 어느 정도 스타일이 비슷하게 나온다는 말인데, 여기 이 모델이 펌을 할 때랑 안 할 때랑 스타일이 굉장히 다르게 느껴지시지 않나요?"
또박또박,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와 목소리의 높낮이.
완벽하게 귀에 때려 박는 딕션.
민수는 지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펌의 차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근데 또 굉장히 다르다니까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네 어느 정도는...?"
"그 어느 정도가 스타일을 가를 수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고객님한테 추천 드리고 싶은 건 애즈펌이랑 다운펌 같이 들어가면서 머리 눌러 주고 가르마 부분은 살짝 살리는 느낌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보니까 새치도 좀 있으신 것 같은데 진한 블랙으로 강한 인상도 챙길 겸 염색 어떠신가요?"
"아... 그게..."
"지금 하시면 저희가 지금 모발영양 관리도 같이 해드리고 있거든요. 이러면 컬러도 오래가고 펌도 길게 살아서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아져요, 괜찮으실까요?"
"네...네네...."
민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이게 무슨 친화력이지?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자신과 비슷하게 말을 하는 것 같은데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다리실 동안 마실 음료 준비해드릴려고 하는데 드시고 싶은 음료 있으세요?"
"그럼 딸기 에이드로..."
"네~ 딸기 에이드로 가져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얼렁뚱땅 큰 결정하게 된 것 같지만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했다.
'어차피 머리 하려고 온 거였으니까.'
다듬는 것보다 본격적으로 꾸미는 게 더 좋은 건 맞으니까.
민수는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진짜 유민이 완전 나한테 반하는 거 아니야?'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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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 있기만 하면 된다구요?"
"응, 맞아. 민수 눈에 띄면 안 되고 어디 숨어 있어."
"그다음은요?"
"아마 시간 좀 지나면 민수가 전화 한 통 받을 거야, 그 전화 끝나면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괜찮아요? 이거 한 번만 물어봐주면 돼."
"그렇게만 하면 저희 신무기 개발 테스트 한번 해주신다는 거 맞죠?"
"그렇다니까."
"알겠어요."
멜라니는 어제 갑작스럽게 걸려 온 통화 내역 녹음을 다시 재생했다.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납득할 만한 거래였다.
'김민수한테 모델 제의도 하지말걸...'
차라리 이 거래가 모델 제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백태양은 떠오르는 샛별이라고 하기엔 너무 속도가 과했다
잠깐 반짝이고 말 거라는 악평을 읽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보금자리 회장 최영남에 이어 원더랜드 대표 벤모로까지...'
대기업의 큰 손들이 꼬이기 시작하면 몸값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다.
백태양과 리무진에서 만났던 그 짧은 순간이 그의 몸값이 최저가일 때였다.
앞으로 카이반 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가 이런 시야조차 가지지 못하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김민수야말로 떠오르는 샛별수준이었다.
백태양의 그늘에 가려져 제대로 된 빛조차도 내지 못 하는 작은 별.
'백태양과 같은 반이어서 졸업하기 전까지는 유망주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아.'
백태양은 이미 대외적으로는 헌터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인지도를 쌓고 있었다.
빅토리 1학년 생도가 '헌터'라고 불린다니,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원래라면 헌터들 사이에서 반발이라도 있어야 정상이지만 그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헌터들 사이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이민준 헌터가 그의 호칭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헌터라는 칭호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언제부터 헌터의 조건이 아카데미 졸업이었는가."
"헌터를 결정하는 건 교육 과정이 아니다."
"백태양 헌터를 기점으로 헌터계의 썩은 웅덩이가 조금이라도 사라졌으면 하는바람이다."
언제 들어도 훌륭한 말이었다.
2분 남짓한 이 영상은 순식간에 모든 인터넷에 퍼져 나갔었다.
"김 기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태양 헌터 말씀이시죠? 저 같은 일반인 처지에선 엄청 듬직하죠. 보금자리몰도 그렇고 원더랜드에서도 인명 피해가 없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S급 게이트, 던전 이런 건 너무 먼 이야기여서 와닿지 않지만 인명 피해와 관련된 건... 너무 밀접해서 더 멋집니다."
"...그래서 더 아쉽네요..."
김 기사는 더 이상 말을 하다간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괜히 아가씨의 심기를 안 좋게 만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말이다.
'대화 주제 돌릴 만한 게...'
필사적으로 눈을 굴렸다.
보금자리몰 근처에서 가만히 정차하는 걸 견디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아가씨의 기분을 환기 시켜 줄 무언갈 찾아야 했다.
'어? 찾았다.'
남을 헐뜯는 건 안 좋은 행동이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아가씨, 저기 저 사람 보세요. 머리만 엄청 꾸미고 옷은 완전 박살이 났네요. 저런 사람이 요즘 아직 있나봅니다."
"저거 김민수예요."
"네?!"
"김민수 사복 패션 처음 보셨구나. 원래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요즘 특히 심해졌어요."
아무리 기숙사에 혼자 산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입는 건 좀 심하지 않나?
김 기사는 어쩌면 김민수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패션의 세계는 심오하고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말이다.
"검은 스키니진에 커다란 강아지 프린트 티셔츠... 보라색 클러치백... 믿기지 않네요..."
"저도요, 조금 있다가 나가서 저런 옷차림과 대화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화이팅입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될지는 몰라도 고추가 작아서 그런지 스키니진을 입어도 큰 티가 나지 않았다.
제3의 다리가 앵무새가 튀어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어서 고간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은 거였다.
'이건 굳이 말 안 해도 되겠지.'
김 기사의 최우선은 무조건 아가씨의 평안과 안정 그리고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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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오지?"
약속 시간이 벌써 10분이나 지났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함이 차오른다.
물론 머리 한 번 바꾸는 게 그렇게 많은 돈이 들 줄은 몰랐으나, 만족스러우니 상관없었다.
"음... 유민이도 꾸미고 있는 중이어서 그런가?"
30분이 지났을 땐 혹시 사고가 난 건가? 생각했다.
전화해볼까도 했지만 재촉하는 남자는 되기 싫어 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자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수차례 보내도 받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왠지 몸에 알 수 없는 오한이 깃든다.
따스한 봄날일 텐데, 화창한 날씨 속에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순간이 너무나 불안 했다.
왜지?
자신도 알 수 없는 위기감.
딸깍.
"유민아 무슨 일 있어? 아직 안 나와서 걱정 했……"
"걱정하지마, 민수야."
어?
유민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튀어나왔다.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