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밑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
"김민수 생도, 가벼운 대련이지만 항상 머리를 차갑게 식혀라."
"넵...죄송합니다..."
"백태양 생도는 좀 더 촘촘한 운영이 필요하다."
"옙."
김석구는 생각보다 대련 내용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처음부터 주의사항을 빠르게 이야기해줄 줄 알았는데 피드백 삼매경이었다.
"특히 아직 무기술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던지는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결국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의 교환이 이뤄지는데, 자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아예 초근접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김민수 생도가 검을 휘둘렀을 때 피하는 선택지보다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가능한 일이었기도 했다.
마녀의 축복까지 얻은 지금 신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극한의 활용이 가능했다.
때문에 상대방의 턴을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 아예 행동 자체를 중단 시키라는 말이었다.
"만약 품 안으로 들어갔다면 상대방은 검조차 휘두르지 못했을 거다. 이때 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행동은 품 안으로 들어가서 턱을 가격하는 거였다."
가벼운 대련이라고 말하면서 피드백 만큼은 살벌했다.
모든 공격의 초점이 상대방의 즉사 혹은 제압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김민수 생도였다면 상대방보다 공격 범위가 길기 때문에 섣불리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거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무기의 이점을 활용해야 해."
"넵..."
민수는 대련도 지고 실수투성이라고 은근히 돌려 말하는 김석구의 말에 기가 죽었다.
어깨도 뚝 내려가 있어서 대련하기 전에 콧대 높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태양 생도는...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무기를 구하는 게 급선무겠군."
게이트 내에서 무기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몸을 쓰는 게 아무리 자신 있고 주먹과 발의 사용이 능숙하다고 해도 무기는 필수였다.
보통 게이트는 등급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미지의 장소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각반과 수갑을 착용한다고 해봤자 결국엔 초근접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근데 만약에 몬스터가 자폭형이라면? 겉모습을 속이는 미끼형 몬스터라면?
거리가 확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상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기라...'
그렇기에 최소한 지팡이라도 들고 다니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고등급의 헌터는 맨몸 전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 생도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백태양 생도는 오늘 내로 무기 보급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이제부터 주의사항을 알려주겠다."
피드백을 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너희가 이번에 지원을 할 수 있게 된 건 실력도 있지만 운도 있다는 걸 알아라."
"원래라면 고학년이 가는 게 맞지만 최근 게이트가 빈번하게 발생해서 인원이 부족했을 뿐이니까."
사실 가장 의문인 게 이거였다.
왜 같은 학년인데 누구는 지원을 갈 수 있는 걸까.
빅토리 아카데미는 4학년까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학년이 저학년을 지원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근데 동급생 끼리의 지원이라길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것도 안뚱땡의 영향인가?'
주인공을 교관 대행으로 만들기 위한 게이트 발생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반에 가서 여자를 꼬셔야 하는데 마땅한 구실이 없을 테니까.
학교 일정을 살펴보니 반 대항전이 있긴 있었으나 5월부터였다.
"교관들이 찬성했다고 해서 너희를 인정한 게 아니다.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한 차선책일 뿐이지."
교관들은 항상 바쁘다.
생도 관리 말고도 게이트 발생 예상, 민간인 대피, 구조, 토벌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담당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교사의 일하면서도 경찰, 소방관을 겸직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쭐대지 마라, 으스대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F급 게이트라고 해서 방심하지 말고 철저하게 모두를 위한 움직임을 보여라."
자칫하면 잔소리처럼 보일 수 있는 말들이지만 무게가 달랐다.
아카데미 실습 중 부상률이 제일 높은 게 바로 1학년 게이트 실습이었다.
"항상 모든 상황에 가장 먼저 진입하고 마지막에 나와라. 교관 대행은 단순한 경력 한 줄이 아니다. 그만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
김석구 교관은 거기까지 말을 하다 멈췄다.
이어서 손바닥을 두 번 치더니 바닥에서 커다란 판이 하나 올라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랗게 써져 있는 키워드들이었다.
아무래도 키워드부터 시작해 하나하나 설명해줄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우선 너희가 맡게 될 반은…"
내일 있을 게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김민수의 히로인을 찾는 것, 그것만 해결 되면 나머지는 상관없었다.
'나는 소설 속 인물에게 과몰입 하지 않아.'
생도들의 생명? 교관의 책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소중하고 살아 움직이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 활자 조합물일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우선순위가 달라요, 교관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너희는 2인 1조로 반에 투입 된다. 두 명이서 한 명의 교관 몫을 다 할 수 있도록."
""넵!""
김석구 교관의 게이트 설명은 빠르고 간결했다.
인원수가 몇 명인지부터 시작해서 주의해야 할 인물, 간단한 능력과 해야 할 역할을 알기 쉽게 설명해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아 맞아 백태양 생도는 류 교관님에게 가보도록."
"네?"
"무기를 골라야 하는데, 마음 같아선 내가 같이 골라주고 싶지만 일이 있어서 말이야."
류 교관님이 연구 담당인 만큼 무기도 잘 골라주실거야, 그 말이 귓가에 달콤하게 스며들었다.
지금 당장은 접점은 만들 수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바로 기회가 찾아왔다.
근데 언제 말이 다 됐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일 처리 속도였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쪽으로 쭉 가서 왼쪽, 거기가 무기 보급실이야.이미 이야기도 다 끝났으니 몸만 가면 된다."
"넵,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모두 해산, 내일 최고의 컨디션으로 보자."
김석구는 할 말을 다하고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급한 용무가 있다고 하긴 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질 줄이야.
"태양아 나도 같이 갈까?"
"어? 넌 왜?"
"그, 그냥..."
없던 눈치가 생긴 건지 얜 왜 갑자기 같이 가자 그러지?
류혜미와 내가 단둘이 만나는 걸 꺼려하는 얼굴이었다.
근데 그러면 뭐 하는가, 따라올 구실이 전혀 없었다.
"굳이? 애초에 나 검 쓸 일도 없어."
검은 주인공이나 쓰는 거였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투박한 검이 뭐가 멋지다고.
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명검이니 신검이니 마검이니 전부 관심 없었다.
또한 불량스러워 보이는 이미지에 검은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흉흉한 인상을 강화할 수 있는 도끼, 망치, 쇠사슬 같은걸 원했다.
'그게 간지 나니까.'
사람마다 간지의 기준이 다 다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나,나! 검 말고 다른 무기도 많이 볼 줄 알아."
여전히 데시벨 조절 못 하는구나.
"됐어, 각자 푹 쉬고 내일 보자."
민수는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의 여파 때문인지 예전보다 고분고분해져 다루기 편했다.
"민수야, 그리고 유민이가 요즘 많이 힘들어해"
그냥 가려다가 김민수의 마음을 조금 긁어두기로 결정했다.
"어..? 너, 너한테는 그런 말을 했어?"
다루기 편한 만큼 살살 긁기도 쉬워졌다.
"당연히 너한테도 했을 줄 알고 한 말인데... 미안."
"아, 아냐... 내가 다 미흡해서 그렇지 뭐..."
"근데 그렇다고 다른 여자 품에 안 기는 것도 좀 아니지 않냐?"
"어...어? 어?!"
정곡을 찔린 얼굴이었다.
김민수가 하렘 순애를 완성시키는 걸 최대한 늦추려면 방법이 많이 없었다.
남녀가 서로 좋으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귈 수가 있었다.
당장 유민이와 나만 해도 순식간에 혀와 살을 섞었으니까.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연애 경험이 많아야 하는 일이었다.
"어쩌다가 봤어. 상담실에서 손잡고... 어우."
처음엔 '여자 친구의 고민을 다른 남자가 알고 있다.'로 의심의 싹을 심는다.
그다음엔 '너 그거 바람이나 다름없어.'라는 뉘앙스로 죄책감을 뿌린다.
이렇게 되면 김민수는 자기 여자 친구를 의심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김민수는 다른 여자와의 접점을 꺼리게 된다.
"유민이한테 잘 좀 해 민수야, 이번만 넘어 가는 거야."
다른 여자랑 손이나 잡는 놈에게 어떻게 고민 상담해, 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겼다.
민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만 쳐다 봤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건 알아 들었을 거다.
"미...미안..."
"나한테 사과하지 말고, 나중에 유민이한테 솔직하게 다 털어놔."
"...응..."
사실 이럴 때엔 말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먼저 나서서 '나 다른 여자랑 손도 잡고 젖에 얼굴도 비볐어'라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솔직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고, 싸우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다 그렇게 헤어지는 거다.'
첫사랑이 성공한다고? 그건 바보 같은 소리였다.
미성숙한 연애는 성숙하게 바뀌지 않는다.
그저 그 과정이 길어지다가 곯아 터질 뿐.
'한 명씩 천천히 뺏어 줄게.'
우두커니 바닥만 쳐다보는 민수를 뒤로 했다.
혼자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텐데, 미련했다.
무기 보급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혜미랑 지금 당장 뭘 할 순 없겠지만.'
무기를 같이 골라주면서 옷을 벗기거나 할 수는 없었다.
생도끼리의 관계면 몰라도 생도와 교관이라면 정말 난이도가 높았다.
넌 선생이고, 난 학생이야 라는 게 머리에 철저하게 박혀 있을테니까.
거기에 김민수만 바라보고 자란 다 큰 여인이었다.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밑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난공불략의 성이어봤자 처녀일 뿐이다.
처녀는 백태양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몸도 마음도 처절하게 굴복 당하는 결과가 기다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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