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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67화 (367/372)

367화

“황태자 저하, 저 이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까는 너무 오래 쭈그려 앉아서 다리에 쥐가 왔었나 봐요.”

“…괜찮다니 다행이군.”

꼬았던 다리를 푼 황태자는 기품있게 일어났다. 그는 포리쉐의 고삐를 잡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흙투성이 몰골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세상에, 혹시나 치마가 더러워진 저를 위해서 손수건이라도 건넬 줄 알았건만, 완전한 오판이었다. 그녀는 포리쉐용 고급 손수건을 꺼내다가 고개를 젓곤 풀떼기를 대충 뜯어서 치마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 살벌한 황궁 법도상 포리쉐가 쓸 손수건을 일개 사용인이 함부로 썼다간 어떤 사단이 일어날지 몰랐다.

‘휴, 로판 여주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남주한테 무시당한 데다가 흙투성이라니…. 아차, 난 로판 여주가 아니지. 망할 노점 게임에 빙의 된 플레이어일 뿐. 후후, 황태자가 남주라서 잠시 착각할 뻔했지 뭐람. 이곳이 망할 노점 게임 속이란 걸…!’

그랬다. 빙의에도 급이 있다면 실비아는 최하급 빙의 인생이었다. 로판에 빙의된 여주들은 파티장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차를 마시거나 잘생긴 남주의 집착에 시달리며 몇억짜리 드레스 자락에 눈물 자국을 만드는 게 일상이었다.

반면에 실비아는 시작부터 거렁뱅이 옷을 입었으며, 다단계 행사장에서 연설도 하고, 심지어 새우잡이 배도 탔으며, 남주들한테 찝쩍대다가 틈만 나면 죽었다.

그런 비참한 과거를 잊고 황궁에 왔다고 로판 여주라도 된 양 들떴다니! 현실은 시궁창인데 말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제발 집착남한테 시달리는 후회물 여주가 되길. 실비아가 제 신세를 한탄하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하도 체념했더니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우라엘 황태자는 앞을 보며 걸어가다가 정체 모를 싸늘한 기운에 흠칫했다. 날씨가 쌀쌀해지긴 했나 본데. 그는 무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었지만, 속으론 실비아의 조금 전 행동을 곱씹는 중이었다.

‘도와줬어야 하는 건가. 근데 왜?’

바다를 닮은 푸른색 눈이 일렁였다. 저 사용인은 일반인이 아니라 던전 공략자 출신이다. 몬스터 공략 중에 저런 식으로 일어나지 못한다면 더 볼 것도 없이 사망이었다. 다시 벌떡 일어난 걸 보면 치명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일으켜 달라며 도움을 청했을까.

우라엘의 생각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실비아의 행동이 그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훈련장에서 화려한 전투 능력을 뽐냈던 그녀가 어째서 넘어지고서 일어나질 못한 걸까. 그의 머릿속엔 그녀가 개수작을 부렸다는 일말의 생각 자체가 없었다. 데이터가 하나라도 쌓여야 비교를 해 보겠건만, 그는 어릴 때부터 과보호 받으며 자랐기에 여성과 교류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외모면 외모, 지위면 지위 어느 것 하나 모자란 게 없는 우라엘 황태자는 단지 주변 환경으로 인해 이성과 대화를 길게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환경이 만든 순도 백 프로의 동정남 우라엘, 그런 그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곁에 두게 된 여자가 실비아였으니, 별난 그녀의 행동을 보고 우라엘이 신선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라엘은 걷다가 잠시 멈칫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뒤에 있는 이상한 사용인이 신경 쓰여서였다. 평소의 그라면 전혀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다.

‘왜 그랬는지 물어볼까.’

하지만 이미 말없이 걸은 지 10분이나 경과했다. 심지어 서로 대화 한마디 없이 말이다. 아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와 물어보기가 좀 망설여졌다.

제가 왜 일개 사용인한테 궁금한 걸 물어보지 못하고 고민하는 걸까.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우라엘 자신도 그 영문을 몰랐다.

그는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척 건너편을 보았다. 호수의 둘레는 현생의 일산 호수공원과 맞먹을 정도로 컸기에 흑기사단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살면서 한 번도 남의 시선을 의식해본 적이 없건만, 유독 조그만 사용인에게 말을 걸 땐 주변 시선이 신경 쓰였다.

우라엘은 우뚝 멈춰서서 뒤돌았다. 그가 갑자기 돌아보자 몇 걸음 뒤에서 걷던 실비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포리쉐를 살피며 불안하게 물었다.

“포, 포리쉐의 말발굽을 닦을갑쇼?”

“…아니. 어차피 계속 더러워질 테니 닦을 필요 없어.”

저건 또 무슨 이상한 말투지.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가까스로 삼킨 우라엘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소까지는 아니고 그냥 평소보다 덜 차가운 표정으로 입매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하지만 워낙 무표정이 디폴트인 그인지라 조금의 변화가 아주 크게 다가왔다.

‘어머나, 황태자가 표정이 좋은 걸 보니 호감도가 오른 것 아닐까? 아까의 뻘짓이 효과가 있나 봐. 그러고 보니 짐승 두 마리만 빼면 우린 지금 단둘이 산책 중인 거잖아. 이러다가 저 풀숲쯤 가면 할 수 있는 찬스가 생길지도! 왜, 남녀 간의 일은 원래 갑자기 생기는 법이잖아.’

초록빛 눈이 저 멀리 보이는 한적한 풀숲을 보며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실비아의 치명적인 성격적 결함 중 하나는 앞서나가도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진취적인 성격은 득보단 실이 많았다. 의외의 찬스가 생기는 경우는 0.1 프로고 나머지는 데드 엔딩이나 곤란한 일이 발생했으니까.

거기다가 무슨 수모를 당해도 잠시 부들거리다가 금방 잊어버리는 단순함까지 갖췄다. 그런 성격 덕에 이 이상한 게임 세계에서 우울증 걸리지 않고 여주를 해낼 수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우라엘을 먹을 망상에 즐거워진 실비아는 이를 보이며 활짝 미소 지었다. 별짓 안 했는데도 입이 찢어져라 웃는 그녀의 모습에 우라엘의 푸른색 눈이 가늘어졌다.

‘왜 갑자기 웃지? 실성한 건가. 아, 일을 안 해도 된다니까 즐거워하는 거군.’

영문을 알 수 없는 급방긋에 어이없어하던 우라엘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떠올렸다. 그녀의 웃음의 의미를 단단히 착각한 그는 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어갔다.

“굳이 헛수고를 하지 말란 뜻이다. 앞으로도 포리쉐가 불쾌해할 때만 닦아주도록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저하.”

“흠…. 아깐 왜 그랬던 거지?”

머뭇거리던 우라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가 대체 언제지? 내가 걸어가다가 돌멩이를 걷어찬 걸 말하나? 우라엘이 궁금한 건 땅에 넘어진 채 일으켜달라고 한 연유지만, 그 사건은 이미 10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을 도르륵 굴리던 실비아는 돌멩이를 걷어찬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어…. 저하, 아까 전이라면 제가 돌멩이를 걷어찬 것 말씀이시죠? 돌멩이가 발치에 치이길래 걷어찼을 뿐인데, 저하를 신경 쓰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지? 아, 그거 말고. 더 전에 말이야. 내가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뜬금없는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뜨던 우라엘은 답답한 마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꺼냈다.

‘벤치? 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나의 흘러가 버린 개수작….’

실비아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지를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굳이 우라엘이 왜 그랬냐고 묻자 뒤늦게 민망한 마음이 밀려왔다. 대체 이제 와서 이유를 왜 묻는 거야? 당연히 수작질한 거지. 그 정도 눈치도 없냐고. 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 같은 우라엘의 표정에 실비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별수 없이 단골 스킬 중 하나인 모르는 척하기를 시전하기로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뗐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황태자 저하가 벤치에 앉아계실 때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요?”

“본인이 한 일을 본인이 기억 못 해서야. 멀쩡하면서 왜 나한테 일으켜달라고 부탁한 건지 묻는 거다.”

“크흡….”

모른 척도 소용없이 더 구체적인 질문이 돌아왔다. 실비아는 수치스러움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이를 악물며 참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숨고 싶었다. 수작질한 걸 대체 왜 그랬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녀는 주먹을 파르르 떨며 시선을 땅에 고정했다.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넘어졌을 땐 엄청 아팠는데, 막상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바로 일어나지더군요. 중요한 건 의지라는 걸 한 번 더 배우는 계기가 됐네요.”

“그래? 신기하군. 그렇게 잘 일어나지 못하면, 던전은 어떻게 공략한 거지? 살아 돌아온 게 신기할 정도던데.”

질문을 하는 우라엘의 눈은 아주 맑고 청아했다. 그러나 원래 순수한 사람이 더 잔인하다던가.

“그건….”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해…. 실비아는 울고 싶어졌다. 개수작 한번 부렸다가 이리 집요하게 추궁을 당할 줄이야. 정말 궁금한 거 맞아? 그냥 나에게 수치를 주고 싶은 고도의 귀족 화법 그런 거 아닐까….

정신이 아득해진 그녀는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채 동태눈깔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던전 공략할 때는 물론 절실한 마음으로 합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정신을 좀 놓고 다녀서요. 후우, 치열한 던전 공략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아아, 어쩐지. 이제야 알 것 같군.”

우라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턱을 쓸었다. 정신을 놓고 다닌다는 말에 모든 의문이 명쾌하게 해결된 기색이었다. 뭐야,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 될 대로 되라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던 그녀지만 막상 우라엘이 수긍하는 표정이자 기분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이미 수치플을 잔뜩 당한 뒤이기에 뭐라 정정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

실비아는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포리쉐의 갈기를 빗으로 정돈했다. 수작이고 개뿔이고 당장은 임무에나 충실하자 싶었다. 가만히 있기엔 너무 어색하기도 했고.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우라엘이 말을 걸어왔다.

“평소에 정신을 놓고 다닌다니. 심신미약자는 원래 황궁에서 일할 수 없는데….”

“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비유적으로 그렇다는….”

갑작스러운 우라엘의 말에 놀란 실비아가 변명을 내뱉으며 뒤돌았다. 그리고 더 놀라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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