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내 눈을 믿을 수 없군.
* * *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예요."
"네?"
"무슨 사인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김민주 부장은 혹시 눈앞의 여인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스킬이 있는지 의심했다.
원더랜드를 가는 남녀라길래 당연히 사귈 줄 알고 쳐다봤던 건데, 잘못 짚었나보다.
"죄송합니다. 제 시선이 불편하셨다면 다시 한번 더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근데 그렇게 보이긴 하나 봐요?"
"네, 정말 잘 어울리시는 선남선녀로 보입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고양이상의 여인은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백태양과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낀 팔짱은 누가 봐도 연인의 그것이었다.
옷을 고를 때도 백태양의 의사를 물어보며 최고의 여친룩을 찾는데 꽤 자연스러웠다.
하물며 간간이 입을 맞추거나 대놓고 허그를 하는 게 당연히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라니, 아닌데 이 정도라고?'
요즘 애들은 진짜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김민주 부장은 남편과의 연애 시절이 자동으로 비교 됐다.
손만 잡아도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동거하면서 '아직' 사귀지도 않는다니,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확실히 보금자리도 좋은 옷이 많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랑 저거 그리고... 방금 입었던 거? 그렇게 해서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던 옷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입기 쉽게 걸어 둔다.
백태양쪽엔 이미 디자이너가 넷이나 붙어 있었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걸어 둔 옷을 싹 잡아서 그대로 백태양에게 걸어갔다.
"태양아아아앙~ 나 옷 다 골랐는데 입혀주면 안 돼?"
"시간이 부족해서 다음에 꼭 입혀줄게."
"힝..."
그녀는 아쉬운 표정하면서 다시 김민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입기 간편해 보이는 옷일 지라도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받겠다는 몸짓이다.
김민주 부장 정도가 되면 VIP의 언행 하나하나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게 된다.
방금도 여인의 처지에선 일상적인 언행이 김민주에겐 다르게 해석된다.
'보금자리도?'
사람의 품격과 기품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상류사회에서 많이 있어 본 느낌을 받았었다.
근데 방금 국내 최고 기업을 가게처럼 취급하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였다.
"혹시..."
"네 맞아요, 마탑의 딸."
"...감사합니다."
근데 마탑의 딸은 김민수와 연애 관계라고 하지 않았나?
기사가 그렇게 나서 당연히 소유민 옆에는 김민수가 있을 줄 알았다.
당사자들은 부정 했었지만 초창기 기사에서 나온 투샷은 예사롭지가 않았었다.
그래서 당연히 둘이 사귀는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로열패밀리도 못 알아보고 큰 무례를 저지를 뻔했다.
아직 말실수 한 것도 없었고 그녀의 기분도 좋아 보여 다행이다.
"그럼 지금 바로 원더랜드까지 모시겠습니다."
확실히 둘 다 이런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옷을 고르는 과정이 매우 짧았다.
호불호가 확실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자기 색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선남선녀는 빈말이 아니었다.
백미러로 잠깐잠깐 보이는 둘의 모습은 명품 그 자체였다.
놀이공원이라는 캐쥬얼한 분위기에 어울리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살아 있다.
백태양 같은 경우엔 청바지와 흰티 그리고 검은색 카디건만 걸쳤는데, 근육질 몸 덕분에 하나의 패션처럼 보였다.
소유민은 하얀 테니스 치마에 살구색 스타킹, 붉은 긴팔 브이넥 티셔츠로 풋풋하면서도 성인다운 면모를 뽐냈다.
'두 분만 노는 게 아니라 한 분 더 오신다고 했나?'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당연히 이 정도의 선남선녀가 만날 사람도 비슷한 외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단 한 번도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김민주의 생각은 산산조각이 난다.
"어, 민수다."
"저분이 일행 분 맞습니까?"
"네 맞아요. 여기 세워주세요, 감사합니다."
"...네... 모시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입고.
'저 꼴로 VIP와 어울린다고?'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김민주는 핸들을 돌렸다.
더 이상 저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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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보인 건 레몬색 면바지였다.
따사로운 햇볕을 그대로 반사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좀 늦었네, 오분 정도."
찡긋!
김민수가 나름 재치있게 한 장난과 윙크가 오히려 애교처럼 느껴질 정도다.
바지가, 바지가 레몬색이라고? 차라리 바지'만' 레몬색이었다면 좋았을 거다.
문제가 한 곳에만 있으면 갈아입으라고 하면 되니까, 사주면 되는 거였으니까.
"민수야 신발이 왜 보라색...이야?"
말하는 이 순간에도 유민이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라색 신발에 검은 양말, 레몬색 면바지의 조화는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분명 마녀의 축복으로 인해 정신 공격 면역이 생겼을 텐데 통하질 않았다.
"아 이게 제일 최신 트랜드라던데?"
말투를 보아하니 누가 추천해준 게 분명했다.
아마 전체적으로 옷을 입어 보고 추천한 게 아니라, 하나씩 최고로 유행하는 걸 뽑은 다음에 섞은 거였다.
"태양아 우리 상의 색깔이 똑같네?"
같긴 했다.
다른 점은 민수는 깊게 파인 V넥에 카라깃까지 세웠다는 거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사람 답게만 입으면 적당히 즐기면서 놀려줄 계획이었다.
'이건 아니야.'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하나도 다듬지 않은 머리를 강제로 왁스 칠해서 뒤로 넘기기까지 했다.
저런 꼴을 하고 같이 원더랜드에 돌아다니라고?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원래 에피소드대로 진행 됐으면 유민이랑 1:1 데이트였을 텐데.'
내가 개입함으로 이야기 전개가 많이 바뀌었을 거다.
아마 저 옷은 더 잘 보이기 위해서 나름 꾸민 거였을 거다.
여자 친구를 뺏기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찾아낸 선택이 저거라고?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아 난 버스 타고 왔지."
미쳤다.
오직 김민수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수치심 따위 잊어 버리고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묵묵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용사.
모두가 아니라고 했을 때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모멸과 핍박을 견뎌 내는 기사.
그게 바로 의 주인공 김민수였다.
"민수야 이건 진짜 아니야."
아무리 사람이 찐따처럼 다닌다고 해도 정도란 게 있었다.
저 모습으로 다니면 한 그룹으로 묶여서 취급받을 터였다.
주인공은 수치심을 모른다지만 유민이와 나는 아니었다.
"뭐가 아니야. 이거 그... 추천 목록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옷 부위 베스트 원만 뽑아서 골라주신 건데."
"대체 누가?"
사실 누군지는 짐작 됐다.
저번에도 이야기한 번 들었으니까.
"있어 그런 사람, 연애의 고수...라고 할까나."
"...그렇구나."
뒤늦게 금목걸이와 커다란 버클이 부착된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유민이는 비위가 상했는 지 내 뒤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원더랜드에 놀러 온 가족도 김민수를 보고 경악할 정도였다.
지금,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건 김민수가 유일했다.
"아니 다들 반응이 왜 이래? 설마 설레서 늦게 잔 거야? 애들도 아니고."
어른스러운 척하는 말투.
"오늘 이러면 곤란한데... 나중에 소주 뿌실 때 제정신 못 차리는 거 아냐?"
갑자기 솟아나는 술부심.
오늘 김민수는 작정하고 온 게 분명했다.
위태로운 관계를 단번에 역전시키기 위한 필살기를 준비한 거였다.
"민수야 진짜 충고하는 거야. 너 그대로 다니면 사람들이 다 비웃을 거야."
"그냥 단순히 주목받는 거 아냐?"
"길거리에 광대가 다니는데 어떻게 안 봐. 일단... 일단 들어가자."
어제 잠깐 검색해 본 바로는 원더랜드엔 옷 가게가 많았다.
캐쥬얼한 옷부터 시작해서 코스프레 복장까지 다양했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 거였다.
만약에 갈아입기 싫다고 하면 쥐어패서라도 말을 듣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나 못 볼 것 같아... 태양아 나 너 옷만 잡고 걸을래..."
"그래 좀 쉬고 있어."
유민이는 민수와 인사조차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손이라도 흔들어 줄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그만큼 김민수의 패션이 끔찍하다는 증거였다.
"민수야 좀 떨어져서 걸어."
"아니 난 유민이 보려고..."
"떨어지라고 했잖아, 말 더하게 할래?"
"미...미안..."
겉모습이 바뀐다고 속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조금만 위협적으로 나와도 순식간에 쭈그리가 돼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뼛속까지 가오로 차오른 상태였다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원더랜드에 ...풉...아니 그...원더랜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김민수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접수대에서 비웃음을 받는다.
"엄마 저 사람 바지에 오줌 쌌나 봐."
"쉿 그런 말하는 거 아니야, 눈 마주치지 말고 그냥 가자."
"아빠! 나도 저 벨트에 있는 독수리 같은 장난감 가지고 싶어."
"어허! 민우야 큰 소리로 그런 말 하면 안 돼."
각성자여서 그런지 아무리 작게 말해도 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축복받은 신체는 지금, 이 순간 최악의 저주로 작용하고 있었다.
"와 진짜 개쩐다. 저러고 다니네."
"끼리끼리라고 오타쿠 모임같은 건 가 봐."
억울했다.
아니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차라리... 차라리 긴급 퀘스트라도...'
김민수는 뒤에서 계속 중얼거리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딱 봐도 옷을 갈아입기 싫은 눈치였는데, 상황을 반전 시킬 무언가가 절실했다.
인상 찌푸리면서 뭐라 하며 입을 다물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안뚱땡 제발 날 구해 줘.'
에피소드에서 크게 벗어난 상황을 안뚱땡이 그냥 지켜볼 리가 없었다.
날 죽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텐데 지금, 이 상황을 보고만 있는다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내 마음을 잘 아는 듯, 유민이와 손을 잡으려고 할 때 퀘스트창이 눈앞에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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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퀘스트 발동!
[환각 던전 :: 서큐버스의 밤]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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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주변이 하얀 안개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활기가 가득 찬 원더랜드가 어두운 밤거리의 홍등가로 변해가다.
밝게 빛나던 거리에 붉은빛이 커튼처럼 내려앉는다.
"...살았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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