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진짜 수컷' 앞에선 부잣집 아가씨도 어림 없지.
* * *
"그러니까 S급 게이트를 깰 수 있었던 건 운도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너무 과한 발언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만..."
"정말입니다. 보스전이나 디펜스, 오펜스전이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오직 컨셉형이었기에 가능한 클리어였습니다."
멜라니는 티비를 켜자마자 나온 개소리를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를 여쭤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어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컨셉형은 클리어 조건이 밝혀진다면 난이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실이었다.
컨셉형은 다른 게이트 난이도와 같다고 보기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우선 나오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A~B급 수준이었다.
즉 클리어 조건만 밝혀진다면 순식간에 난이도가 급감하는 특징이 있었다.
'실제로 컨셉형은 소수 정예로 깨는 게 원칙이기도 하니까.'
맞는 말이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명 피해가 없다거나, 여러 협력을 통해 멋진 게이트 클리어 이런 말을 하진 않고 운부터 말하다니.
마치 운만 있다면 거기에 누가 들어가도 깰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티비 속에 나온 사회자도 그 발언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헌터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백태양 생도...라고 했나요? 저번 백화점 몬스터 때도 그렇고... 이번 사건도 그렇고 유능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근데 천운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겠죠. 이번 안 건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탈 것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스킬입니다. 공헌도 1위를 하고 난 다음 얻은 스킬이란 말입니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 반응이 하나같이 다 긍정적인지 원... 이건 길거리에 무장전차를 타고 다니는 거랑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지금 상황엔 적절하지 않아.'
게스트로 나온 헌터의 말 중에 틀린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상황이 적절하지 않다는 거다.
아침에 하는 티비 프로 '힘세고 강한 아침! HOT한 신인!'는 최근 떠오르는 초신성들을 분석하는 프로다.
떠오르는 신인 각성자들을 분석하고 조사하는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매우 많았다.
가장 큰 특징을 뽑자면 해당 신인 각성자를 조사할 때 관련된 유명 인사들을 섭외한다는 거다.
"지금 그 말은 백태양 생도가 위험하다는 말인가? 이건 그냥 넘겨 들을 수가 없군, 게다가 소환수 탈 것은 도로교통법만 준수한다면 괜찮은 것으로 이미 결정 난 사안 아닌가? 그걸 왜 굳이 다시 문제로 삼으려는 지 알 수가 없군."
백태양과 관련된 사람 중에 가장 유명 인사를 뽑으라면 절대로 빠지지 않을 인물.
국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다목적 기업 '보금자리'의 최영남 회장이었다.
'완전 백태양 편이라는 소문이 진짜였네.'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이용한다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 태도로 봐선 다 거짓이었다.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헌터를 노려보는 사람의 모습엔 진정성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우 이게 밖은 봄인데 여기는 여름처럼 후끈후끈 하네요. 이효태 헌터님께서는 위험성을 말씀해주셨고 최영남 회장님께서는 그간 신인의 행보를 보며 안정성을 높게 사고 계신 것 같습니다. 최근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아무래도 신인이 반드시 나오다 보니 충분히 다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는 분위기가 과열되기 전에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효태같은 경우엔 백태양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는데, 이유가 금방 밝혀졌다.
백태양이 각성하게 된 계기로 뽑힌 헌터였기 때문이다.
동영상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백태양이 떠오르면서 그 사건이 다시 재조명 됐다.
'비 각성자에게 맞은 5급 헌터'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어, 그 명예를 회복하려고 티비쇼에 나온 거였다.
'본전도 못 찾았네.'
그의 폭력성과 행보를 까내리면서 '나는 억울한 피해자'를 호소할 예정이었을 거다.
근데 최영남 회장이 나옴으로 그 모든 게 무산 되어 버린 거였다.
D~F급 던전과 게이트를 전전하는 5급 헌터와 세계적인 대기업의 회장은 싸움 붙이기도 미안한 수준이었다.
"김민수 포섭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네 아가씨, 아직 김민수 생도는 이렇다 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소유민 아가씨쪽으로 붙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백태양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건질 게 있나 하고 본 티비 프로였다.
허나 간단한 정보 말고는 밝혀진 게 없어서 그의 행보 예측으로 계속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더 볼 필요가 없어진 멜라니는 티비를 끄고 나갈 채비를 마무리했다.
"그럼 백태양은요?"
"최영남 회장과 어떤 컨택조차 없다는 걸 보니 무소속인 것 같습니다."
"그럼 한 번 접근해 봐야겠네요. 백태양쪽으로 바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세계적인 각성자 무기 제작 기업 '카이반'은 항상 신인 모델에 목이 말라 있었다.
신인 모델이기 때문에 몸값이 싸고, 혹시라도 날아오를 경우 리턴값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카이반은 각 나라마다 그 나라에서 가장 유망해 보이는 생도를 모델로 삼는 게 전통이었다.
그렇기에 카이반 회장이 최근 뽑은 모델 후보는 당연히 김민수였다.
외모랑 성품 부분은 확실하지 않지만 [용사]라는 키워드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소유민이 항상 붙어 있어서 대놓고 영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면 적어도 30분 정도 걸리니... 슬슬 나올 것 같습니다 아가씨."
"좋아요, 기다려보죠."
백태양이라는 거물이 나타난 거다.
카이반 회장은 멜라니에게 이걸 말하지 않았다.
자기 딸을 어떻게 영업도구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가 해볼게요.'
멜라니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미리 알고 있었다.
스킬 사용 미숙으로 인해 기업이 무너질 뻔했을 때도 쓴소리 한 번 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이런 작은 기회라도 적극적으로 끌어오지 못한다면 볼 면목이 없었다.
'처음부터 뭘 할 생각은 없어.'
그냥 안면만 트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한 사이이기도 하니까 소통하는데 어려움도 없을 터였다.
물론 자신은 기절해 있어서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가씨 백태양 생도가 나옵니다."
멜라니는 자신감이 넘쳤다.
스스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아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외모가 뛰어난 걸 알고 있었다.
김민수도 처음에 자신을 만났을 때 어버버 거렸을 정도다.
비단 김민수뿐만이 아니라 모든 남자가 다 그랬다.
인성교육받는 생도라면 이성 경험이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백태양은 물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만 똑같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어차피 다 똑같아.'
예쁜 여자가 들이대면 넘어오게 되어 있었다.
마침 백태양이 기숙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리무진을 타고 접근하려는 순간.
"로시난테."
"어?"
백태양은 굉장히 자연스럽게 로시난테를 소환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는 해도 저렇게 자연스럽게 소환하다니?
망설임 없이 로시난테에 올라타서 순식간에 속력을 내는 데 반응하지도 못 했다.
"당장 따라잡으세요!"
"네,넵!"
운전 기사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근데 그 와중에 지킬 건 다 지키고 있네.'
소문으로만 듣던 부산 택시 기사를 보는 기분이다.
불법은 아니지만 그 경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 차가 많아지면 갑자기 순한 양처럼 오토바이를 몰기까지 한다.
"접촉 사고라도 내야 말을 걸겠네요."
이대로 가다간 멜라니가 세운 작전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리무진에 태워서 천천히 도로를 주행하며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는데, 빨라도 너무 빨랐다.
"좌회전 때 그럼 접촉 하겠습니다."
"좋아요."
운전 기사는 상황 판단이 신속하고 정확했다.
백태양이 좌회전을 할 때 과감하게 끼어들어서 정차 시키는데서 연륜이 보였다.
그 후에 자연스럽게 갓길에 정차하는 것까지 완벽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할게요."
마지막으로 멜라니는 자기 얼굴을 한 번 점검했다.
사파이어 같은 맑은 눈동자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발의 롤빵머리.
완벽했다.
"당신, 제 차에 타세요 지금 당장."
창문을 내리면서 말했을 때 백태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로 예쁜 서구적 얼굴의 미인을 처음 봤을 테니 놀랄 만도 하겠지.
"멀뚱멀뚱 있지 말고 스킬 해제하고 빨리 타세요."
멜라니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비록 연애 경험 한 번 없지만, 남자쯤이야 얼마든지 넘어오게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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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인가 이거.'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이런 당당한 태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표정을 보아하니 고의로 접촉 사고를 유도한 거였다.
스킬을 해제하고 타라는 걸 보니 대화의 장을 만들고 싶었나보다.
"그... 멜리니 씨."
"멜라니요."
"아 죄송합니다. 멜라니 씨... 저희가 초면은 아니지만 친하지도 않은데 너무 무례하지 않나요."
멜라니와 친해지는 건 아주 곤란했다.
'그럼 김민수랑 이어지지 못하잖아.'
김민수와 성사되기 직전에 뺏는 게 목표였다.
근데 성사되기도 전에 함락 시키면? 퀘스트 자체가 진행이 안 되는 거였다.
김민수 순애 망치자고 하렘을 막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여자애 꼬시는 거 진짜 일도 아니다.'
딱 봐도 얼굴 믿고 이러는 것 같은데 번지수를 한참이나 잘못 찾았다.
김민수 같은 동정한테나 먹힐 행동들이었다.
'이태원에서 니 하위호환 많이 따먹고 다녔다.'
할로윈 데이때마다 포X몬 NPC마냥 길거리에 뽈뽈뽈 돌아다니는 애들이랑 비슷했다.
몇 마디 섞고 바에서 술 몇 잔 마시면 손쉽게 모텔로 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많은 대화도 필요 없었다. 서로 어차피 얼굴만 보고 다리 벌리는 거였으니까.
"죄송해요, 근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백…."
띠링!
"아 잠시만요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문자가 와서..."
[유수진]
>태양아 어제 문자 답장 하려다가 못 봤어 미안 ㅠ...
>나 너 그렇게 큰 사건 있어서 연락 안 올 줄 알구...
>몸은 좀 괜찮아? 기사도 엄청 크게 나서 걱정 많이 했어.
>우리도 어제 던전 견학 때문에 ㅠㅠ...아무튼 답장 진짜 미안 해
>화난 거 아니지? 응? ㅠㅠ...?
>(작은 강아지가 꼬리 흔들면서 미안 해하는 푯말 들고 있는 이모티콘)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게 '알파메일의 삶은 항상 선톡이 많다.'이다.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초반에는 무조건 먼저 연락하는 게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이 남자도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마음을 제대로 열어놔야 한다.
그 후부터는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처음에 줬던 관심을 기억하고 여자 쪽에서 연락이 알아서 오는 원리였다.
'물론 수진이를 가지고 논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습관이었다.
지구에서 했던 개버릇을 청순한 수진이한테까지 할 이유가 없다.
나름 여기 와서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던 여자니까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다.
[유수진]
>응! 응! 나 진짜 꼭 바로 받을게.
>(강아지가 꼬리로 하트 날리는 이모티콘)
귀여운 이모티콘에 입가에 미소가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평소보다 더욱 짙게 미소를 짓다가 멜라니를 볼 땐 바로 정색으로 바꿨다.
명백한 온도차를 만들어서 거리감을 주는 방법이었다.
넌 날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뭐 이런 식이었다.
"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뭘 말씀하시려는 거죠?"
"저희 카이반 기업에서 모델 제의를 드리고 싶어서요."
모델이라, 최영남 회장한테서도 연락이 한 번 오긴 했다.
그땐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를 때라서 거절 했는데.
'잠깐만 이거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잖아?'
멜라니와 김민수는 소설 설정으로 어느 정도 얽혀 있는 인연이었다.
그걸 건너뛰고 나한테 바로 모델 제의를 넣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김민수한테 먼저 제의하다가 까여서 나한테 온 거야.'
이유야 짐작이 갔다.
유민이도 있었고 호구 주인공이니까 이런저런 계기가 필요하겠지.
이 말은 즉 계기만 있다면 바로 멜라니와 김민수를 붙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김민수한테 먼저 연락하시지 않으셨어요?"
"네? 그걸 어떻게..."
"자세한 건 차 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될까요?"
"네...네! 들어오세요."
처녀 주제에 감히 나를 컨트롤 하려고 하다니, 너무 건방졌다.
로시난테를 역 소환 시킨 뒤 리무진 차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철저한 비교 대상이 되어 주마.'
나랑 만난 다음에 김민수와 연달아서 만났을 때 비교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김민수를 모델로 삼는다고 하는 그 순간조차 내 생각이 나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계속 아쉬워 하다가 김민수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순간!
'내가 개입한다.'
S급 게이트까지 가는 거리는 천천히 운전한다고 했을 때 20분 정도가 걸린다.
20분 안에 처녀 하나 요리하는 거? 일도 아니었다.
'내가 니 연애를 도와주긴 하네 민수야.'
하렘을 도와주는 것도 나였으니 당연히 파멸도 내가 시키는 게 맞았다.
대화 흐름이 이쪽으로 넘어오자마자 당황하는 아가씨를 보라.
도도한 가면만 쓰고 있을 뿐 갓 상경한 시골 처녀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진짜 수컷 앞에선 부잣집 아가씨도 어림없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기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남성이 어떤 존재인지를.
원래 당하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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