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수진이와 데이트(3)
* * *
싸워 본 기억은 유치원이 마지막이었다.
골X런 장난감을 누가 차지할 거냐로 실랑이를 벌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격투기를 배워도, 헬스를 해도 정해진 룰에서만 움직이는 거니까 압박감은 없었다.
갑자기 전쟁 중인 군인의 몸속으로 빙의 했다고 해도 총을 잘 쏘거나 칼질을 잘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폭력의 재능? 그건 백태양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백태양은 어쩌면 몬스터가 나와도 사람을 패듯이 날뛰었을지도 몰랐다.
근데 난, 이태옥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게 익숙하지 않다.
수진이가 눈앞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게 보인다.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뒤를 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늬만 각성자고 사실은 현생 잘 살던 일반인이 몸 안에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움직여야해'
여자 뒤에 숨어서 이러고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았다.
백태양의 몸에 들어와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태옥'의 본능이 거부하고 있었다.
두려움?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
공포?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상황과 조우한다면 누구나 다 위축될 테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선배가 대신 싸워준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백태양에겐 사람을 지킬 힘이 있었다.
근데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태양'이라는 이름의 품격]이 '이태옥'의 생각에 동조합니다!
행동하세요! 보여주세요! 증명하세요!
==================================
떨렸던 몸이 진정된다.
공포의 늪에 허우적 거리던 다리가 멈춘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나아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외칠 때, 그걸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군가 도와줘야 했다.
타고난 육체는 여자의 뒤에 숨으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
[긴급 퀘스트]!
몬스터 추가 발생!
복도 내 모든 몬스터를 몰살 시키세요!
클리어 조건 :: 고블린(0/21) 코볼트(0/14) 오크(0/3)
보상 :: (이전 긴급 퀘스트와 합산하여 지급) / 페널티 :: '태양'이라는 이름의 품격 삭제 , ???
==================================
내가 나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지 퀘스트가 상황을 악화시킨다.
상관 없었다.
아무리 악화 돼도 내가 다 정리할 테니까.
몬스터가 쏟아진다.
고블린이 죽어 나가는걸 구경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빨리 와서 구하라고! 각성자잖아!"
"왜! 왜 저 자식부터 구하는 거야! 나를 살리라고! 나를!"
"너 때문이야! 우리가 죽는다면 다!!! 전부!!! 네가 죽인 거야!!!"
사람들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진은 저런 외침 속에서 혼자 묵묵히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며 끝없이 자신을 증명했다.
가만히 있는 내가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그런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딱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음에도 저렇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라.
저 작디작은 체구에 숨어서 가만히 있다니.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당장은 수진이가 주위를 모으면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지만 시간문제였다.
이젠 내가 증명할 차례였다.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나한테 있는 유일한 광역기는 강압뿐이었다.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뒤로 미뤘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닌 해야만 했다.
주변은 이미 악에 받쳐 수진이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내고 있었다.
이대로 사람이 죽어 나갔다간 큰 트라우마가 될 게 분명했다.
모든 건 수진이를 위하여.
끼리릭
망설임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팔찌에 있는 제어 장치가 돌아간다.
'출력은 40%, 대상은 복도 내 모든 몬스터'
사용이 미숙해서 일반인들에게 피해가 가면 어쩌지? 그런 가설은 세우지도 않았다.
당장 우선해야 할 건 수진이의 상태였다.
네가 날 지켜줬듯이, 나도.
"선배, 처음엔 다 그럴 수 있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수진이의 앞을 가로막는다. 더 이상 상처 받게 둘 수는 없었다.
몸이 작게 떨리다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복도 내 전체에 뿌려진다.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저게 강압이었다.
언뜻 보이기로는 커다란 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은 몬스터 머리를 하나하나 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찍었다.
어떤 건 잡아서 찍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려 찍기도 했다.
쿵, 쿵, 쿵, 쿵.
몸집이 작은 순서부터 차례대로 땅에 처박힌다.
모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밀어 넣은 자세가 만들어진다.
강압은 단순히 심리적인 측면에서만 작용하는 스킬이 아니었다.
개념 자체가 물리적인 힘으로도 완벽하게 구현 된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꿇어야 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강제로 재현시킨다.
힘의 소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을 테니까, 괜찮아요."
수진이는 안심이 된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다 대 일에 특화되지 않은 능력을 갖추고 모두를 지킨다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겠지.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누나"
퀘스트창을 보니 몬스터가 다 죽지는 않았다.
사실 머리가 땅에 박힌다고 해서 그 충격으로 죽을 몬스터는 많이 없었다.
출력도 낮았지만 스킬의 숙련도가 가장 큰 문제였다.
[강타 발동! 왼 주먹에 강력한 힘이 깃듭니다!]
큰 문제는 없었다.
강타로 뒷목을 때려서 머리를 뽑아버리면 금방 정리가 될 터였다.
[강타 발동! 오른발에 강한 힘이 깃듭니다!]
부상자는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아카데미 근처에서 몬스터가 출현했기 때문에 금방 구조대가 올 터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보통은 10분 안에 도착하는 게 원칙이라고 했지 아마?'
빠르게 정리를 하며 퀘스트창을 보니 클리어까지 오크 한 마리만을 남기고 있었다.
오크의 위치는 복도 비상문 바로 앞이었다.
만약에 빠져나가서 다른 곳까지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얼른 가서 죽여야지.'
수진이는 다 울었는 지 눈물을 닦고 일어나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옷과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는데, 굉장히 멋있어 보였다.
혼자 있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잠깐! 정지!"
마무리하기 위해서 오크의 뒷목을 후려치려는 그때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문외한이 봐도 특공복이구나 싶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들고 있는 무기가 모두 달랐는데 각성자로 이뤄진 구조대 같아 보였다.
"늦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구조대는 일사불란하게 일반인들에게 다가갔다.
'일 되게 잘하네'
부상자는 즉시 후송하고 별로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조사를 위해서 이송한다.
또한 한 명 한 명의 촬영기기를 검사해 현장을 녹화한 모든 영상을 삭제 시켰다.
구조대는 복도 내 CCTV로 영상 자료를 확보하면 되니 일반인들의 자료는 필요 없다는 판단이었다.
일반인들이 따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 되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하고 9분 정도면 사망자는 있을 수는 있어도 큰 피해는 생기지 않을 시간이다.
단지 그 현장에 운이 좋게 생도 2명이 있어서 사망자가 없을 뿐이었다.
'괜찮네'
정지 하라는 말에 잠깐 멈췄지만 나한테 한 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다시 오크의 머리통을 내려찍으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내 손이 잡혔다.
"정지하라는 말 안 들렸나. 백태양 생도?"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정지하라고 외친 사람이었다.
구조대원들이 흩어져 있을 때 능숙하게 지휘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사람이 대장인가? 근데 왜 멈추라고 한 거지?
빤히 쳐다 보니 깍두기 머리를 긁적이며 근엄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게이트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나온 몬스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표본 조사가 필요하지."
깍두기 머리 뒤로하얀 가운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밧줄 같은걸로 오크를 천천히 묶기 시작하는데 딱 봐도 그대로 데려갈 상황이었다.
내 퀘스트는? 내 보상은? 내 페널티는?
"유수진 생도와 백태양 생도의 활약 덕분에 이렇게 일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정말로 고맙다."
깍두기 머리는 잡았던 내 손을 놓고 허리를 숙였다.
일반인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 모든 대원은 나와 수진을 향해 인사를 했다.
수진은 양팔을 휘휘 저으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게다가 이렇게 좋은 표본까지 남기다니... 참 유능하네요."
한 연구원의 말에 깍두기 머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오크를 가져가서 불가사의한 현상을 연구할 생각이었나보다.
[강압 발동! 대상을 설정합니다.]
[대상 :: 눈앞의 생명체]
물론 그렇게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기다니? 누가 남겼다는 거야.
다 된 밥에 갑자기 숟가락을 올리는 거? 못 참았다.
강압을 발동해 주변에 있는 요원들의 신체를 압박한 뒤.
[강타 발동! 오른손에 강력한 힘이 깃듭니다!]
그대로 오른손을 휘둘러 오크 머리를 가격했다.
오크 머리가 터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송을 위해 오크와 몸을 가까이했던 모두의 얼굴이 초록색 피가 튀었다.
내 퀘스트부터 깨야지 다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주변을 쳐다 봤다.
훈훈하던 분위기에 갑자기 초록색 피가 끼얹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