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오염된 기운으로 생긴 던전이 아니기에 황궁에서 일하는 세비스가 던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걸지도. 오염된 건 아니라도 던전은 던전. 히든 던전의 몬스터를 물리친다면 레벨 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혹시나, 히든 던전인 만큼 일반 던전보다 더 큰 보상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냥은 안 열릴 것 같은데. 우라엘한테 치근덕거려야 열리는 거 아닌가?’
우라엘 황태자는 호수에 개 같은 괴물이 살고 있단 걸 알고 있을까. 실비아는 목을 가다듬고는 앞서가는 황태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우라엘 황태자 저하.”
“…왜?”
우라엘이 우뚝 멈춰서더니 고개만 살짝 돌려 실비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미소지은 뒤 호숫가를 가리켰다.
“호수 표면이 어쩐지 좀 수상하게 흔들리는 것 같아요. 황궁 안에는 신비한 마법 장치가 많다고 들었는데, 혹시 호수에도 마법이 걸려있는 건가요?”
“흐음, 잘 모르겠는데.”
우라엘은 무심한 눈길로 호수를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저런 태평한…. 황태자가 모르면 누가 알아. 너한테 손 한번 댔다가 ‘오후 네시’의 간식거리가 됐다고!‘
우라엘 황태자 등 뒤에서 몰래 이를 드러내며 성질낸 실비아는 그가 갑자기 뒤도는 바람에 급히 표정을 풀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군요. 기분 탓인가 봐요.”
“…기분 탓은 아닐 수도 있지. 내가 모르는 황궁의 보호 마법이 많은 걸로 알아. 그 마법들은 황족이 위험에 처할 시 작동하지.”
“허허, 심지어 많다고요.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엘리셔스 황궁이군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우라엘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더니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지?”
“네?”
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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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여하에 따라 데드 엔딩 <첩자, 단두대의 이슬이 되다>로 진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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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발, 완전 지뢰밭이 따로 없네. 또 데드 엔딩이야? 뭐라고 답한담?’
웹소설에서라면 여주를 첩자로 의심하는 남주, 꽤 긴장감 있고 무슨 일 날 것처럼 보여 꿀잼일 터였다. 그렇지만 이 게임에선 긴장감이고 개뿔이고 개죽음 엔딩이 기다릴 뿐이었다. 실비아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자 늘 그렇듯이 선택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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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사악한 미소를 곁들이며.)
2. 오해하지 마세요. 마법에 관심이 많을 뿐이랍니다.
3. 하핫, 그런 건 왜 물어보냐니요. 우라엘 저하의 전화번호를 물어볼 순 없잖아요? (윙크하며 능글맞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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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한 번 삐끗했다간 바로 단두대행이겠는 걸.’
실비아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1번은 누가 봐도 나 첩자라고 하는 것 같은 데다가 무척 건방진 대답이었다. 첩자로 내몰려 죽거나 그게 아니면 황족 모독죄로 죽을 것 같았다. 볼 것도 없이 기각이고, 2번은 애매하지만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다. 3번은 너무 구려서 10년째 졸업 못 한 복학생도 질색할 것 같은 멘트였다.
‘뭐야, 근데 왜 계속 구린 선택지를 주는 거야? 화술도 이미 빵빵하게 올렸구만!’
속으로 투덜대자 시스템이 그녀의 의문에 바로 답하듯 메시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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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 진행될수록 더 고급 화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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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구나. 어쩐지 거지 같은 선택지가 섞여 나온다 싶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바닷가 마을에서 화술을 충분히 올렸다고 생각해 그 후로 화술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까. 수도로 올라온 데다가 황궁에서 일하게 됐으니 그에 걸맞는 고급 화술이 필요할 터. 그럼 여기선 어떻게 화술을 쌓아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는 우선 선택지부터 고르고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2번을 선택하겠어.’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오해하지 마세요. 마법에 관심이 많을 뿐이랍니다. 정말로요!”
저절로 나온 말 뒤에 덧붙여 강조까지 하자 우라엘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의심을 거두지 않는 그 모습에 서러움이 울컥 솟아올랐지만 일단 살아야 다음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급히 말을 이어갔다.
“마법은 제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니까요. 물론 던전에서 얻은 스킬들 덕에 약간의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게 됐지만 아무래도 마법에 비해선 한참 못 미치죠. 단지 호기심 때문….”
“됐어. 길게 말할 것까진 없다. 오해도 한 적 없어.”
‘잔뜩 오해했잖아. 방금 뜬 데드 엔딩은 뭔데.’
할 말이 많았지만, 목숨은 한 개뿐이니 일단 참기로 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 뒤돈 황태자는 몇 걸음 안 가 우뚝 멈춰 섰다.
뭔 소리를 또 하려고. 실비아가 경계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찰나 우라엘이 그녀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혹여나 밀정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내 사람으로 만들면 그만이니까.”
“네? 어머…. 아녀요. 저는 그런 거 절대 아닌데, 아휴, 참.”
준비 없이 훅 들어오는 말에 실비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뭐야, 그런 애매한 말을 하면 나 설렌다고.
그녀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겨우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뇌세포들이 잔칫상을 차리느라 분주했다. 미소를 지으며 설레는 말을 건네는 우라엘 황태자라니, 이것 참 귀했다.
쟤는 뭘 알고 말하는 건지 모르고 말하는 건지. 칫, 내 사람이 뭔데? 이것저것 다 하는 깊은 사이의 내 사람 말하는 거야, 혹시? 아이, 몰라!
원래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이 유독 짜릿한 법. 데드 엔딩 지뢰밭 한가운데에서 잘생긴 우라엘이 설레는 멘트를 던지니 유독 심장이 더 벌렁거렸다. 이, 이게 혹시 사랑? 극한의 공포심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인지 뭔지를 겪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일단 설레면 장땡이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우라엘 황태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귀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살짝 발그레했다.
실비아는 여전히 야단법석인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뒤따랐다. 뒤에서 지켜보던 림보가 중증이라는 듯 콧방귀를 꼈다. 그러든지 말든지 실비아의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다. 우라엘이 처음으로 저를 보고 웃어줬다!
비록 개수작 부리다가 ‘오후 네시’의 한 입 거리가 되는 데드 엔딩도 겪고, 방금도 첩자로 의심을 사 황천길 앞까지 걸어갔다가 왔지만, 덕분에 우라엘의 미소를 얻었으면 괜찮다 싶었다.
남은 산책길, 실비아는 우라엘 황태자와 여러 가지 사소한 대화를 하며 친분을 쌓았다. 황태자는 미소를 한번 지어준 뒤로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산책 전과는 달리 실비아의 헛소리에도 곧잘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렇게 산책 시간은 사소한 사망 사건을 제외하곤 아주 평화롭게 흘러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퇴근할 때가 됐다. 그녀는 훈련장의 헝겊 인형을 주말 내내 빌리기로 했다. 주중에만 두들겨 패다간 어느 세월에 할당량을 다 채울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데이와 샤이는 흔쾌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불가피하게 배달비 5천 골드가 소요된 건 슬픈 일이었지만.
‘수도 물가가 장난이 아니네. 배달 마차의 황궁 출입 비용이 추가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소지금이 충분했기에 망정이지, 거렁뱅이로 지내던 시절에 이런 지출을 했다면 바로 파산이었다. 헝겊 인형을 실은 마부에게 또 다른 추가금이 없음을 재차 확인한 실비아는 마차를 보내곤 뒤돌았다.
퇴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저녁의 약속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휴우, 웬만하면 둘이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이미 약속을 정해버린 거 어쩔 수 없지.’
실비아는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다다른 그녀가 단지 내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낯선 손길이 어깨를 두드렸다. 깜짝 놀란 실비아는 경계태세를 갖추며 뒤돌았다.
“뭐야!”
“나야, 실비아. 왜 이렇게 놀라?”
블루였다. 그는 가을 날씨에 안 맞는 도사 같은 옷을 걸친 상태였다. 바바리코트를 입고도 추워하는 행인들과 달리, 그는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와, 블루야. 넌 하나도 안 추워?”
“응? 아, 드래곤 가죽이 얼마나 두꺼운데, 하나도 안 추워.”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한 뒤 소매를 걷어 닭살 없이 매끈한 팔뚝을 보여 주었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자마자 실비아의 입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며칠 전의 자극적인 ‘기사와 하녀’ 역할극을 떠올린 몸이 쌀쌀한 날씨에도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참, 먹음직스러운 몸이란 말이지. 세비스한테 대충 소개해준 뒤 어디 아늑한 장소를 찾아서 실컷 해야겠어.’
그녀는 음흉한 눈빛으로 블루의 몸을 훑은 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 변태 같은 표정을 동네 주민들이 목격할까 봐서였다. 아니면 세비스라거나. 다행히 아는 얼굴은 없었기에 그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단지 앞에 있는 벤치로 블루를 데려간 실비아는 그를 자리에 앉힌 뒤 당부했다.
“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혹시나 사고 치지 말고!”
“에이, 사고는 퍼랭이가 치지 나는 안 쳐. 난 이제 인간세계를 너무 잘 아는걸?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 정도야 아주 잘 안다구.”
블루는 검지를 까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런가? 실비아는 이마를 긁적거렸다. 하긴, 저번에 역할극을 할 때 보니까 웬만한 사람보다 상식이 풍부한 것 같긴 했다. 살짝 이상한 쪽의 상식이 풍부해진 것 같긴 하지만….
블루는 벤치에 앉아서 맑은 감색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