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편지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은 그녀는 손을 집어넣고 두 개의 편지지를 매만졌다. 노엘과 루카 모두 답장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 다음 편지는 몇 주 뒤에나 볼 수 있을 터였다.
복잡미묘한 심경에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내 맛있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렸다. 솜씨 좋은 세비스가 만든 요리로 거실 가득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실비아가 두 손을 모으며 부엌으로 다가가자 세비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시선이 편지지가 든 불룩한 주머니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실비아 님, 식사 드시러 오세요.”
“와, 엄청 맛있겠다, 잘 먹을게 세비스.”
어젯밤 늑대로 변신한 세비스와 있었던 덕에 그녀의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불타는 고구마 사건으로 잠시 어색해지긴 했지만, 세비스는 몸이 커졌어도 여전히 세비스였다.
그때 같은 상황만 만들지 않으면 별일 없을 거야. 입가에 미소를 띤 실비아는 식사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히잉!”
“어머, 포리쉐. 오늘은 말발굽에 뭘 치렁치렁 달았네? 이거 설마 다이아몬드니? 세상에, 걷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온 세상 호강은 네가 다 누리는 것 같다 얘.”
포리쉐가 몸에 단 것만 팔아도 저택 몇십 채는 매매가 가능할 것 같았다. 출근한 실비아는 늘 하듯이 포리쉐랑 스몰 토크를 나눈 뒤 산책길에 나섰다. 말 앞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굽신거리던 그녀는 우렁찬 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엘리셔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우라엘?!’
과로하는 직장인처럼 동태눈깔이던 초록빛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게 며칠 만에 보는 비싼 얼굴이야. 어느새 코스프레 옷 같은 시녀복에 익숙해진 그녀는 말 꼬랑지를 살랑거리며 뒤돌았다. 은사를 덮어쓴 듯 광채가 도는 은발 머리가 저 멀리서 보였다.
오늘의 우라엘은 평소보다 더 아름다웠다. 새하얀 제복에 번쩍거리는 휘장, 어깨에서 허리까지 가로지르는 푸른 띠가 소름 끼치도록 어울렸다. 그 모든 게 잘생긴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감탄사를 절로 자아냈다.
우라엘 황태자는 허리를 격하게 접으며 인사하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걸음걸이도 어쩜 저렇게 여유롭고 나긋나긋한지.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멍한 눈으로 황태자를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바닥이 보이도록 허리를 팍팍 숙였다. 인사 한번 잘못하면 참수행인 황궁에선 눈깔 단속이 필수였다.
“엘리셔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우라엘 황태자 저하를 뵙습니다!”
“고개 들어.”
명령대로 고개를 들자 우라엘 황태자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흰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저번에 대뜸 손을 잡았다가 민망해진 경험이 있는 실비아는 잠시 모른 척 한 번 더 손을 잡을까 하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음, 이건 뭘 달라는 걸까나.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고삐를 내밀자 우라엘이 받아들었다.
“포리쉐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네? 설마요.”
화들짝 놀란 실비아가 포리쉐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포리쉐의 주둥이가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누굴 죽이려고! 그녀는 얼른 손가락을 써서 말의 주둥이 양 끝을 위로 치켜 올렸다. 그녀의 되먹지 않은 응급처치에 이번엔 우라엘 황태자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으, 뭐라도 하자 빨리. 우라엘이 좀만 더 찌푸리면 저 뒤에 기사들이 내 목을 벨 것 같다고.’
흑기사들은 투구를 쓴지라 표정을 알 순 없었지만, 실비아는 분명 봤다. 우라엘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기사 중 한 명의 검집이 덜그럭거리는 것을. 뭔 놈의 황궁이 이렇게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한지. 실비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포리쉐의 몸뚱이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설 무렵, 그녀는 천만다행으로 포리쉐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알아냈다. 말발굽에 달린 다이아몬드 중 하나가 삐뚤어져 있었다. 그녀는 미니백에서 꺼낸 젤 네일 도구로 달랑거리는 다이아몬드를 바로 한 뒤, 젤 네일 기계에 말발굽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제야 포리쉐의 어긋난 주둥이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숨 돌린 실비아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우라엘을 올려다보았다.
“저하, 포리쉐가 기분 나쁠 만했네요. 이젠 주둥이에 미소가 한가득이랍니다. 웃으니까 정말 미마네요, 미마. 황태자 저하의 안목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속으로는 진짜 까탈스러운 망할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수로라도 입 밖에 냈다간 무슨 살벌한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실비아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아부를 떨자 우라엘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포리쉐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딸랑 두 음절 대답이 끝이네. 무슨 벽이랑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래서야 대체 언제 공략할까. 실비아가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가만히 미소 짓고 있는데, 여전히 포리쉐한테 시선을 고정한 우라엘 황태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산책은?”
“이제 가려고 합니다. 앗, 거기는 산책길이 아닌….”
고삐를 쥔 황태자가 말없이 걸음을 옮기자 당황한 실비아가 그 뒤를 따랐다. 이쪽은 늘 걷던 산책길 가는 방향이 아닌데? 포리쉐는 활동량이 많은 말이라서, 간혹 달리기장 말고도 동산이나 황궁의 수많은 정원 중 하나를 산책하곤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동산도 정원 쪽도 아닌 다른 길로 향했다. 호위 중이던 흑기사들도 황태자의 주위를 에워싸며 뒤따랐다. 머뭇거리며 걷던 실비아는 갑옷에 부딪히지 않게 종종걸음으로 황태자를 쫓아갔다.
‘어디 가려는 거지? 나도 같이 가도 되는 건가?’
건물을 나온 황태자는 학처럼 긴 다리로 거침없이 걸었다. 마찬가지로 키가 2미터에 육박하는 흑기사들도 어려움 없이 성큼성큼 걸었다. 실비아만 짧은 다리로 그 뒤를 아등바등 쫓아갔다.
‘본인들은 다리가 길지만 난 아니라고. 한 걸음 뒤에 소외된 이웃이 있다는 걸 알아줄 순 없을까나.’
한참을 쫓아갔을까. 그들의 앞에 아담한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크기는 조그마하지만, 황궁의 건물인 만큼 은은한 기품이 흘렀다. 황궁에 이런 조그만 궁이 있었나?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황태자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내뱉었다.
“반려마를 기른 적 있다고 했었나?”
“앗, 네. 저하. 심지어 외제마였지요. 그 덕에 제가 지금 포리쉐를 무사히 돌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비아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자 황태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어갔다.
“그럼 말을 잘 타겠군.”
“네?”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포리쉐를 나보고 타란 소리인가? 저렇게 싸고도는 반려마의 등을 선뜻 내놓는다는 건…. 이건 설마 프러포즈?
고질병인 도끼병을 아직 치유하지 못한 실비아가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리는데, 황태자와 흑기사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엄한 생각 중이던 그녀는 우라엘 황태자의 등에 코를 부딪치는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아이코!”
“무엄하다, 감히 우라엘 저하의 등에 코를 박다니.”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실비아의 목 아래 서늘한 기운이 닿았다. 검을 들이댄 흑기사가 투구 사이로 흉흉한 눈빛을 내뿜었다.
‘세상에나. 이건 실수라고! 설마 날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겁먹은 실비아가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자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흑기사가 검을 집어넣더니 그녀에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다.
“조심하도록.”
“네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실비아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게임을 저장했다.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데, 게임 저장을 때때로 하는 건 필수였다. 시스템을 끈 그녀는 곧 시무룩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목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인생이라니, 삶의 질이 팍팍 떨어지는구나.’
일개 사용인이 황태자의 몸에 부딪힌 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실수인데, 물론 그래도 잘못이지만. 신분제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지라 이해는 하는데 서러움이 밀려왔다.
‘어째 이상한 생각을 할 때마다 목숨을 위협받는 것 같네. 쳇, 안 한다, 안 해. 이상한 생각 안 한다고!’
뇌에 힘을 줘 음란 마귀 세포를 잠재운 실비아는 한층 건전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옆으로 비켜선 흑기사들 덕에 앞이 훤히 드러났다.
‘뭐야, 웬 말들이 이렇게….’
일렬로 늘어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명마들을 보며 실비아가 침음을 삼켰다. 이 조그만 건물의 정체는 마구간이었다. 얼마나 관리가 잘 된 건지 마구간 특유의 동물 냄새가 나지 않아서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잘 훈련된 명마들은 얌전해서 울음소리도 잘 내지 않았다.
황태자는 그녀를 힐끗 돌아보더니 구석에 있는 말을 가리켰다.
“저 아이가 적당하겠군.”
“…….”
‘저 말은 왜요’라고 물으려던 실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기에 입을 함부로 열기가 겁나기도 했고, 아무리 공략 전이라지만 제가 죽을 뻔했는데도 아무 감흥이 없어 보이는 황태자에게 정이 털려서였다.
‘황태자 입장에선 평생 봐오던 일이라 아무 감흥이 없단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걸 어떡해. 왠지 이런 생각을 한 골백번은 더한 것 같긴 하지만, 고작 몇 초라고 해도 정 털린 건 정 털린 거야, 흥!’
속으로 꿍얼거리고 있는데 마구간지기가 갈색 말을 그녀의 앞에 데려왔다. 우라엘 황태자는 포리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산책이 아니라 포리쉐를 직접 타고 밖으로 나갈 거야. 준비해.”
“네? 설마 제가 이 말을 타야 하는 건가요?”
놀란 실비아가 자신과 말을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건 묻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