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구구, 구구구.”
“뭐? 어휴, 편지를 전달하는 길에 터번 두른 사람들한테 잡혀 비단옷 입고 억지로 춤도 췄다네요.”
“어우, 나쁜 사람들! 고생이 많았구나, 사람들 앞에서 희롱까지 당하다니….”
입을 손으로 가린 실비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참둘기를 쳐다봤다. 그것은 고개를 젓더니 조그맣게 새소리를 냈다. 부리 사이로 나오는 힘없는 소리엔 체념이 서렸다.
“구구구.”
“그것 말고도 더한 게 있지만, 일단 말을 아끼겠다네요.”
“아휴, 그래, 이제 더 말 안 해도 돼. 우선 쉬어, 참둘기.”
실비아는 참둘기를 고이 품에 안았다. 세상의 쓴맛을 톡톡히 본 참둘기는 눈빛에 건방짐이 사라지고 퍽 온순해졌다. 이런 효과라면 험지에 참둘기를 가끔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참둘기가 알면 기함할 생각을 잠시 한 실비아는 새 발에 묶인 편지 두 장을 끌렀다.
“그래도 어떻게 일을 잘 해내고 돌아왔구나. 장하다, 우리 참둘기.”
실비아가 편지를 읽을 것 같자 세비스는 별다른 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루카와 노엘의 편지일 게 뻔하니, 괜히 그녀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기 싫어서였다.
‘우선 루카의 편지부터 볼까나.’
붉은색의 편지지는 참둘기가 워낙 생고생을 해서 그런지 흙이 많이 묻어있었다. 후- 하고 먼지를 불어낸 실비아는 소파에 앉아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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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실비아.
별일 없지? 실비아는 강하니까 누가 함부로 해코지 못 하겠지만, 혹시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 사막 왕국에 노예가 많이 필요하다네.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서, 기왕이면 오늘만 사는 뒤탈 없는 놈이면 좋겠는데… 흠.
하여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난 이제 사막에 도착했어.
거리가 멀어서 한동안 편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랐어. 참둘기가 중요 부위만 가리고 나타날 줄이야. 실크 입 가리개를 하고 있더라. 복장을 보아하니 춤을 추다가 온 것 같아.
궁전에서 한창 연회 중이라 참석한 거 아닐까 싶다만…. 나는 관심 없어서 방에서 쉬고 있었거든. 아무래도 조그만 새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볼거리였겠지?
음, 언제 어디서나 흥을 잃지 않는 참둘기 모습, 보기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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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놀다 온 거야?”
편지를 읽던 실비아가 참둘기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조막만 한 얼굴이 무척 억울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하긴, 거지꼴이 다 됐는데 신나게 놀았을 리가 없지. 실비아는 다시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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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편지가 계속 딴 길로 새네.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자면, 계약이 생각보다 빨리 성사될 것 같아. 너한테 갈 날이 앞당겨져서 기뻐. 애당초 계획은 한 달이었지만, 잘만 하면 삼 주 안에는 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말이야, 사막은 자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너를 위해 무슨 선물을 준비할지 고민하고 있어.
낙타를 구매할지, 아니면 신묘한 힘이 있다는 보물을 피라미드에서 도굴할지 고민 중이야. 아, 도굴이라고 해서 놀라진 마. 이곳 주민들은 이게 일상이래. 자기 무덤을 아무도 도굴하지 않으면 인생 헛산 거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까! 뭐가 됐든 입이 떡 벌어질 선물을 들고 갈게.
그리고 다른 얘긴데, 여기도 오염된 기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나 봐. 엘리셔스 제국은 어떤지 묻더라고. 세상이 정말 어찌 될는지. 그래도 실비아가 있으니까 세계 평화는 지켜지겠지?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여기랑 제국까지 거리가 꽤 되는 걸로 알아. 참둘기가 힘들어 보이니까 답장은 안 해도 돼. 제국에 도착하면 다시 편지할게.
-너를 늘 생각하는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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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빨리 돌아올 것 같다고? 큰일이네.’
실비아의 낯빛이 하얘졌다. 아직 우라엘 황태자의 바지에 손도 못 대봤는데, 한 달 후 돌아올 예정이던 루카가 예상보다 빨리 온다니, 무척 곤란했다.
편지를 읽어내리던 그녀는 선물 얘기에서 멈췄다. 도굴이라, 도굴이 일상인 나라라면 불법은 아닌 셈이니 별로 놀랍진 않았다.
‘기왕이면 신묘한 힘을 가진 보물을 가져왔으면 좋겠네.’
사막이니까 지니가 감금된 램프 같은 걸 가져오면 좋겠다 싶었다. 근육질의 인외남을 감금플해서 나만의 것으로….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윗입술을 혀로 핥던 실비아는 부엌을 힐끗 살핀 뒤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다행히 세비스는 그녀의 추잡한 표정을 못 본 듯했다.
다시 명랑만화 여주처럼 눈이 초롱초롱해진 실비아는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편지의 내용을 되새겼다. 참둘기가 고생할까 봐 답장을 하지 말라니, 루카도 가끔 보면 은근히 착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루카가 착한 부분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정확히 어디가 또 기특할 정도로 착하냐면….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야외플을 생각하니 실비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몇 번이고 되새겨도 참 좋은 추억들이었다.
엄한 상상을 하며 꺄르르 소리 내어 웃은 그녀는 초록색 편지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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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자매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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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의 첫 구절을 읽은 실비아가 풉, 하고 작게 웃었다. 신전 집무실에서 노엘의 것을 오럴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참에 엘베우스 신전의 신도가 돼볼까. 그러면 노엘과 할 때 좀 더 배덕감을 느낄 수 있을 테지.
변태 같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팔걸이에 웅크리고 있던 참둘기의 기겁하는 눈빛에 잽싸게 표정 관리를 했다. 크흠. 눈 감고 잠이나 잘 것이지, 주인의 표정이나 살피다니!
참둘기에게서 몸을 돌린 그녀는 편지지를 다시 읽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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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없는 수도에서 잘 지내고 계신가요, 편지가 올 줄 몰랐는데, 참둘기를 보고 너무 놀랐네요. 이 조그만 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이곳은 게이트를 사용해야 올 수 있는 장소입니다. 날짐승이 오려면 활화산 지대를 지나야 하는데….
휴, 그에게는 말만 통한다면 사과를 전하고 싶군요. 불붙은 채 공중에서 추락하는 참둘기를 보자마자 그의 생명에 대한 염려보단 실비아 님의 편지를 읽을 수 있단 사실에 기뻐해 버렸답니다. 바로 미안해져서 신성력을 부어 치료해 줬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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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둘기가 불타고 있었다고?!’
깜짝 놀란 실비아가 참둘기의 몸을 살폈다. 신성력을 부어줘서 그런지 그을린 흔적은 없었다. 사막에서 고생한 것까진 그러려니 했는데, 이 귀엽고 소중한 새의 몸에 불이 붙었었다니. 정말 잔인한 일이었다.
세비스가 요리 중인 부엌으로 달려간 실비아는 야참으로 먹으려고 놔뒀던 고급 치즈를 떼어와 참둘기에게 급여했다. 영문을 모르는 참둘기는 좋아하며 냠냠 받아먹었다.
“수고했어, 참둘기야.”
실비아는 그를 짧게 위로한 뒤 편지를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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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중요한 얘기를 꺼내자면, 여기 상황이 심각합니다. 생각보다 확산 속도가 빨라요. 이대로면 조만간 제국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오염된 기운은 산발적으로 던전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요. 일반인에게 유출하면 안 되는 기밀이지만, 실비아 님은 신탁을 받으신 영웅이시니 긴밀히 말씀드립니다.
신탁이 또 내려오진 않았나요? 신께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나요. 저도 신탁을 들었기에 실비아 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군요.
오염된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야, 우리도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실비아 님도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엔 참둘기가 운 좋게 활화산지대를 건너고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다음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서라도 답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편지하겠습니다.
-자매님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는 노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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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내용이 들어있어.’
루카의 편지처럼 이 편지에도 던전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신탁이 또 내려왔을 리가. 그런 건 사실 없잖아. 그녀의 미간에 실금이 그였다. 신탁 비슷한 거라고는 씨앗 상자의 씨앗을 다 모으고 오염된 기운을 모두 없애라는 게임의 목표 말고는 들은 적이 없었다.
‘설마 이 게임, 시간제한이 있는 건가?’
실비아는 초조해졌다. 최근에 얻은 아이템 <멀리 있는 이를 비추는 망원경>을 사용하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부작용이 있었지. 만약 공략을 제때 하지 못해서 오염된 기운이 수도까지 침범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게임 오버가 되는 것일까.
‘깔깔거리며 놀고 있을 때가 아닐지도.’
실비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시간제한이란 말은 게임 어디에도 없었지만, 새로 획득한 아이템의 페널티나 여러 정황상 서둘러 공략을 하는 게 맞을 듯했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했던 항해게임을 떠올렸다. 시간제한이 없는 줄 착각하고 망망대해를 의미 없이 항해하거나 플레이어 집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21세기가 도래했고, 게임은 그냥 나락으로 향했던 경험이었다.
‘그렇게 될 순 없지. 세이브 파일이 달랑 하나라 처음으로 돌아가지도 못하잖아?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진 실비아는 노엘의 사랑이 담긴 구절들을 보며 다시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오염된 기운이 사라지면 함께 할 수 있다는 말. 그러게,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어. 두 달 넘게 게임에 진심으로 임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곳에 영원히 살고 싶단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까. 좀 고생스럽긴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재밌는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아, 공략이 완전히 끝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타 다른 게임들처럼 모든 게 멈추는 걸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