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게이트 컨셉 :: 고전명작[돈키호테]
* * *
"왜 하필 저희 반에 지원이 오는 건가요? 저도 상시 발동형 능력자입니다!"
"널 무시한다는 게 아니야. 네가 유능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렇다면 이유를 알려주세요."
동급생의 지원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열약하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 사실을 멜라니 아이리엘은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받고 있던 인성 교육을 조기 졸업하고 최연소로 빅토리 아카데미에 들어온 인재였다.
최연소라고 해도 한 살 차이 밖에 안 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따지고 보면 어마어마한 일이다.
상시 발동형 능력자의 인성교육은 일반 각성자와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김석구도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능력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다.
"멜라니, 네가 유능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네가 유능하게 됐을 때가 문제란 거다."
"그건..."
"그래. 우린 네가 능력을 써서 자신을 증명하게 됐을 때 주변 상황을 걱정한 거다."
"조절...조절할 수 있어요!"
멜라니는 이게 단순히 떼를 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운하고 섭섭하며 속상했다.
자신을 믿지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거로 끝나선 안 돼. 조절을 해야만 하고 완벽하게 제어가 가능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널 폭발물처럼 보는 시선들이 괴로운 것도 알아. 그치만 이건 개인의 요구로 결정되는 사안이 아니야."
김석구가 말하는바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상시 발동형 능력자가 있는 반이 약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반의 전력만을 놓고 봤을 때 멜라니가 속한 반은 1학년 학급 중에 2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나 때문에.'
상시 발동형 능력자가 스킬을 활용하면서 적극적으로 임할 때, 얼마만큼의 피해가 일어날 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석구의 말은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게 명백한데 동등한 시선으로 말을 해주는 게 고마울 정도였다.
"김민수는 알겠어요. 그러면 백태양은요? 걘 뭐죠?"
김민수의 스킬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다.
[용사]라는 이름과 능력을 발동할 때 나오는 찬란한 빛은 기억하기 싫어도 머리에 남았다.
하지만 백태양의 지원은 도저히 멜라니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각성한 지 한 달도 안 됐고 인성교육조차 받지 않은 생도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신보다 능력 사용이 미숙할 게 뻔했다.
"제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건 알아요. 근데 너무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김석구도 멜라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태양의 능력이 디 버프 계열이기 때문이다."
"절 억제하기 위해서군요."
"그래 맞아."
그 말을 끝으로 김석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대화로 그녀가 상황을 이해해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원래라면 김민수와 백태양에게 더 자세히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사실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백태양과 김민수를 부를 수도 있었다.
급하게 떠나서 미처 설명 못한 부분을 다시 말할 수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멜라니, 난 너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멜라니가 상담을 원했을 때 바로 달려가지 않았다.
같은 상시 발동형 능력자인데 누구는 교관 대행이고 누구는 폭발물 취급이라니.
김석구는 이 인식을 게이트로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멜라니도 마찬가지였다.
+++++++++++++++
'쟤가 백태양.'
멜라니는 처음부터 김민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민수를 가지고 놀았다고?'
교관들끼리 아무리 입을 맞춰도 소문은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이름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K'와 'B'로 부르기는 했지만 누가 누군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직 명확하게 서열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모두가 김민수를 1학년 1위라고 생각했다.
근데 혜성처럼 등장한 전학생이 김민수의 뚝배기를 깨부순 이야기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김민수는 그냥... 다른 애들 보조.'
백태양은 자신을 마크하기 위해서 파견 온 목줄이나 다름없었다.
멜라니는 자기 롤빵머리를 배배 꼬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닥쳤을 때 하는 무의식적인 버릇이었다.
'아까 시선도 이상하게 끈적했고... 지금은 커다란 무기 케이스에...'
첫 만남부터 사람 뒤통수를 그렇게 끈적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잘 어울려서 딱 잘라서 뭐라고 말하지 못했었다.
이미지와 너무 잘 맞았다.
깔끔하게 태닝한 구릿빛 피부부터 찰랑거리는 백발의 조화에 질척한 눈빛.
짝다리는 기본이었고 지루해 보이는 표정은 덤이었다.
말이라도 붙여볼까 했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나름 선배잖아.'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여러 경험으로 봤을 때 동급생이라고 보기엔 격이 달랐다.
쓸데없는 경쟁심이란 걸 알면서도 이 감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실력을 증명해서 이 남자를 자기 곁에서 떨어트리고 싶었다.
"자 그럼 모두 장비 점검 다 끝났으니 게이트 앞으로 모여라."
김석구의 말에 어제 설명했던 대로 진형을 갖춰 게이트 앞에 나란히 섰다.
김석구 교관과 이민준 그리고 김민수가 전위였고 백태양과 멜라니는 후위였다.
일반 생도들을 샌드위치처럼 감싸서 기습과 변수를 최대한 차단하는 형태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게이트를 통과하면 어지러움이 유발 됩니다. 당황하지 말아 주세요."
이민준 팀장의 말을 끝으로 모두가 천천히 게이트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천천히 들어갈 때마다 게이트의 색이 뭔가 이상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인원을 절반 정도 삼켰을 땐 F급 게이트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빛을 뿜어냈다.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 하는 거지?'
앞서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생도들은 눈치챌 법도 했다.
근데 눈치는커녕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있었다.
백태양한테라도 알려야 했다.
자신이 여기서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설득력이 크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교관 대행이 말해 준다면 모두가 멈출 게 분명했다.
'내가 너무 예민할 수도 있지만...'
교관과 헌터팀은 이미 들어간 지 오래였다.
남은 건 딱 하나 교관 대행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말을 해 보자.'
멜라니가 뒤를 돌았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커다란 무기 케이스였다.
저 커다란 케이스에서 몇 개만 빼갈 거라고 생각 했는데 아니었다.
침대만한 케이스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게이트에 이상한 거 못 느꼈어요?"
"네? 뭐... 없어 보이는데요?"
"그... 네... 알겠어요."
이 남자는 자기 말을 제대로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귀를 후비면서 다가오고 있는데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교관도 A급 헌터팀도 이상 없다고 하는 게이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니 믿을 수가 없겠지.
'하필이면 이런 남자한테...'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루빨리 누가 봐도 대단한 성과를 달성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별일 없겠지.'
직감보단 상급자의 판단을 믿는 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옳았다.
멜라니는 생각을 정리하며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
"허... 진짜 미치겠네."
멜라니의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한 건 미안 했다.
근데 눈앞에 떠 있는 퀘스트창은 사람을 성의 있게 만들지 못했다.
=================================
[긴급 퀘스트]!
뻔하디뻔한 클리셰네요!
예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F급 게이트 난이도 변경 > S급 게이트.
S급 게이트가 됨에 따라 게이트에 컨셉이 부여됩니다.
S급 게이트 컨셉 :: 고전명작[돈키호테]
마지막 인원이 게이트에 진입할 시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클리어 조건 :: 고전명작[돈키호테] 게이트 클리어 , 전원 생존
보상 :: 없음 / 페널티 :: 사망
=================================
퀘스트창을 보자마자 계획이 망가졌다는 걸 알았다.
게이트 내에서 누가 죽어도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살려야 하는 건 김민수와 멜라니 단 둘밖에 없었다.
그 외엔 활자 조합물 살려서 뭐 해? 라는 생각이었는데.
"전원 생존이 가능은 해?"
S급 게이트에서는 A급 헌터도 쉽게 죽는다.
근데 일반 생도들은 얼마나 쉽게 죽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당장 내 목숨도 위협 받을 만한 난이도였다.
"어지럽네 갑자기."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골이 땡기기 시작했다.
"공략은 쉬워 보였는데..."
==================================
[이름] 멜라니 아이리엘
[신체] 키: 166cm / 몸무게: 61kg
[설명] 아카데미 순애일지에서 켓파이트를 담당한다.
소유민과의 경쟁 의식보다는 김민수와 라이벌 구도를 가지며 의식하다가 남자로 보게 될 운명이었다.
최근 김민수가 백태양에게 엉망진창으로 깨졌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백태양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자기 능력 때문에 어릴 적 커다란 사고가 일어났었다.
그 후에 소문이 꼬리처럼 달라붙어 위험인물 취급을 받아 반에서 겉돌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자기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화려한 금발의 롤빵 머리가 인상적이며 세계적인 각성자 무기 제작 기업 회장 카이반 아이리엘의 막내 딸이다.
==================================
자존심은 높지만 현재 위치는 낮다.
그걸로 자격지심이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스스로 경쟁 구도를 만드는 타입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계속 아슬아슬하게 이겨 주면서 구실을 만들면 되는 건데.
"흔들다리 효과 제대로 느끼겠네."
모두의 생명이 위협 받는 순간이 무조건 올 터였다.
이제 와서 발뺌할 수도 없다.
가볍게 게이트를 박살 내고 여자나 꼬실 예정이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침대만한 크기의 케이스를 들어 게이트로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