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니여친쩔더라-15화 (15/325)

〈 15화 〉 뜻밖의 만남

* * *

소설 속에서 맞이한 두 번째 아침.

별다른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군대에 입대하고 일주일 정도는 정신을 못 차렸던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유수진]

>태양아 자...?

>우리 어디서 볼 지를 안 정했어 ㅠㅠ...

>일단 아카데미 교문 앞에서 12시에 보자

>밥 절대 먹고 오지 마! 점심 같이 먹자!

핸드폰을 보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네 선배

간결하게 답장을 한 뒤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와 똑같은 위치의 전신거울.

"상태창"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창을 열어본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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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백태양

[신체] 키: 183cm / 몸무게: 95kg

[설명] !)(*&$의 자리를 @$%%, 반드시 @$(!_$@(정보를 갱신 중입니다.)

[메인 스킬] 강압(???)

[서브 스킬] '태양'이라는 이름의 품격(A), 처녀폭격기(SSS), 뒤처리(F), 핥아보는 눈동자(B), 플레이보이 기억법(B), 강타(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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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원래라면 네 줄 정도 쌓여 있는 설명이 변해 있었다.

정보를 갱신 중이라면서 누구의 자리를 어쩌구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읽을 수가 없었다.

어제부터 물음표 폭격이었다.

짧아 보이는 상태창에 설명과 스킬 두 개가 알 수 없음으로 표시되어 있다니.

확실히 원래 등장하지 않을 예정이었던 캐릭터가 활개를 치고 다녀서 그런지 소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얌전히 생각해서 해결될 거 였으면 이미 진즉에 스킬도 보이고 했어야 할 테니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데이트 복장이네..."

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전부 다 교복 뿐이어서 이대로 데이트를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아예 데이트 코스를 내 옷 사러 가는걸로 해야겠네."

데이트 코스 정도야 한두 번 짜보는 것도 아닌 지라 아주 쉬웠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현재 시간 11시 반, 데이트 하기 전 삼십 분은 예의였다.

+++

세상에 우연은 없다.

이건 우리 아빠가 강조한 인생 수칙이기도 하다.

"어?"

기숙사 문밖을 나왔을 때 안뚱땡이 보였다.

"에이... 무슨..."

잘못 본 거로 생각해서 눈을 비볐는데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빌어먹을 하얀 공간에서 만났던 얼굴이랑 똑같았다.

뭘 빤히 보고 있나 시선을 따라 갔는데 여자 기숙사 정문을 보고 있었다.

카페 안 창문을 통해서 보고 있으면 의심이라도 안 받을 텐데,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대고 대놓고 쳐다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분노? 애매했다. 그러기엔 굉장히 침착 했으니까.

이성을 잃어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생긴 기회를 놓칠 만큼 멍청하지 않다.

기껏 뒤를 잡고선 '이쪽이다!'라고 말하는 캐릭터들이 있긴 한데, 적어도 난 아니었다.

안뚱땡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다가 갔다.

도망치면 어쩌지? 만나자마자 일단 한 대 후려 갈겨야 하나? 팔찌를 풀까?

셀 수 없는 고민이 뇌를 가득 채웠다.

어금니를 들어갈 정도로 깨물었다.

'근데 내가 왜 참아야 되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손끝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대화로 첫 단추를 풀어내야 마무리가 깔끔할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

몸은 머리를 따라주지 않았다.

딱 하루 만 있었음에도, 무슨 고난과 수모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쪽지 하나 남긴 게 이렇게 할 정도로 큰 죄냐?'

억울했다.

악의적이라고 생각되면 고소하면 되지, 갑자기 왜 이런.

[강타 발동! 왼손에 강한 힘이 깃듭니다!]

뒤통수를 때릴까 했지만, 그건 피할 확률이 높았다.

노리는 건 등허리, 척추 부분을 제대로 박살 내서 하반신을 마비 시켜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수없이 치고 박았던 경험이 몸에 그대로 남아 미숙한 경험을 완벽히 보조한다.

사람을 제대로 때려 본 적도 없지만 백태양의 몸은 아니었다.

땅을 밀듯이, 발끝부터 힘이 올라온다.

살짝 틀어진 허리, 기울어진 상체는 하나의 동작처럼 매끄럽다.

상체는 주먹을 뻗으면서 자연스럽게 빠지고 주먹은 그대로 안뚱땡의 허리에 꽂힌다.

쾅!!!

"뭐, 뭐야!, 너...너, 누구야...!"

아니 꽂혔다고 생각했다.

등허리에 닿으려는 그 순간에 투명한 막이 주먹을 가로 막았다.

'칫, 결계인가...'

게다가 반발력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조금만 더 세게 때렸다간 손뼈가 전부 으스러질 정도였다.

"뭐? 누구? 너 나 기억 안 나냐?"

이놈은 죄책감도 없는 건가?

잘 사는 사람 하나를 소설 속에 집어넣어 놓고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고?

안뚱땡은 정말로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내 교복에 있는 명찰을 보곤 크게 놀라더니 갑자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백태양은 분명 내가... 책에는 서술하지 않았을 텐데... 어, 어떻게... 누구지..."

"이태옥이다, 이 새끼야!"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폭발했다.

물론 주먹을 뻗은 순간부터 못 참았다고 보는 게 맞았지만, 욕설 만큼은 정말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 했다.

폭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부드러운 대화로 풀어나갈 생각이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네가 이태옥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사람을 앞에 두고 갑자기 혼자 고민에 빠진 모습에 절로 몸에 열이 올랐다.

마음 같아선 명치에 큰 거 한 방 꽂아 넣고 싶은데 개수작으로 막을 게 분명했다.

"어쩐지... 갑자기 관측 되지 않았던..."

"미친 새끼야,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어서 날 소설 밖으로 내보내라고!"

그 말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날 쳐다 봤다.

혹시 또 때릴까? 이런 눈동자로 쳐다보다가 보호막이 생각났는지 안도감으로 표정이 물들었다.

"날 볼 수 있는 것까지... 오류가 생겼어..."

"야, 너 내 말 듣기는 하냐?"

나 지금 벽이랑 말하냐? 솔직히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근데 이런 방식으로 소통이 안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돌아갈 수 없다며, 돌아가는 힌트 정도는 던져 줄 거로 생각했다.

'이 새끼 중얼거리는 것만 보고 있네...'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다가 갑자기 뭔가 번뜩인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나는 가야겠어"

"어딜 가, 아니 날 꺼내라고! 내가 그 정도로 잘못 했냐? 솔직히 아니잖아! 네가 모쏠찐따여서 글을 그따구로 쓴 건데 왜 나한테 그러냐고!"

안뚱땡은 그제야 날 똑바로 쳐다봤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그때처럼 얼굴이 빨갰다.

갑지가 간다고 하길래 몸을 잡으려고 했는데 또다시 투명한 막이 가로 막았다.

아무 말이나 막 튀어나왔다.

중간에 욕설도 섞였지만 내 감정과 상황을 전달하려고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고 생각한다.

"몰라... 진짜 모른다고... 그..그리고...미, 미, 미.., 미친놈아 네가 먼저 잘못 했잖아! 왜 나한테 그러냐고! 나도 상처 받아!"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뱉으면서 안뚱땡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만남과 이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대체 이게 뭐야? 이 만남으로 난 뭘 얻은 거지?

허무했다.

서술이니 관측이니 개소리만 하더니 사라진 놈을, 한 대도 못 때린 게 너무 허무했다.

소설 속에 그새 적응한 듯 팔찌를 풀지 않은 스스로가 너무 원망스러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고 해도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으로 후려 쳤어야 했는데...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나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래, 이렇게 쉽게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사실 아깝게 놓친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갑작스럽게 달려들어서 정보를 얻어보자, 이게 작전의 전부였다.

실패할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못 건질 줄은 몰랐다.

"진짜 씨발..."

왜 소설 속에 있는 등장인물들이 빠져나갈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완성 시키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 나갈 만한 수단이 없으니까 일단 이야기를 고쳐 나가고 보는 거겠지.

근데 난 아니었다. 읽은 거라곤 프롤로그, 1화, 그리고 최신화가 전부인데 뭘 더 어떻게 고친단 말인가.

퀘스트도 깨자마자 연계 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황에만 나타나는데, 그 특정 상황도 알 수가 없다.

기대하라는 메시지만이 전부였다.

"미치겠네..."

"뭐가?"

아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니 수진이가 보였다.

하늘하늘한 베이지색 원피스에 분홍 카디건은 봄처녀를 연상케 하는 조합이었다.

스타킹은 하늘색이었는데, 치마가 짧고 스타킹은 허벅지까지 오는 길이여서 걸을 때마다 스타킹 밴드 부분이 살랑살랑 보였다.

상황은 암담한데 수진이가 입은 옷을 보자마자 떨려오는 자지가 원망스러웠다.

누구보다 몸은 착실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근데 사복 차림을 보자마자 발기각이 나오는 것도 웃겼다.

'이 새낀 일상생활이 가능하긴 했을까.'

백태양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선배가 너무 예뻐서요."

"무슨 그런 말을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꼰다.

긴 생머리는 찰랑거리고 검은색 핸드백은 어깨에 단정하게 걸쳐져 있었다.

보통 가슴이 좀 있는 여자가 원피스를 입으면 원피스 굴곡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근데 그걸 아는지 원피스 허리 부분을 얇은 끈으로 묶어서 리본 매듭을 지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몸매가 더 부각 됐다.

청순한 원피스가 분명 맞는데, 발기를 유발하고 있었다.

"나 문 앞에서 기다려 준 거야? 가까이서 기다리지."

그래도 되는데..., 말을 그렇게 하면서 몸을 살짝 숙인다.

내가 쭈그려 앉아 있어서 눈높이를 맞추는 동작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중력 때문에 원피스가 벌어지고 그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났다.

'하얀색...'

속옷은 하얀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꽃이 수놓아진 무늬가 있었는데, 저번에 봤을 때랑은 차원이 달랐다.

이게 수진이 나름의 승부 속옷일까.

"어떻게 그래요, 변태로 오해 받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두..."

데이트할 상대를 계속 이렇게 길거리에 두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벌떡 일어났다.

"선배, 밥 먹고 나서 저랑 백화점에서 쇼핑 하면 안 돼요? 저 옷을 사야 해서..."

"그럴까? 그러면 내가 옷 골라줘도 돼?"

"아, 그럼요. 저야 감사하죠."

"그럼 밥부터 먹자."

여자가 옷을 골라준다면 오히려 좋았다.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여자가 좋아할 만한 옷으로 알아서 코디가 될 테니까.

"아... 그리고 태양아."

"네?"

"누나라고 불러도 돼."

그게 나름 과감한 발언이었는지 귀가 빨개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부끄러워하는 지... 정말로 귀여웠다.

다른 여자는 섹스하고 난 뒤에 자위 영상까지 보내는 데...

극과 극을 맛 봐서 그럴까? 수진이가 더 순수해 보였다. 지켜 주진 못 했지만 잘해주긴 해야겠다.

"가자, 내가 식당 예약해 놨어."

"네 누나"

누나라고 부르자마자 배시시 웃는 것까지 완벽한 합격이었다.

+++++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수없이 많은 책들로 가득한 공간, 그중에 가장 커다란 책이 펼쳐져 있었다.

책 표지에 <아카데미 순애일지="">라고 써져 있었는데, 책 크기가 사람 하나는 쉽게 삼킬 정도였다,

"글이...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아..."

안경을 쓴 뚱뚱한 남자는 깃펜으로 글자를 계속 써 내려 갔지만 제대로 써지는 글자는 얼마 없었다.

잉크도 제대로 묻어 있었는데, 펜이 책 위에 글자를 쓰면 글자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백태양...그놈이 문제야..."

등장 시킬 예정도 없던 놈이 등장했다.

"수정... 수정 해야 해..."

과감한 전개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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