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날 믿어줘서 고마워.(수정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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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고블린을 봤을 때 몸이 멈춘 건 아쉽지만 그 이후의 대응이 완벽합니다. 팔찌의 출력을 얼마나 올렸나요?"
"40%입니다."
"되게 위험 했네요. 영상으로 확인해 본 결과 40%의 출력이 아니었습니다. 10% 정도로 보이는데…"
류 교관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메인 스킬의 출력이 아니었다.
소설 제목이 '아카데미 순애일지'라길래 당연히 여주인공이 한 명일 거로 생각했다.
근데 하렘순애라니?
'앞으로 몇 명이 더 나오는 거지?'
당장 류 교관만 해도 김민수를 좋아하는 상태였다.
갑자기 미래가 어두워졌다. 원작에서도 지금부터는 휴재를 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히로인이 복사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진짜 차라리 김민수를 죽일 수만 있었다면...'
퀘스트의 조건이 아주 철저하고 교활했다. 가장 빠른 방법을 확실하게 막았다.
하렘순애를 막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중심에 있는 남자를 없애는 건데, 정말 아쉬웠다.
"태양 생도?"
"네?"
"혹시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가요? 혹시 힘들다면 조사를 미뤄도 됩니다."
스크린을 쳐다 보니 몬스터가 실시간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고블린, 코볼트, 오크를 가리지 않고 주먹 한 방에 모두 목이 터져 나가는 광경은 다시 봐도 통쾌했다.
'나 지금 근데 몬스터 죽이면서 웃고 있었어?'
섬뜩했다.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자각 못 했을 뿐 영상 속의 나는 짜릿한 쾌감을 맛본 얼굴이었다.
입꼬리는 귀에 걸려 있었고 팔은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머리칼은 백록빛을 내며 에메랄드가 뿌려져 있는 듯 했다.
'누가 몬스터인지 모르겠네.'
몬스터의 머리를 질질 끌고 다니기도하고 힘없이 허물어지는 몸뚱어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드문드문 들리는 사람의 비명 소리는 몬스터 때문이 아니라 내 행동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교관님, 계속 말씀하셔도 됩니다."
"일단 팔찌의 출력을 다시 줄이는 것부터 하죠. 출력을 1%로 조정해주세요."
팔찌에 있는 고리를 조작하자 출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1%까지 내려갔을 땐 처음 팔찌를 착용 했을 때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음... 다시 설명하자면 몬스터 대응이 깔끔합니다. 능력의 사용과 범위 조절도 훌륭하구요."
"감사합…"
"그리고 동시에 너무 무모했습니다. 태양 생도는 아직 자기 힘을 너무 몰라요."
"죄송합…"
"하지만 때론 각성자는 몬스터 앞에서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합니다."
말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때 백화점에서 봤던 연구원도 그러더니 류 교관도 똑같았다.
일단 자기 할 말을 끝까지 해야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유형이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류 교관이 화면을 조작했다.
"게이트와 몬스터는 사실 너무 이례적인 경우라... 저희도 파악이 덜 됐습니다."
류 교관은 화면을 조작하면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화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몬스터 말고도 특이한 점이 또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말하면서 류 교관은 뜸을 들였다.
왜 그러나 했는데 화면을 조작해서 보여 준 게 내 바지였다.
정확히는 사타구니 부분이었는데, 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 고간에서 빔도 나오나...?'
100배 정도로 확대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을 정말 미세한 빛이었다.
이게 내 정보창에 있는 정체불명 스킬일지도 몰랐다.
"그... 여기서... 왜 이런 빛이... 나오는지 짐작 되십니까...?"
"사타구니에서요?"
"에?! 아... 네네... 사타구니요..."
남자 경험 없는 게 티가 확 났다. 이건 아마 김민수 주변 여자의 공통 설정이겠지.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동정티를 내지 못해서 안달난 놈이었다.
"글쎄요."
"보, 보시면 빛이 어떤 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막 뿜어져 나올 듯이 말이죠."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놀리고 싶은 타입이었다.
마음 같아선 정액이라고 말하면서 반응을 보고 싶었다.
"그때 너무 경황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네,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죠."
류 교관은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종이가 한 장 보였다.
A4용지 크기의 종이엔 잉크가 막 번져 있었는데 무언갈 쓰다가 급히 문지른 흔적이 역력했다.
"왜 갑자기 종이를 보여주셨나 의아할 겁니다."
솔직히 의아하진 않았다. 근데 맞장구는 쳐야할 것 같아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종이는 갑자기 생긴 종이입니다. 저희도 영상을 0.05배속으로 조사하면서 찾은 겁니다."
뭘 말하고 싶길래 이렇게 말을 빙빙 둘러서 하는 걸까, 본론부터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잉크 번진 부분을 복원해 보니 백화점에 나타난 몬스터 명칭과 숫자가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화면 속 종이는 잉크가 번지기 전의 모습을 복원했다.
그러자 류 교관이 말한 대로 몬스터 이름과 총 숫자가 써져 있었다.
"역시..."
"네? 혹시 짐작 가는 게 있으신가요?"
"아, 아뇨 역시 종이에 뭐가 써져 있을 느낌이 그냥 들어서요."
"감이 좋으시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몬스터들은, 누가 의도적으로 소환한 게 분명합니다."
혼자만의 생각이 완벽한 검증을 받는 순간이었다.
아침의 클리셰 사건만으로는 사실 긴가민가 했는데, 종이까지 보니까 확실해졌다.
'안뚱땡 이 새끼...'
작가란 놈은 날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누가 그랬는 지 혹시 짐작 가시나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현장에 수상한 사람은 없었거든요."
안뚱땡은 생긴 거랑 다르게 치밀했다.
'초기에 세웠던 모든 계획이 의미가 없어졌다.'
유민이의 협력을 받아서 어떻게 해보려는 건 지금 다 의미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수정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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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네, 교관님두요."
"어쩌다 보니 점심시간까지 붙잡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저야말로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의 사회성이 극대화 된다.
최대한 예의를 차리며 좋은 상황으로 매듭을 짓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정리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네...'
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핸드폰 메모장을 켜 자판을 두드렸다.
백화점에서 있었던 종이, 자지에서 나오는 빛, 안뚱땡이 나를 죽이려는 것까지.
적을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밥은 매점에서 해결하고 이걸 마저 정리해야 하나...'
오늘 점심은 빠네 파스타에 베이컨 리조또를 먹기로 결정 했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입맛을 다시며 복도를 걷는데 묘하게 주변이 시끄러웠다. 이유가 짐작은 갔다.
생도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뜨거운 시선이 몸을 스쳐 지나간다.
'확실히 인맥이 좋긴 좋네.'
류 교관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백화점 회장이 돈을 정말 많이 풀었다고 한다.
뉴스는 기본이었고 인터뷰를 어마무시 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단단히 했다.
[백화점 몬스터? "빅토리 생도가 있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최영남 회장의 일침! "사람을 구한 생도를 귀찮게 하는 기자들, 모조리 박멸할 것"]
[구조된 사람들의 피해 보상은… "일상생활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 할 예정"]
["백태양 생도와 유수진 생도에게 무한한 감사" 영웅적 행보에 최영남 회장도 고개 숙여 인사하다!]
당장 메모장을 끄고 인터넷 화면만 들어가도 나오는 기사가 수백 개였다.
자칫하면 모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었던 걸 기회 삼아 도약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업가는 사업가였다.
최영남 회장이 언론플레이를 하면 할수록 내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나중에 가면 자기 엉덩이에 이름을 써달라는 여자까지 나타날 지도 몰랐다.
"태양아~!"
한참 자판을 두드리면서 걷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유민아."
남자친구는 또 어디 버리고 온 건지 해맑은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많이 바빴어? 핸드폰 답장도 안 하고...미워."
어제 일때문에 그런 지 유민이는 강력하게 나오지 못했다.
대신 귀엽게 투정을 부리면서 볼을 부비댈 뿐이었다.
"아 맞아, 나..."
마침 시간도 남으니 계약에 대해 물어보려 했다.
유민이도 그걸 아는 지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지 내 손을 잡고 이끌기 시작했다.
"둘만 있는 곳에서 이야기 하자."
"어디 가는데?"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유민이의 눈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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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길 또 오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영화관 2인실이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그때 우리가 살을 섞었던 그 방이었다.
침대만 봐도 보짓물을 싸면서 다리를 벌리는 유민이가 연상된다.
"유민이 보지 보고 싶어졌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헛기침이 나왔다.
아니라고 부정도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유민이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품에 쏙 들어왔다.
"뭐...음..."
"장난이야."
장난스러운 눈을 하면서도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한 거겠지만 계약이라는 어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계약 내용까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절대신뢰'라는 단어가 받아들이기 쉬운 건 아니었다.
"계약 내용을 봐서 알겠지만 난 내 힘을 제대로 아직 못 써."
기숙사에서 꽃이 만들어진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상시발동형인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무조건 독이었다.
"마녀는 늘 계약을 할 상대방을 찾아다녀, 그래야 자기가 안전하니까."
계승이 가능한 메인스킬은 상상할 수 없는 값어치를 지녔다.
만약 지금 당장 유민이가 나에게 '마녀'라는 스킬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순식간에 상시발동형 메인 스킬을 두 개나 가진 미친 캐릭터가 탄생하는 거다.
메인 스킬명까지 숨기면서 다닐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마녀는... 남의 메인 스킬을 볼 수 있어. 계약자를 찾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지."
"그럼..."
"맞아, 태양이 네 강압이라면 날 억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유일하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거였고.
이어진 말을 끝으로 유민이는 날 지그시 바라봤다.
내 말이 아닌 행동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납득이 된다.'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메인 스킬명을 숨기고 계약자를 찾는 건 힘든 일이다.
의지할 사람도 없으며 힘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내 강압이라면?'
유민이가 스킬의 능력까지 봤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대상의 힘을 극한까지 억누르는 스킬은 유민이에게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민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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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완료!
[서브 스킬]마녀의 축복(S){약화}가 [계약 스킬] 마녀의 축복(S)로 변경 됩니다!
[계약 스킬] 마녀의 축복(S) ::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매혹, 혼란 등 정신 공격에 절대 내성을 가집니다. 명확하게 바라봅니다.
(상시 발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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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손을 잡고 나니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면서 온전히 남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날 믿어줘서 고마워."
더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서로를 껴안았고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유민이는 완전히 내 손 안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김민수, 기다려라.'
모든 퍼즐 조각이 모였으니 길어봤자 한 달.
김민수의 첫 번째 순애를 망가트릴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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