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그저 개같이 멸망했다 백태양!!!
* * *
"뭐?"
"멈추라고."
김민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똑같이 앉아 있다면 승산이 없었다.
백태양이 앉아 있을 때 일어남으로 시선의 높이를 벌려야 했다.
평소에 올려보기만 하던 놈을 내려보니 기분이 아주 짜릿하다.
놈은 내 말에 당황하는 게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은근히 꼽주고 무시하다가 예상치 못한 카운터를 맞고 정신이 어지럽겠지.
민수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굴욕을 되돌려줄 차례라고 생각했다.
유민이를 음흉하게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련에서 날 무참하게 짓밟은 점.
게이트 견학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이번 환각 던전에서도 치욕을 맛 봤다.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건 없었잖아!'
화가 났다.
따지고 보면 백태양만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싸우지도 않았을 거다.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 시작하니 얼굴이 점점 뜨거워진다.
"난 더 이상 니 행동을 지켜봐줄 수가 없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갑자기."
지금 따지고 있는 순간에도 유민이는 신음을 웅얼거리듯이 내고 있었다.
브라로 가려져 있을 텐데 정확히 유두 부분을 꼬집으면서 만지는 걸 보니 눈이 돌아간다.
백태양, 이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자식만 사라진다면!
"우선 당장 그 손 떼지 못 햇!"
"헉!"
탁.
강력한 손짓으로 유민이를 주무르던 손을 떨어트린다.
백태양의 경악 어린 표정이 눈에 들어오자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놈 따위쯤이야.
민수는 지금 자기 행동이 얼마나 정당한 지 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남자는 미디어 매체에서 나오던 것과는 다릅니다. 게다가 저는 여기 있는 아리따운 여인, 소유민과 지금 비밀 연애 중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비밀 연애에서 벗어나 모든 관계를 밝히려고 합니다. 우리는 소꿉친구에서 연인이 된 지 대략 백 일이 조금 넘었으며 사이가 매우 좋습니다. 근데 여기 이 남자! 백태양이 개입하면서 관계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이건 모두 이 남자의 농간이자 사악한 계략입니다! 저는 더 이상 지켜보지만 하지 않을 것이며 이 남자의 모든 악행을 낱낱이 까발리겠습니다!"
"옳소! 옳소!"
"멋있다! 멋있어!"
"역시 용사 김민수야!"
학생!
[돈키호테의 허언 발동! 당신의 거짓을 모두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서 모두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당차게 나오니까 백태양도 이 말을 그대로 믿었는지, 돈키호테의 허언이 버스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됐다.
유민이는 백태양에게 안겨 있는 걸 멈추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이거지! 이거야!'
하지만 순애일지작가님이 알려 준 건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은 걸 여러 번 날리는 것보다, 강한 걸 여러 번 날리는 게 더 좋다는 순애일지작기님의 말.
역시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민수는 과감하게 백태양의 멱살을 쥐어잡았다.
키 차이때문에 비록 들어 올리지는 못 하지만 자세를 어정쩡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김민수! 당장 놓지 못 해!"
"후후, 무섭겠지! 두렵겠지! 하지만 수긍하는 게 좋을 거다!"
갑으로 살기만 했던 인생이 갑자기 역전 되고 있는 걸 납득할 수 없겠지.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을 거다.
'태어날 때부터 인싸로 살아와서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쓰레기, 개자식.'
그 어떤 나쁜 말을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잘생기고 말 잘하고 잘 싸우고 능력 좋고 몸 좋고 인터뷰 잘하고 예의 바르고 급발진 안 하면 단 줄 아는 건가?'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
연습 한 번 하지 않고 바로 실전에 투입 되는 게 인생이다.
인성 교육조차 받지 않고 바로 빅토리 아카데미에 들어온 풋내기가 견딜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백태양! 벌을 받을 시간이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예상했던 반응이다.
주먹을 꽉 쥔 민수는 손을 높게 들었다.
"첫 번째! 내 여자를 음흉하게 쳐다본 죄!"
학생!!
퍽!
민수의 주먹은 순식간에 백태양의 명치에 꽂혔다.
충분히 날아갈 법도 했지만 멱살이 잡혀 있어서 백태양은 날아가지 않았다.
그대로 버스 밖으로 퉁겨져 나갔다면 덜 다쳤을 텐데.
진즉에 멱살을 잡은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
김민수는 자신의 치밀함에 감탄하며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 날 여러 번 망신 준 죄!"
쾅!
학생!!!
전보다 더 강하게 힘을 실었다.
스킬까지 발동시킨다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서 하지 않았다.
불법이기도하고.
"그리고 마지막은 내 눈 밖으로 벗어난 죄다!"
슈우우웅 쾅!
육체의 모든 힘을 끌어올려 백태양의 명치에 최후의 한 방을 꽂아 넣었다.
주먹이 명치에 닿으려는 순간 민수는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더 이상 잡아줄 곳이 없자 백태양은 그대로 버스 밖을 뚫고 날아갔다.
"꾸에에엑!"
"그저 개 같이 멸망했다 백태양!"
돼지 멱따는 소리도 함께였는데, 늘 내기만 하던 소리를 직접 듣게 되다니.
민수는 가슴이 웅장해지면서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유민아 내리자! 기사님 저희 여기서 내릴게요!"
더 이상 이 버스에 볼일은 없었다.
유민이를 데리고 꽁냥거릴 일만 남았으니, 택시라도 잡아서 빨리 집으로 가는 게 맞았다.
학생!!!!
"기사님? 유민아?"
소유민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게 미소만 지으며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버스 기사도 마찬 가지로 운전석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정당한 참교육이라고는 해도 버스에서 폭력 행위가 일어난 거다.
근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운전만 할 수가 있는 건가?
'혹시 몬스터?'
쥐도 새도 모르게 버스 안이 던전으로 변한 걸 수도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 조심스레 버스 기사에게 접근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버스 기사에게 가까워져서 어깨에 손을 올려 상태를 확인하려는 순간!
"학생 일어나!"
"에? 네?"
갑자기 주변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붕 떠 있던 몸이 빠르게 지면에 떨어지는 감각.
잠에서 깼을 때나 들었던 느낌이 지금 왜 드는 거지?
"김 기사 무슨 일이야.?"
"아니 글쎄 뒷자리에 아직 안 내린 학생이 있드라고, 청소하다가 알았네."
"허허, 그러게 내가 뒷자리는 쿠션 바꾸지 말자고 했잖아, 노약자석 위주만 해도 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참 이게... 학생 어여 일어나!"
"...네?"
민수가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렸을 땐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백태양이 맞고 날아가서 버스를 뚫은 흔적도 없었고, 그 많던 승객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기 영웅적 행동을 보며 박수 갈채를 보냈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는 김민수를 본 두 기사는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정신을 못 차려 왜."
"원더랜드 던전 그 피해자 아녀?"
"나도 아직 기사를 안 봐서 모르겠네, 라디오만 대충 들어가지고..."
"김 씨 버스가 그쪽이니까 맞겠구만, 뭘."
원더랜드 던전이라는 말에 민수의 정신이 번쩍였다.
"그... 다른... 사람들은요?"
"정신 차렸네... 다행이야. 그 학생이랑 같이 있던 백태양 헌터랑... 여자 친구 말하는 거지? 둘이 끝내주게 잘 어울리긴 하데, 아무튼 내렸어."
"네?"
"먼저 내렸다고, 어차피 세 명밖에 안 탄 버스여서 원하는 곳에 내려 줬어. 학생은 푹 곯아떨어져서 종점까지 온 거고."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게 다 내 꿈이었다고? 내 착각이었다고...?'
서둘러서 버스에서 벗어났다.
그 모든 순간이 다 꿈이었다니!
우웅 우웅 우웅
너무 쪽팔려서 집으로 서둘러서 가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유민이 문자다!"
울희쟉희♥
>내일 데이트하자 민수야.
>3시에 보금자리몰 앞에서 보자!
>머리 이쁘게 하구 와!
++++++++++++++++++++++++
'이 새끼 갑자기 왜 웃어?'
처음엔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길래 말할 준비하고 있는 건 줄 알았다.
일부러 꼴 받게 하려고 실실 웃으면서 받아칠 말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나자 아예 눈까지 감아버렸다.
혹시 환각 던전에서 저주라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히죽거리는 게 아닌가?
"행복한 꿈을 꾸나보네..."
"태양아 나 이렇게 만져놓고 그냥 보낼 거 아니지?"
유민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라는 대로 다 따라줬다.
민수에게 말싸움을 유도하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얌전히 품에 안기는 것까지.
허벅지에 손을 올리는 건 예상외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좋았다.
"당연히 아니지, 민수 자는 것 같으니까 조심히 나가자."
"그래."
삐이
하차벨을 누르자 기사님이 어디서 내릴 거냐고 물어 봤다.
내 팬이라며 버스 경로는 이탈 못 하지만 근처까지 내려 준다는 말에 감사를 표했다.
버스 운전석에 싸인을 한 뒤 기숙사 거의 바로 앞에서 내렸다.
"우리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태양아 너 진짜 유명해지긴 했다."
"그러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인기 실감이 아니어서 반응이 시큰둥하게 나왔다.
'우선 이 흐름을 그대로 밀고 나가야 돼... 시간이 약이라고 김민수 혼자 자기합리화 하면서 괜찮아지면 큰일이다.'
혼자 꿍해져 있다가 혼자서 기분 풀린 다음 쿨한 척 '너 왜 아직 화나 있어?' 하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겪진 않아도 유민이가 이런 상황을 겪게 될걸 생각하니 너무 끔찍했다.
"유민아 내일 3시에 보금자리몰로 민수랑 만나자고 문자 한 통 넣어놔."
"응 알겠어."
유민이는 날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다.
이런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지.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나 잠깐만 통화 좀 할게."
"나랑은 언제 놀아줘어어어"
"이거 끝나고 바로 할게."
툭
여보세요?
유민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입을 열었다.
"멜라니,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좀 있는데."
드디어 내일이 결전의 날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