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연애 상담을 인터넷으로 하는 남자, 김민수
* * *
"민수야 내일 나 너랑 못 만나."
"어? 어...? 왜왜? 왜...?"
유민이의 거절이 사형선고처럼 귀에 떨어진다.
너무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유민이가 데이트를 거부하는 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데이트는 늘 유민이가 말을 꺼내 왔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이면 항상 그대로 진행되는 거였다.
민수는 먼저 다가가는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예전에 여자한테 크게 당한 적도 없을 텐데 굉장히 소극적이었다.
'어차피 유민이가 다 해주니까...'
부끄러운 말이었지만 금방 고쳐질 거로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유민이 앞에 당당하게 서는 남자가 되겠지, 민수는 항상 상상만 하며 현 상황에 만족했다.
'아직도 화가 난 건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근데 얼마 전부터 유민이가 이상해졌다.
정확히는 식당에서 비밀 연애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들은 후부터 말이다.
'근데 그때 제대로 풀었는데...?'
태양이에게 아카데미 안내를 끝내는 걸 기다려서 겨우 얻은 대화 기회였다.
민수는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아서 해명했다고 생각했다.
'유민아 사실 비밀 연애라는 게....''아냐, 태양이랑 둘이서 잘 풀었어 이제 괜찮아''그...그래? 그렇지...? 알아줘서 고마워!'
그때 대화를 상상하면서 잘못된 점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말하려는 의도를 먼저 알아주는 여자 친구를 뒀다는 행복만이 있을 뿐이다.
"아니 그냥 네가 너무 약속을 갑작스럽게 잡아서..."
"아... 내가 너무 그... 빨랐지...?"
이번 데이트는 화해의 의미에서 먼저 데이트를 권유하기까지 했다.
인생의 첫 데이트 권유였는데 그게 이렇게 무참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항상 유민이는 데이트를 빠르지 않고 천천히 잡아 왔던 거였을까.
"그...그러면 다음 주 주말은 어때...? 영화...! 영화 보자!"
같이 영화를 볼 생각에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지만 상관없었다.
'유민이와 함께 보는 영화! 팝콘을 같이 먹으면서 손도 닿고!'
민수는 상상만 해도 기뻤다.
"영화? 무슨 영화?"
"번개망치남자4! 이게 어떤 영화냐면 원래..."
"헐... 민수야 나 그거 이미 봤는데..."
이거 아직 개봉 안 했는데…, 그 말을 하려다가 잠깐 생각해봤다.
유민이는 보통 잘 사는 게 아니었다.
티를 안 내고 다녀서 그렇지 빅토리 아카데미 앞 번화가 건물 몇 개는 유민이네 소유였다.
'그 정도면 다음 달 개봉 영화 정도야 미리 볼 수 있지 않을까?'
함께 영화를 보면서 번개망치남자의 역사와 그걸 아우르는 큰 세계관을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괜히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이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관계가 금방 회복 됐을 텐데...
"그, 그럼 이번 데이트 언제로 미룰까...?"
급하게 달력을 찾았다.
빅토리 아카데미는 4월부터 급격하게 바빠진다.
첫 학기 3월엔 신입생들이 적응할 수 있게 이론 위주로 수업했다면 4월부터는 실습이 시작된다.
게이트라도 들어갔다 오는 날엔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터였다.
격한 일정을 소화하기 전에 만나서 서로를 달래주는 거야말로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당분간 힘들지 않을까? 음... 근데 통화 계속해야돼?"
싸늘한 말투였다. 게다가 바쁜 일이 있는지 통화를 계속하기도 힘들게 들렸다.
"아...바뻐서 그래 요즘?"
"응...미안 해..."
"그럼나랑만나기 싫어서못만나 게아니라바뻐서못만난다는 거지?"
급해서 숨도 못 쉬고 말을 우다다다 뱉어 버렸다.
아까부터 계속 머리에 박혀 있던 생각이었다.
이런 건 바로바로 말해서 풀어야 한다고 인터넷에 써져 있었다.
'관계를 망치는 건 상상력이니까'
괜한 오해를 했다.
요즘 들어서 묘하게 카톡 답장도 느려지고 읽고 씹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혹시 나를 피하나? 내가 싫어졌나? 이 생각을 했는데 단순히 바쁜거였다니!
"당연하지 너는 무슨 그런 생각을 해"
"헤...헤헤...미안..."
민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타박하는 유민이의 말을 들으니까 근심이 녹아내렸다.
최근 유민이가 사랑한다는 말도 해주지 않고 손도 잡아주지 않아서 아쉬워 했던 차였다.
고백할 때 손을 잡은 이후로 먼저 손을 잡아본 적은 없었다. 왜냐면 유민이가 해주니까!
"어우 우리 통화 엄청 오래 했다. 나 볼이 너무 뜨거워 민수야."
"아..., 아 그럼 끊어야지! 이제 뭐 해?"
통화를 오래 했다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10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니까.
근데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그럴 수 있었다.
'예전엔 두 시간도 짧다고 했는데...'
정말로 유민이는 바쁜 게 맞나보다.
끊을 때 딱 끊어 주는 남자야말로 스윗하다고 책에서 그랬다.
"나? 나 이제 자야지"
유민이는 요즘 일찍 자는 듯했다. 오후 여섯시쯤만 되면 잔다고 했으니까.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말이 맞았다. 나중에 석류를 선물해 줘야겠다.
"피곤하구나... 잘 자 유민아! 사랑해!"
곧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올 달콤한 사랑해를 기대했다.
연인의 통화 끝엔 항상 서로 애정 표현을 뿅뿅 쏘는 게 정석이었다.
'음?'
근데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어... 끊었네..."
핸드폰 화면을 보니까 이미 통화는 끊어져 있었다.
자야지,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유민이는 통화를 종료한 거였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갑자기 우울해졌다.
무려 하루 만에 하는 통화였는데 너무 무미건조했다.
혹시 유민이의 사랑이 식은 거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얼마나 스윗한데...'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 정도면 엄청 잘생기고 듬직하지 않나?
유민이가 예쁜 걸 단박에 알아볼 정도니 자기 눈은 무조건 맞다.
민수는 자기 시선이 굉장히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다.
"데이트도 못 하고... 사랑해도 못 들었네..."
잘 풀었으니까 앞으로 좋은 일겠지만 괜히 눈물이 고였다.
상상하면 할 수록 안 좋은 쪽으로 흐르는 걸 알면서도 머리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 했다.
항상 연애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가 생겼을 땐 질문을 올려 해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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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와 고민이 있습니다] 스윗생도
스윗생도님의 2314번째 고민글입니다
여자 친구가 제 데이트를 거절햇습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업었는 대...
사실 이번이 제 첫 데이트 권유거든요....
요즘 들어서 바쁜지 답장도 뜸해졋습니다.
이게 모두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네요...
제 잘못도 있긴 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주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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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애일지작가님 오늘도 제발 답변 해주세요...!'
처음에 질문을 올렸을 땐 여러 사람이 답변을 달아줬다.
근데 다들 컨셉 잡지 말라거나, 진짜 이런 사람이 어디 있냐는 말을 남기며 하나둘씩 떠났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게 순애일지작가라는 유저였다.
무려 지식 답변 등급이 태양광이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인터넷 지식 고인물이었다.
게다가 다른 분야도 아니고 무려 연애 답변 등급으로 태양광이다.
엄청난 연애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게 분명했다.
{띠링! [여자 친구와 고민이 있습니다]에 대한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오오... 이렇게 빨리! 역시 순애일지작가님!!!"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지만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었다.
민수는 얼른 지식 답변 화면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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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와 고민이 있습니다]의 답변 순애일지작가 [태양광]
아마 튕기는 거 아닐까요? 원래 여자는 두 세 번 권유해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땐 너무 사랑하는데 바로 데이트를 받기에는... 무서운 거죠
사랑의 무서움? 이랄까나...
제 예전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전 도내SSS급 소꿉친구가 있습니다.
제가 감기가 걸렸을 때 저한테 막 화를 내더군요...
참... 근데 그러면서도 죽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자란 진짜 알 수 없는 생물입니다.
심지어 제가 감기가 다 낳고 나서는 또 화를 내면서 이제 다 됐으니까 나가자는 겁니다.
감기가 다 나으면 좀 쉬어야 하는 게 국룰인데 그것도 무시하더군요.
어쩔 수 없이 나오니까 이거참... 동네 사람들이 제 소꿉친구와 데이트를 보고 박수 치더군요
기립박수하면서 막... 뭐 기분 좋았달지...
제 경험담입니다 뭐... 느낌이 오시나요? 이게 참...
여자란 원래 그런 겁니다. 싫다면서 좋고 어쩔 땐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좋아하는...
스윗생도님도 이런 부분을 잘 고려하면 저처럼 될 수 있? 음...
그건 무리일지도 몰라도 ㅋㅋ 힘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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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순애일지작가님은 클라스가 다르구나..."
완전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유명한 지 답변을 하자마자 좋아요 숫자도 올라간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정보였다. 이런 정보를 신뢰 하지 못한다면 세상 믿을 거 하나도 없었다.
"유민이가 튕기고 있었단 말이지...? 좀 귀엽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로 실행에 옮겨서 깜찍한 여자 친구의 장단에 어울려 줘야 했다.
>유민아 뭐 해? 22:59 [1]
>내가 만이 생각을 했는데 역시 우리 내일 만나는 거 어떻해 생각해? 22:59 [1]
금방 답장이 오겠지? 민수는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숫자 1은 금방 사라지고 달콤한 메시지가 자기 눈을 간지럽힐 직감!
>유민아? 23:04 [1]
5분을 기다렸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정말로 자는 것 같아서 전화를 하려다가 참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답장을 주지 않을까?
"쩝... 아쉽....어?"
마지막으로 유민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유민이 프로필 사진을 눌렀었다.
근데 프로필 사진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원래는 책을 읽고 있는 전신샷이었는데, 지금은 꽃받침을 한 얼굴샷이었다.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예뻐서 좋다였는데 이내 의문이 자리 잡았다.
'자는데 프로필 사진을 바꿀 수가 있나...?'
내가 모르는 예약 기능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 메시지를 못 볼 정도로 사진에 집중하는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최악의 경우까지 이어졌다.
'설마... 내 메시지를 안 읽고 씹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순애일지작가님의 답변의 실행 조건은 여자 친구 쪽에서 반응이 있을 경우였다.
근데 만약에 답장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헤어지는 거 아닐까? 이렇게 벌써?
사귄 지 백일 만에? 결혼하면 낳을 아이 이름까지 다 정해 놨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민수는 핸드폰 전화목록을 뒤졌다.
'분명, 분명 여기 있을 텐데...'
인터넷에 연애고수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현실 연애고수한테 해결하는 게 옳았다.
민수가 알고 있는 유일한 현실 연애고수!
그건 바로…
++++
'나구나.'
김민수의 현실 연애 고수는 나였다.
민수는 울면서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태양아 나 진짜 어떻게 해야 해? 정답을 알려 줘..."
"어... 음..."
정말로 고민이 많이 됐다.
'이 정도면 퀘스트가 알아서 깨지지 않을까?'
이 녀석,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이었다.
난 또 무슨 헤어진 줄 알았는데 질질 짜는 이유가 단순히 데이트 거절이라니.
물론 단지 데이트 거절만 있는 게 아니었지만 시작이 그거였다.
"일단 우리 그러면 내일 볼까?"
"내일? 그, 그럴까? 내가 니네 방으로 갈게!"
만나서 직접 연애 코칭을 해주면서 헛짓거리를 더 하게 만드는 게 좋아 보였다.
마침 민수도 적극적으로 그러겠다고 하며 먹을 걸 사 들고 온다고 했다.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소유민]
>태양아♥♥ 나 내일 너 기숙사 놀러 갈게♥~♥
>거절하면 유민이 울 거야 ㅠ.ㅠ♥♥♥
>답장 안 하면 진짜 삐질 거니까 읽자마자 꼭 답장하기♥~♥
"음... 민수야 미안하다 내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어? 어...어 너도 바뻐?"
민수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긴 바쁘다고 거절 당했는데 또 이런 식이면 당황스럽겠지.
근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나중에 영화라도 같이 볼까? 번개망치남자4 어때?"
민수는 금방 감정이 정리 됐는 지 다음 계획을 말했다.
영화를 보면서 이야기하자는 거였다.
그리고 동시에 유민이의 메시지가 또 날라왔다.
>기숙사에서 영화 보자!♥ㅁ♥!
>번개망치남자4!♥
>이거 알아? 아직 개봉 전인데 내가 너랑 보려고 미리 구했어y////y
>같이 보쟝♥♥♥ 그리구 답장 꼭 해♥
"나 그거 봤는데..."
"어...이거 개봉 안 했는데..."
어색한 침묵이 핸드폰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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