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계속 거짓말을 하려니 손에서 땀이 났다. 아! 차라리 다른 변명을 댈걸. 은둔 고수를 만나서 익혔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제발 그만 좀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실비아는 최대한 영업용 미소를 유지하며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다른 애들은 적당히 둘러대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던데, 우라엘 황태자는 달랐다. 황궁에 살아서 보고 듣는 게 많아서 그런지 이해되지 않는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는 실비아의 대답을 듣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대체 뭘 또 물어보려고 그러는 걸까나. 실비아가 굳게 닫힌 입술을 초조하게 바라보는데,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럼…. 그대랑 던전을 가면 좋은 기술이나 무기를 얻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가?”
말이 그렇게 되나. 황태자는 던전에서 기술을 얻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하니, 실비아가 특히 운이 좋은 셈이 된다. 그녀는 대충 넘어가려고 또 이빨을 깠다.
“네? 음, 매번 나오는 게 아니라서 확신은 할 수 없겠네요. 하지만 저하의 말대로 확률이 높아지긴 하겠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음에 그대가 던전을 갈 때 동행하고 싶은데. 실제 전투에선 망치로 어떻게 싸우는지 궁금해.”
우라엘 황태자의 말에 옆에서 대기 중이던 흑기사 단장이 화들짝 놀라더니 허리를 숙였다.
“저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저하께서 오염된 던전으로 들어가신다니요.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흑기사 단장의 절절한 만류에 우라엘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팔짱을 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최근 주변국은 물론 제국의 국경지대에 오염된 던전이 전보다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 있다고 들었어.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제국의 황태자로서 비겁하게 숨어있을 순 없지.”
“저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던전에 들어갔다가 귀한 몸이 상하기라도 하신다면 두 분 폐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하아.”
기사의 간언에 황태자가 깊은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제 상황이 답답해서였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실비아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우라엘 황태자는 어차피 실비아와 던전을 함께 갈 운명이었다. 공략이 무사히만 된다면, 혹은 공략 과정으로 던전을 가게 될 운명. 그게 언제가 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남주들과의 추억을 더듬어보면 각자 던전을 가는 시기가 달랐으니까.
그러니 기사는 소용없는 간언을 하는 셈이었다. 저래봤자 어차피 갈 텐데 시간 아깝게 대화하고 있어…. 심드렁하던 실비아는 번뜩 떠오르는 불길한 가정에 표정을 굳혔다.
설마, 던전 공략할 때 흑기사들이 따라오진 않겠지? 아니, 웬만하면 따라오겠는데 이거. 일국의 황태자가 위험지역으로 가는데 달랑 전사 한 명만 붙인 채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저 금붕어 똥 같은 7인의 흑기사를 떼어놓고 우라엘과 단둘이 던전을 갈 수 있을까. 둘이서 가야 야외플, 풍차돌리기, 채찍질 등등 이것저것을 할 텐데 말이지.
한참 후의 일이지만 기사들과 함께 간다면 더없이 건전한 던전 여행이 될 것이다. 눈치 없이 따라온 세비스 때문에 건전하기 짝이 없었던 첫 던전 공략을 떠올린 실비아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힐끗 본 우라엘 황태자가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에겐 충분한 실력이 있지.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니란 소리야.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저하…!”
“준비는 철저하게 할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
흑기사가 당황이 역력하게 서린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으나 그의 태도는 완강했다. 뭐라고 더 말할 듯하던 흑기사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다물었다.
우라엘 황태자가 평소와 달리 길게 말하는 걸로 미뤄보아 뜻을 굽히긴 힘들어 보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보고드리는 일 말곤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던전 공략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 같네. 기왕지사 단둘이서 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어.’
실비아는 음흉한 속을 최대한 감추곤 순진한 눈망울을 꾸며냈다. 그녀는 호수의 물보다 맑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황태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순간 눈을 마주쳤던 황태자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호수로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실비아, 던전 공략 준비를 도와줬으면 해. 나는 그대에게 무기를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것 같은데.”
“손해라뇨, 가문의 영광입니다, 저하.”
흑기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실비아를 싸늘하게 바라봤다.
‘저 하찮은 사용인 때문인가? 저 여자와 함께 있고 싶으셔서? 설마, 눈이 번쩍할 정도의 미인들을 봐도 감흥이 없으셨던 분인데…. 성인이 되셨으니 대외적으로 입지를 높이시려는 거겠지. 저하께서는 제1 황위 계승자이시긴 하지만, 황위를 잇기엔 유약하다는 평가를 듣고 계시니까.’
우라엘 황태자는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데다가, 어릴 때 암살위협을 받은 적이 있기에 어딜 가나 과보호 받았다.
그 탓에 일각에서는 황태자가 황위를 잇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황태자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라엘 황태자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증명하려는 것일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저 덜렁거리는 사용인 때문이라니, 훌륭한 가문의 아름다운 영애들을 다 제쳐두고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혹시 모르니 이 사안도 황후 폐하께 보고해 둬야겠어. 우라엘 황태자 저하의 심미안이 잘못됐을 리는 없겠지만….’
옆에 선 흑기사가 흉흉한 눈빛을 보내는 것도 모른 채, 실비아의 입엔 함박웃음이 걸렸다. 아직 우라엘의 던전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던전 입장권을 얻는 것도 조만간일 터였다.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우라엘에게 말을 걸었다.
“황태자 저하. 그럼 앞으로 개인 훈련 외에도 자주 뵙게 되는 건가요?”
“자주? 시간 날 때 부를 테니 넌 포리쉐를 돌보는 데 집중해.”
떼잉. 그럼 그렇지. 선을 긋는 듯한 황태자의 대답에 실비아의 속이 팍 상해버렸다. 시간 날 때 부른다니, 내 시간은? 난 뭐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
어차피 황태자궁 소속에 있는 한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단 건 알고 있지만,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황태자로선 당연한 소리를 한 거지만, 신분제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기분이 영 별로였다.
하지만 티를 냈다간 가차 없이 모가지가 날아간다. 실비아는 고분고분한 척 답했다.
“네. 저하, 부르시는 날만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호숫가를 산책해야겠어.”
갑자기 몸을 돌린 황태자가 발걸음을 옮기자 실비아는 포리쉐의 고삐를 쥐고 뒤따랐다. 림보는 알아서 포리쉐 뒤를 졸졸 쫓아왔기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뒤따라 움직이려던 흑기사들을 돌아본 황태자가 평이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굳이 여기까지 따라올 필요 없어. 주변을 지켜라.”
“…하명을 받잡겠습니다, 저하.”
멈칫하던 흑기사 단장이 예의를 갖춰 대답하자 실비아도 우뚝 멈춰 섰다. 포리쉐와 단둘이 아늑한 산책을 즐기고 싶단 뜻인가? 그녀는 고삐를 쥔 제 손을 꼼지락거리다 말을 내뱉었다.
“저하, 그럼 저도 여기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포리쉐 고삐….”
“너는 따라와야지. 설마 포리쉐 시중을 나보고 들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는 어이없다는 듯 반듯한 눈매를 찌푸렸다. 하긴, 포리쉐가 좀 까다로워야 말이지. 분명히 호숫가를 한 바퀴 돌기도 전에 이것저것 해달라고 칭얼댈 터였다.
그래도 그렇지, 좀 예쁘게 말하면 어디 덧나나. 실비아는 군말 없이 고삐 쥔 손을 다시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앞에서 걷고 포리쉐와 고삐를 쥔 실비아가 뒤에서 쫓아가고, 그 뒤를 또 림보가 따라갔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흑기사 단장은 나머지 기사들을 돌아보며 주의를 줬다.
“오늘 본 것에 대해 다들 함구하라. 헛소문이 퍼진다면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7인의 흑기사들은 우라엘 황태자를 10년 넘게 호위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침묵한 채 서로 눈빛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 중이었다. 처음으로 그들을 떼놓으려 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충격받은 것이다.
성인이 되셨기에 과한 호위는 부담스럽다고 여기시는 걸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단장의 ‘오늘 본 것에 대해 함구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짐작이 갔다.
황태자가 평민 사용인에게 관심이 있다니. 갓 성인이 된 우라엘 황태자 앞으로 제국의 유력가문과 다른 나라에서 보내온 혼담이 하루에도 기백 통 가까이 됐다. 우라엘 황태자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장본인만 알겠지만, 포리쉐 돌보미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확실히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과 달랐다.
저 꺼벙한 사용인은 우라엘 황태자를 본 지 얼마 안 된 탓에 그가 얼마나 특별대우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여러모로 특이한 인간이라 가지는 관심일 수도 있지만, 황태자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평민 여성에겐 위험한 상황이었다.
황태자는 그 스스로 꽤 강한 힘을 지닌 데다가 황궁의 보호 마법과 호위 기사들이 지켜주기에 안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던전 공략자 출신이라고 해도 출퇴근하는 저 사용인은….
흑기사단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까진 소문을 퍼트릴 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억측을 지어내 퍼트릴지도 모르니 주의시킨 것이다. 그는 제 걱정이 과한 것이길 바랐다. 단지 이상한 사람을 처음 본 저하의 호기심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