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응? 누가 내 욕하나.’
실비아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이상하게 귓구멍이 간지러웠다.
‘그래, 내 욕할 사람이 은근히 많긴 하지. 죄를 좀 많이 짓고 살았어야지.’
그녀는 바닷가 마을에서 림보를 타고 가다가 뺑소니를 치고 지나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이제야 병원에서 의식을 차린 걸까? 아니면 꿀밤을 제대로 먹인 문신 뚱땡이가 그녀를 신랄하게 까고 있는 걸지도.
‘욕먹을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짐작하기가 어렵네.’
머쓱하게 코를 긁적인 실비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호수에 반사된 밝은 햇살이 황태자의 옆얼굴을 찬란하게 비췄다. 하얀 제복을 걸친 그의 뒷모습은 결 좋은 은발 머리와 어우러져 감탄사를 절로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당장의 감회로는 차마 제가 먹지 못할 먼 세계의 존재로만 느껴졌다. 물론 준다면 감사히 먹겠지만….
실비아의 음흉한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던 걸까. 황태자는 햇살이 내리쬐는 옆이 아닌 제 등에 손을 뻗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얼른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지. 개수작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 같은데!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곤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았다. 꽤 걸은 건지, 흑기사들이 검은 점처럼 멀리 보였다. 황태자 공략의 제일 큰 난관이 실비아의 목에 틈만 나면 검을 들이대는 흑기사들이 아니던가! 지금의 상황은 생쥐 앞에 치즈를 둔 채 쥐덫을 치워버린 형국이었다.
잠시 치워뒀던 음란 마귀 세포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태자를 끈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뒤탈 없이 개수작을 부릴 수 있을까? 그동안의 공략 경험을 떠올려보면 남주들의 호감도는 몸이 가까워질수록 올라갔었다.
‘이건 게임 공략을 위해서야. 나쁜 뜻은 없다고. 개수작 두뇌 풀가동!’
음험함을 가득 품은 초록빛 눈이 주위를 훑었다. 그녀의 맘을 알아차렸는지 오랜만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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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날로 후두부를 가격해 우라엘 황태자를 기절시킨 뒤 숲으로 끌고 간다.
2. ‘날이 참 좋지 않냐’라며 스몰 토크를 시도한다.
3. 대차게 넘어지면서 연약함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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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이 하나 숨어있군.’
선택지를 본 실비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선택하는 순간 범죄자가 될 1번은 당연히 패스였다. 화술이 올라서 이상한 선택지는 안 떠오르는 줄 알았더니, 시스템이 장난치는 걸 포기 못 한 모양이었다. 2번은 아주 무난하니 좋지만, 딱히 끌리진 않았다.
3번이 좋겠네. 넘어지는 건 여주의 기본 소양. 클리셰를 오랜만에 활용해야겠어.
3번이라고 속으로 외치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고삐를 놓은 실비아는 돌부리 하나 없는 고른 땅 위에서 할리우드 액션을 시전했다.
꽈당- 소리와 함께 엉치뼈가 잘못되는 소리가 났고,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적당히 연출만 해야지 이렇게 아프면 어떡하냐고! 그러나 실비아는 아픈 와중에도 귀여운 척을 곁들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이코! 실비아 죽네.”
“…….”
황태자가 발걸음을 뚝 멈췄다. 하지만 뒤돌지 않는 걸 보니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그녀는 다시 한번 절절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누가 도와주면 좋을 텐데. 흑흑흑!”
요란한 울부짖음에 우라엘 황태자가 돌아보았다. 산책 동행자가 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호수보다 더 고요했다.
대차게 넘어진 실비아에게 시선이 닿기도 잠시, 그는 포리쉐와 실비아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포리쉐는 무사하군.”
“네?”
넘어진 저보다 가만히 서 있는 포리쉐의 안위를 더 걱정하다니. 기가 막힌 실비아가 되묻자 황태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거기 앉아서 뭐 하는 거지? 멀쩡해 보이는데.”
“너무 아픕니다, 저하.”
실비아가 물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며 찡찡거렸지만, 그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팔짱을 낀 채 눈을 잠시 위로 굴린 황태자가 다시 입술을 뗐다.
“그럼 괜찮아질 때까지 앉아있도록 해.”
“네? 아, 네에….”
정말 가랑이가 저절로 차가워지는 해결책이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어이없어진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든 말든 황태자는 호숫가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그녀가 멀뚱히 바라보자 우라엘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내뱉었다.
“널 기다리는 게 아냐. 여긴 내가 즐겨 앉는 자리거든.”
“…그렇군요. 정말이네요, 저하. 이곳에선 호수가 한눈에 보이네요.”
애써 맞장구를 친 실비아는 진흙으로 더러워진 제 시녀복을 내려다봤다. 옷도 더러워졌는데 아무 소득이 없다니, 정말 속이 뒤집힐 정도로 원통했다.
‘차라리 2번을 선택할걸. 아니지. 그냥 1번을 해서…. 데드 엔딩이고 뭐고 한번 손이나 대볼 걸 그랬나. 으휴, 그건 아니지. 게임 장르가 피폐물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게임은 19치곤 너무 건전하고 밝기에 범죄를 저지를 순 없었다. 실비아는 아쉬움에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은 우라엘 황태자는 실비아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흥미롭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왜 흙바닥에 앉아있는 걸까. 음, 하여튼 특이한 여자야.’
애석하게도 황태자는 이런 식으로 수작 거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실비아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못했다. 잘못 수작걸었다간 손모가지가 날아가기에, 감히 황태자한테 허튼짓을 하는 여성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의 눈에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생기가 떠올랐다. 조그만 사용인의 행동이 신기해서였다.
실비아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아쉽게도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낙담한 채 흙바닥에서 뭉개고 있던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황태자 눈치를 봤다. 그러곤 주춤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는 생쇼를 펼쳤다.
그녀는 황태자 귀에 들어갈 만큼 큰소리로 칭얼거렸다.
“으윽, 일어나야 하는데, 안 돼…. 다리에 힘이 없어.”
“그래? 그럼 좀 더 앉아 있도록 해. 그 정도 아량은 베풀 수 있으니까.”
“아, 예. 기다려 주셔서 금사, 합니다, 황태자 저하.”
실비아는 이를 악물며 가까스로 감사를 표했다. 어쩜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아니지. 그냥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우라엘의 무심한 행동이 이해가 됐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하는 법.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적극성을 발휘하기로 했다. 우라엘이 눈치채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대놓고 도움을 요청하기로. 시녀 신분으로 황태자한테 도와달라고 말한다니, 게임 속 사람이 아닌 플레이어라서 가능한 미친 생각이었다.
“우라엘 저하….”
“?”
실비아가 나지막이 우라엘을 부르자 그의 눈이 실비아에게 향했다. 천천히 심호흡한 그녀는 손을 내밀며 눈썹을 처량하게 내렸다.
“도저히 혼자서는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뭐? 지금…. 나보고 도와달라고 한 건가?”
그녀의 요청에 우라엘은 물론 옆에서 풀을 뜯고 있던 포리쉐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께 풀을 뜯던 림보도 ‘너 그거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림보가 고개를 정신없이 휘젓더니 땅바닥에 철퍼덕 누워 죽는 시늉을 했다. 그의 황당한 제스처에 실비아가 순간 눈을 부라리며 눈치를 줬다.
‘저놈의 말 자식. 본인 연애 사업이나 잘할 것이지, 뭘 안다고 저런 행동을 한담.’
그녀의 흉흉한 눈빛에 림보가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마저 림보를 째려본 실비아는 다시 갸륵한 미소를 지으며 황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에 사람이라곤 황태자 저하밖에 없으니까요. 포리쉐와 림보가 저를 도와줄 순 없는 노릇이고…. 안 될, 안 되겠죠?”
초롱초롱하던 초록빛 눈은 우라엘 황태자의 미간이 좁아질수록 점점 빛을 잃어갔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은 것 같은 우라엘의 표정이 그녀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설마 무리수를 던진 걸까. 일개 사용인이 황태자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그래도, 분명히 현생에서 읽었던 수많은 로판 웹소설에서는 차고 넘치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으니, 여기는 철벽남들만 가득한 망할 놈의 게임 세계. 그녀의 뜻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황태자는 팔짱을 낀 채 실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따사로운 햇빛이 반사된 하얀 얼굴엔 범접하기 힘든 귀티가 흘렀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반듯하니 예쁘고 붉은 입술 사이로 보이는 고른 이는 그랜드 피아노 저리 가라 수준으로 가지런했다.
저게 사람이야, 조각상이야. 잠시 멍해져 있던 그녀의 귓가에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것이다.
그 헛웃음에 놀란 실비아는 방금 전까지 아프다고 해놓고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림보가 풉-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우라엘 황태자는 갑자기 일어난 그녀를 보며 입을 멍하니 벌렸다. 황당하단 표정이 역력했다.
어쩌겠나, 계속 개수작 부리기엔 황궁은 너무 살벌한 곳이었다. 바로 반응이 안 오니까 겁나기도 하고. 얼른 게임부터 저장한 그녀는 진흙 묻은 하녀복을 털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우, 이거! 일어나니까 멀쩡하네.”
“왜 도와달라고 한 거지….”
황태자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클리셰는 무슨 얼어 죽을. 두 달 동안 시스템의 숱한 농락에 당해놓고 그딴 걸 기대한 제가 미친 여자였다. 우라엘의 심각한 표정에 지레 겁먹은 실비아는 없어 보이게 상황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