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실비아 님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인간으로 변신하고 올게요.”
“아, 아냐. 이런 모습도 귀엽고 좋은걸.”
실비아가 급하게 손사래 쳤다. 늑대 모습의 세비스는 귀여운 것과 더불어 그녀의 마음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다. 성체인 세비스와 마주하자면 불현듯 그날의 일이 떠올라 눈 둘 곳을 몰랐는데, 늑대인 그 앞에서는 무척 편안했다.
“그래요? 음, 실비아 님이 정 그렇다면….”
좋다니.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별거 아닌 것에도 설레기 마련이다. 세비스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검은 늑대 털에 가려 붉어진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세비스가 머뭇거리고 있자 실비아가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이리 와.”
“네….”
실비아가 먼저 저를 불러주자 세비스의 가슴이 찡해졌다. 며칠간 예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제 주인의 태도를 보며 세비스는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했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에 딱 집어 대화할 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늑대로 변신한 모습에 바로 경계를 풀 줄이야. 진작에 이 방법을 쓸걸.
실비아 곁으로 다가간 세비스가 웅크려 앉자 나긋나긋한 손길이 닿았다. 그는 잠시 움찔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꼬리를 살랑였다.
대형견 같은 이 모습은 언제 봐도 귀엽단 말이지.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등을 쓸었다. 내친김에 턱도 살살 긁어주었다. 그녀의 손길에 세비스는 기분이 좋은 듯 그르릉거렸다.
실비아는 그를 만져주는 한편 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가 훈훈한 게 지금 딱 블루 얘기를 꺼낼 적기였다.
“세비스. 내일 퇴근하고 뭐해?”
“네? 왜요? 왜요, 실비아 님? 뭐 재밌는 거 하시게요?”
붉은색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저녁에 함께 어디 놀러 가자고 하시려는 건가. 원래는 수도 내에 개업한 타코야키 상점들을 시찰하러 갈 계획이었지만, 실비아와 함께 놀 수 있다면 만사 다 제쳐둘 수 있었다.
무척 궁금해하는 세비스의 모습에 실비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마주 본 자세가 아니었기에 세비스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실비아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뗐다.
“음, 재밌는 일은 맞긴 한데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어. 혹시나 바쁜 일이 있다면 다 해결하고 늦게….”
늦게 들어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세비스가 대답했다.
“아뇨. 저 할 일 없어요. 집에 온종일 있을 계획이거든요. 왜요?”
“…그래? 으음, 그렇구나. 아…. 사실 말한다는 걸 까먹었는데,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해서 말이야.”
“친구요? 황궁에 출근한 지 이제 나흘 차인데 벌써 친구를 사귀셨어요?”
세비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점심시간 말고는 그녀를 만날 일이 없는 데다가 소속이 아예 다른지라, 실비아와 친해질 만한 사용인이 가늠되지 않았다. 설마 기사 중 한 명은 아니겠지.
그의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실비아의 등 뒤에서 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세비스는 일전에 블루를 본 적 있지 않나?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블루를 보고 세비스가 뭐라 뭐라 말했던 기억이 난다. 워낙 노엘과 루카에 정신이 팔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쁜 반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음. 혹시 그날 기억나? 유토피아 백화점 근처에서 노엘 님도 보고 루카, 아니 그 옥장판 사장님도 봤던 날.”
“그분들 얘기는 갑자기 왜요?”
세비스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설마 놀러 온다는 친구가 그 둘 중 하나인가.
힐끗 그의 표정을 살핀 실비아는 일순 간담이 서늘해졌다. 늑대 모습의 세비스는 표정을 굳히니 평소보다 훨씬 무서웠다. 웃을 때는 귀여운 리트리버 같았건만, 지금은 초식동물의 모가지를 물어뜯으려는 맹수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어우, 갑자기 왜 이래.’
목을 손으로 쓸며 제자리에 있단 걸 확인한 실비아는 엉덩이를 살짝 옮겼다. 목숨 유지를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녀는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노엘 님과 옥장판 사장님은 지금 무척 바쁘셔. 그분들 얘기는 아니고, 혹시 그날 봤던 날개 달린 드래곤 기억나?”
“날개 달린 드래곤요? 아! 푸른색 날개!”
“어, 맞아.”
세비스는 애써 잊었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노엘과 루카인지 뭔지 옥장판 사장, 그리고 실비아 님의 듣고도 믿기 힘들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일을 계기로 성체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화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나머지 일들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푸른 날개는 워낙 인상적이었던지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드래곤은 왜? 실비아 님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러고 보니 둘이 무슨 사이지. 그 얘기를 지금 꺼낸다는 건 내일 올 친구가 그 드래곤이란 걸까. 대체 언제 드래곤이랑 친해지신 거지?
세비스가 실비아를 가만히 응시하자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일 놀러 올 친구가 그때 봤던 드래곤이거든. 이번 던전의 안내자였지. 내가 장어구이랑 이것저것 해산물을 많이 가져왔었잖아. 그 드래곤이 알고 보니 바다랑 관련이 있어서….”
실비아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건 처음이기에 혹시 모를 세비스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두 번째로는 저와 블루가 별 사이 아닌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였다.
야한 얘기는 전부 빼고, 블루가 심해왕국의 왕자이며 재밌는 친구고, 너도 보면 좋아할 거라며 한참을 떠든 실비아는 세비스의 표정을 살폈다. 인간이 아니라 늑대의 모습이라 그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그 친구가 내일 놀러 온단 거야. 집에 있을 계획이라니, 함께 놀면 되겠네.”
“음, 드래곤은 저도 평소에 무척 만나보고 싶었던 종족 중 하나예요. 지혜의 종족으로 유명한 데다가 신비한 능력을 많이 갖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주둥이를 다물었다. 만나보고 싶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실비아 님이 처음으로 집에 초대한 남자가 드래곤이라니. 단순히 종족으로만 비교한다면 늑대는 드래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만나보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친구라곤 했지만, 왠지 친구가 아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아. 실비아 님과 드래곤이 다정하게 대화를 한다면, 과연 그 모습을 보고 태연하게 웃을 수 있을까?’
마음이 쓰린 건 둘째치고, 친구라고 해도 성별이 수컷인 존재를 집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늑대족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세비스는 할 말을 생각한 후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집에 오는 건 좀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본능적으로 꺼려져요. 저는 늑대족이니까….”
“아! 그런 게 있었어?”
실비아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세비스가 긴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갔다. 현생에서 감명 깊게 봤던 동물 다큐가 그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보금자리를 침범당해 화가 난 맹수가 침입자를 도륙 냈던가. 뭣도 모르고 구역을 침범했던 하이에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었다.
‘어차피 블루는 세비스를 보는 게 목적이니까 밖에서 봐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굳이 집으로 블루를 데려와 세비스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실비아는 윤기 나는 검은 털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뗐다.
“그래. 그러면 밖에서 보는 건 어떨까? 그 친구가 널 궁금해하거든. 네가 늑대 수인이고 집사라는 것까지 소개해뒀어.”
“…좋아요. 내일 퇴근 후 밖에서 보도록 하죠.”
세비스의 말끝에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실비아가 흠칫하며 옆을 봤지만, 세비스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잘못 들었냐? 귀를 후빈 실비아는 부드러운 털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 * *
“구구….”
“어머, 참둘기? 너 참둘기 맞지!”
기지개를 하며 거실로 나오던 실비아는 다 죽어가는 참둘기 소리에 깜짝 놀라 베란다로 달려갔다. 누가 닦다 버린 일회용 행주라고 해도 믿을 법한 비주얼의 참둘기가 처참한 모습으로 베란다에 서 있었다.
모래에 절어버린 깃털은 물론이고, 조막만 한 머리통에는 썩어가는 단풍잎이 하나 붙어 있는 걸 보니 고초를 심하게 겪은 것 같았다. 그는 부들거리며 기어 오더니 실비아의 발치에서 털썩 쓰러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실비아는 참둘기를 얼른 주워 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세상에! 참둘기야, 정신 차려 봐.”
“국….”
그것은 단춧구멍만 한 눈을 잠시 뜨더니 다시 손바닥에 힘없이 엎어졌다. 급하게 휴지로 돌돌 말고 따뜻한 물을 먹이는 등 응급처치를 하자 참둘기가 겨우 눈을 떴다.
“무슨 일이에요? 어, 웬 걸레…. 아니, 참둘기?!”
“그래, 걸레가 아니라 참둘기야.”
소란스러운 상황에 방에서 맨손 운동 중이던 세비스가 벌컥 문을 열며 뛰쳐나왔다. 그가 걸레로 오인할 만큼 참둘기의 꼴은 처참했다. 젖은 수건을 가져와 참둘기의 몸을 닦은 실비아는 잠시나마 죄책감에 시달렸다.
‘루카와 노엘에게 번갈아서 편지를 전달해주다 보니 참둘기가 이 꼴이 돼버렸구나. 물론 가엾은 건 가엾은 거고 제 몫은 해내는 게 맞지만….’
옥수수를 먹자 기운을 차린 참둘기는 말이 안 통하는 실비아는 내버려 두고 세비스에게 이것저것 하소연을 시작했다. 구구, 왈왈 소리가 한참을 오가고 세비스가 참둘기의 머리통을 검지로 쓰다듬으며 그의 고초를 전달했다.
“죽을 뻔했다나 봐요. 사막을 지나가다가 반달칼을 든 도적 떼를 만났다나? 통구이 될 뻔한 걸 겨우 빠져나왔대요. 그리고 선인장에도 몇 번 찔리고, 나중엔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신기루에 시달렸다네요. 음, 너무 허기져서 전갈을 사냥해보려다가 독에도 중독되고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실비아가 침음을 삼키는데, 참둘기가 세비스에게 또 뭐라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