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우라엘 황태자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앞머리를 쓸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척하면 척인 측근들에 비해 계속 입을 열게 만드는 조그만 사용인이 피곤해서였다.
무척 성가시고 거슬리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진 않았다.
실비아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우라엘이 만난 어떤 사람보다 그의 기를 빨리게 하는 이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두리번거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면 불안해한다고 해서 행동이 침착한 것도 아니었다. 한 박자 느리게 인사를 한다거나, 툭 하면 허둥대는 모습이 꼭 그랬다.
‘나한테 말도 없이 훈련장 기사들과 놀았었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인물은 위험하다. 원래라면 이런 성가신 사람은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게 우라엘의 신조였다. 그러나 묘하게 그 모습이 밉지 않고 계속 눈이 가는 건 왜일까.
‘신기해서.’
우라엘은 제 생각의 이유를 찾아낸 뒤 실소를 흘렸다. 제 앞에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산만하게 구는 사용인은 처음 봐서 그럴 터였다. 황태자의 미세한 표정 변화에 흑기사단의 리더가 낮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하.”
“아무것도 아냐.”
짧게 대답한 우라엘의 시선이 실비아에게 향했다. 다들 저를 바라보고 있는데 저 사용인만 또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저 여잔 정말 이상해. 다들 내 표정, 내 행동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피는데…. 봐, 지금도 저 여자만 멍하잖아.’
그가 노려보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사용인의 눈은 갈색 말에 고정됐다. 이 정도로 쳐다보면 시선이 따갑다고 느낄 만도 할 텐데, 둔하기도 엄청 둔했다. 진짜 뭐야. 황태자인 제 입술이 살짝만 열려도 주변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데, 저 사용인은 늘 혼자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 분명히 말에 타라고 고개를 끄덕여줬음에도 못 알아들은 것처럼 정신을 놓고 있지 않나. 엘리셔스 월드 인턴 출신인 걸로 아는데, 그 정도면 무척 똑똑한 인재가 분명했다. 하지만 공부 머리만 있고 일머리는 없는 모양이었다.
설마 제국 출신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해해줄 수도 있었다.
화나기에 앞서 궁금증이 일어난 우라엘의 입술이 충동적으로 벌어졌다.
“너. 제국 출신이 아닌가?”
“…….”
황태자의 질문에도 실비아가 묵묵부답이자 흑기사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분부만 내리면 무례한 사용인을 당장 요절낼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마구간에 감돌았다.
‘응? 이게 무슨 살벌한 소리지?’
검집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실비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녀는 말을 타지 못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는 중이었다.
기껏 반려마를 돌볼 줄 안다는 이유로 포리쉐 돌보미라는 직함을 얻었건만, 말을 탈 줄 모른다고 하면 직무가 변경될지도 몰랐다. 던전 공략자 출신이고 황제가 친히 임명한 사용인인 만큼 황궁에서 아예 잘리진 않겠지만, 황태자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림보를 타던 가락이 있으니까, 이 갈색 말도 무난하게 탈 수 있지 않을까?’
얘는 난폭한 앤가, 탈 만한 앤가. 그 생각을 하며 갈색 말을 째려보느라 정작 우라엘이 저한테 말을 걸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가 아예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도 못했다.
뒤늦게 모두의 시선이 저한테 집중된 걸 알아챈 실비아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불안에 떨었다. 제가 말을 안 타서 모두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녀는 일단 등자에 발을 걸었다. 림보는 승마에 미숙한 그녀를 위해 몸을 기울여주었었지만, 갈색 말은 저 스스로 올라타야 했다. 자칫하면 참수당할까 봐 불안해진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갈색 말에 매달리며 입을 열었다.
“빠, 빨리 타겠습니다, 저하.”
하지만 알아서 몸을 낮춰주는 림보에 익숙해진 탓에 일반마 위에 올라타기가 힘들었다. 갈색 말 옆구리에 붙어 다리를 버둥거리던 실비아는 민망함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으아, 정말 최악이야.’
끔찍한 침묵이 흐르는 상황에서 말 옆구리에 붙어 낑낑거리는 꼴이라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분위기가 이토록 살벌한 이유는 그녀가 우라엘 황태자의 말을 씹었기 때문이지만, 패닉 상태가 된 그녀가 영문을 알 리가 없었다.
“으앗!”
결국, 서두르던 실비아는 말 위에서 떨어졌다. 차분한 상황에서라면 어떻게든 올라탈 수 있었겠지만, 숨이 턱 막히는 분위기에 당황한 나머지 발을 헛디딘 것이다.
대차게 넘어진 그녀는 아파할 틈도 없이 재빠르게 일어났다. 여기서 누가 일으켜주길 기대하다간 정말로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원래 타던 말이 아니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하….”
우라엘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숨을 흘렸다. 그 한숨 한 번에 기사가 실비아의 목에 또 검을 들이밀었다.
“허억…!”
말 좀 늦게 탔다고 목이 날아가는 거야? 뭐 이런 거지 같은 곳이 다 있지. 실비아가 울상을 짓는데, 우라엘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사가 즉각 검을 거뒀다.
우라엘 덕분에 살았지만, 실비아는 기쁘지 않았다. 제 목숨이 남주의 행동 하나하나에 왔다 갔다 하는 꼴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말이 나온다 쳐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피고 있자니 황태자가 포리쉐의 등에 가뿐하게 올라탔다. 그는 실비아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반려마를 키웠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저하. 죽을 죄를 졌습니다. 반려마를 키운 건 사실입니다만,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그 말이 외제마였습니다. 저하도 익히 아시다시피 외제마는 자율주행이 가능하지요. 그 영특한 것이 승마를 할 줄 모르는 저를 배려해 늘 몸을 숙여주었기에 일반마는 전혀 타지 못합니다.”
실비아는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읍소하듯 외쳤다. 죽을 위기가 닥치자 티비에서 본 사극 드라마의 죄인이 저절로 생각났다. 본적 없는 리액션에 당황한 우라엘이 눈치를 주자 기사들이 그녀를 양옆에서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보고 있어 상황 파악을 못한 실비아는 기사들이 저를 지하 감옥에 데려가려는 줄 알고 절망했다.
‘시발! 말 좀 못 탄다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경우가 어딨어. 심지어 바닥에 엎어져서 절절히 이유도 설명했건만, 이런 식으로 나를 내친다고? 가만 안 둬 우라엘!’
지하 감옥에 가는 엔딩을 맞이하면 <엔딩 회귀권>을 써 돌아오고 말 테다. 그리고 저세상 매운맛으로 우라엘 너를 혹독하게 단련시켜 주지. 그 누구보다 처참하게! 그때 가서 울고 빌어도 소용없다고! 단단히 착각한 실비아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기사들은 그녀를 끌고 가지 않고 그대로 일으켜 세운 뒤 떨어졌다. 점 찍고 회귀한 악녀처럼 흑화 중이던 실비아는 영문을 몰라 우라엘을 올려다봤다.
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기울였다.
“왜 바닥에 엎드리는 거지? 난 이런 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아.”
“아! 아아! 저하, 정말 감사합니다.”
두 손을 고이 모은 실비아가 감격한 표정으로 우라엘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가는 게 인간적으로 너무 심했지만, 누구라도 시도 때도 없이 목에 칼이 들어온다면 그녀처럼 맛이 갈 터였다.
황태자는 시선을 돌리더니 말을 내뱉었다.
“감사할 필요 없어. 음, 그대의 말대로라면 기껏 말을 타도 금방 굴러떨어지겠군. 반려마가 여기에 없으니까 말이야.”
우라엘의 시선이 포리쉐의 등에 닿았다. 저 이상한 사용인이 없으면 포리쉐를 돌볼 사람이 없어 무척 불편하겠지.
몸집도 조그매서 한 손으로 달랑 들어 올려도 될 정도니, 앞에 태워도 포리쉐가 고생하진 않겠어. 별로 내키진 않지만 시중들 사람이 없으면 곤란하니까….
생각을 마친 그가 입을 달싹거리는데, 그보다 실비아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닙니다, 저하. 사실, 황궁에 제 반려마가 있어요. 림보라고…. 아니, 이름은 모르시겠지만, 잡부로 지내는 누런 외제마 한 마리가 있거든요. 저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 말을 타도 될까요?”
“…반려마가 여기 있다고.”
우라엘의 표정이 무척 떨떠름해졌다. 황태자의 앞자리에 동승할 영광을 주려고 했건만, 반려마가 황궁에 있다고 답할 줄이야. 본인이 방금 얼마나 대단한 기회를 걷어찬 건 줄 알기나 할까?
그의 표정을 림보에 대한 꺼림칙함으로 오해한 실비아는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포리쉐랑도 친한 걸로 압니다. 이미 감시소에서 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고, 얼마 전에 자유 짐승의 몸이 됐거든요…. 혹시! 포리쉐와 림보가 함께 있는 게 불쾌하시다면 저는 여기서 저하와 포리쉐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하께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네 의무는 포리쉐를 돌보는 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실비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뛰어서 따라오라는 건가? 아니면 림보를 데려와도 된단 소리일까.
그녀는 갈피를 못 잡고 어색하게 눈을 굴렸지만, 기사들은 즉각 황태자의 뜻을 알아들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인 뒤 재빠르게 건물 밖으로 뛰어갔다.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자 황태자는 거의 사람을 반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 그녀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공략은 무슨 얼어 죽을. 저 살벌한 눈빛을 봐. 내가 꾸물거려서 기분 잡친 것 같은데.’
그녀의 선입견 때문이 아니라, 황태자는 현재 몹시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말을 계속 꺼내게 만드는 눈앞의 사용인이 거슬렸다. 그뿐만 아니라 이 상황 자체가 불쾌했다. 기껏 저 정신 사나운 사용인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했건만, 반려마가 황궁에 있을 줄이야. 어이가 없었다. 의외로 실비아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건 그의 기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