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별 의미 없는 한숨일지도 모르는데도 실비아는 괜히 눈치를 주는 것처럼 느꼈다. 평소처럼 팍팍 안 먹는다고 그러는 건가? 그녀는 다급하게 토스트를 베어먹다가 고질병 중 하나인 급체를 하며 캑캑거렸다.
“켁켁, 아이고, 컥, 나 죽어.”
놀란 세비스는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차마 실비아의 등을 두드려줄 정도로 뻔뻔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물을 따라 실비아에게 건넸다.
“물 드세요.”
“커헉…. 으으, 고마워.”
실비아는 물을 연거푸 여러 잔 마시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시선을 식탁에 둔 세비스가 텅 빈 물병을 흔들었다.
“실비아 님, 근데 물 채우셔야 하는데…. 이게 마지막 물병이네요.”
“아, 맞다! 주전자로 물을 채워놓는다는 게 깜빡했네.”
먹다 만 토스트를 접시에 내려 둔 실비아는 황급히 일어나 싱크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주전자를 꺼낸 뒤 찬장을 열어 빈 병들을 한가득 꺼냈다. 세비스와 마주 보며 식사하고 있자니 도저히 숨 막혀서 견딜 수 없었다.
빈 병들을 모두 물로 채우고도 그녀는 싱크대 앞을 떠나지 않았다. 괜히 물병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싱크대 앞을 서성이고 있으니, 그녀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불쑥 앞으로 내민 손에는 먹다 만 토스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
“실비아 님, 이 정도면 거의 보름치 아녀요? 물은 이미 다 채우신 것 같으니 드시던 건 마저 드세요.”
“어? 어어, 그래. 먹어야지.”
그녀는 세비스 손에 들린 토스트를 낚아챘다. 아니, 낚아채려고 했다. 하지만 세비스가 손을 위로 드는 바람에 공기만 움켜쥔 셈이 됐다.
‘얘가, 얘가 지금 뭐 하는 거야? 키 크다고 나 놀리는 건가? 엇?’
몇 번 말 없이 공중에서 헛손질한 실비아는 기가 차서 뒤돌았다. 순간적으로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칠 뻔한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쑥 뺐다. 세비스도 한발 물러선 덕에 일정 거리가 유지됐다.
눈으로 욕하는 실비아를 내려다보는 세비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지금 웃어? 어이가 없어진 실비아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올라갔다.
“뭐야? 내놔.”
“이제야 눈을 제대로 마주치시네요.”
“쳇, 뭐 별거라고. 째려볼 수도 있거든?”
가자미눈을 뜨며 흘겨본 실비아는 토스트를 뺏었다. 두 손이 잠시 스쳤지만, 인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부러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실비아가 토스트를 다 먹을 때까지 세비스는 가만히 내려다봤다.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이긴 했지만, 아까처럼 숨 막히진 않았다. 그가 저처럼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이렇게 군다는 걸 알아챘으니까.
실비아가 손가락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싱크대에 털자 그가 입술을 뗐다.
“아직 출근 시간 한참 남았는데. 정말 운동하러 나가시게요? 밖이 깜깜해요.”
“…그러게. 배부르니까 잠이 슬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손을 씻은 실비아가 하품하자 세비스가 빙긋 웃더니 소파를 가리켰다. 원래는 며칠 동안 피할 생각이었던 실비아지만, 그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외면할 순 없었다. 그녀가 엉거주춤하게 소파에 앉자 세비스가 구석에 놓인 무릎담요를 던졌다.
“덮고 잠시 주무세요.”
“못 일어나면 어떡해. 어중간하게 자면 더 깊이 잠드는데….”
말과는 달리 실비아는 소파에 웅크린 채 잘 준비를 마쳤다. 따끈한 무릎담요까지 덮으니 눈꺼풀이 벌써부터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비스를 보고 순간 실비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그는 소파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그녀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깨워 드릴게요.”
“아, 그래, 고마워….”
안심되자 잠이 몰려왔다.
‘어제의 일은 단순 해프닝이었던 거야. 봐, 세비스는 여전히 똑같잖아. 피해 다니는 것보단 이렇게 바로 푸는 게 더 낫긴 하네.’
옆으로 웅크린 실비아의 가물가물한 시야로 쫑긋거리는 검은 귀가 보였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완벽히 잠이 들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세비스는 고개를 뒤로 꺾어 실비아가 자는 걸 확인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잠이 많은 제 주인이 새벽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 원래 일찍 일어나는 세비스는 간밤의 일 때문에 잠을 설쳤고, 평소보다 더 이르게 기상했다. 그도 원래는 며칠간 실비아를 피해 다닐 작정이었다.
그런데 욕실에서 들릴 리가 없는 물소리가 들렸고, 저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놀란 초록빛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다분히 충동적으로 혼자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휴우.”
실비아가 관계 회복으로 안심한 것과 달리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지금과 같이 지내고 싶은 바람과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충동이 번갈아서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냐.’
깊이 잠든 실비아를 힐끗 본 세비스는 소파에 한쪽 팔을 올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손을 뻗자 따뜻한 숨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자는 사람의 숨결을 손가락으로 느끼다니.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걸까. 어제 실비아가 말한 대로 자신은 변태인지도 몰랐다. 안심하라며 재워놓고 하는 짓이 이딴 거라니.
‘왜, 이게 뭐가 어때서. 실비아 님이 죽었나 살았나 확인해보는 것뿐이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붉어진 눈가를 찌푸리며 벽시계를 노려보았다. 한숨도 못 자 피곤했지만, 지척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정신이 더욱 맑아졌다.
* * *
세비스와 실비아의 관계는 표면적으론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색했던 그 날의 일은 황궁에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빠르게 잊혔다. 정확히는 실비아가 일부러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라고나 할까.
그녀는 며칠간 제 몸을 혹사시켰다. 정말로 바쁘기도 했고, 잡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포리쉐를 열심히 돌보면서 가끔가다 출몰하는 림보의 썸을 도와주었고, 점심에는 세비스를 만나서 다음 일반 던전이 어디 있을지 의논했다.
또한, 남는 시간은 물론 퇴근 후에도 훈련장으로 달려가 헝겊 인형 때리기에 매진했다. 그러다 보면 집에 와서는 녹초가 돼서 씻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그건 실비아가 의도한 바였는데,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늦은 밤이 되면 세비스와 단둘이 거실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생각 안 하려고 해도 그날 일이 생각나는 걸 어떡하냐고. 걔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여.’
그 일 때문에 세비스가 싫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저는 세비스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좋았다. 문제는 단둘이 있으면 몸이 닿았던 순간과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는 거였다. 허벅지에 닿던 불타는 고구마라고 믿고 싶은 단단한 무엇과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
‘저도 남자예요.’
그 말대로 세비스는 남자가 맞았다. 그것도 신체가 아주 건강한 남자.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으으, 안 돼!”
잡념을 잊어야 해. 실비아는 망치를 마구 휘둘렀다.
불타는 고구마 사건이 있고 난 뒤, 어언 며칠이 지나 오늘은 목요일. 그녀는 퇴근 후 여느 때와 같이 훈련장에서 헝겊 인형을 패는 중이었다. 망치가 불구대천의 원수 대하듯이 헝겊 인형을 마구 때리자 먼지가 사방으로 풀풀 날렸다. 보존마법이 걸려있기에 망정이지, 일반 인형이었다면 이미 넝마가 되었을 정도의 연타였다.
옆에서 함께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그녀의 폭주에 넋을 놓았다. 저 여자랑 원수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하나같이 떠올랐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친 실비아는 인형 옆에 뜬 상태바를 째려보며 다시 망치를 휘둘렀다.
‘어제 3천 번이라고 메시지가 떴었지. 미친 거 아냐? 어느 세월에 1만을 채워?’
의욕에 불타는 실비아는 있는 힘껏 헝겊 인형을 내리쳤다. 세비스 생각에 이어 코빼기도 안 보이는 우라엘 황태자에 대한 불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날 우리 분위기 좋지 않았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거야? 말해 봐, 우라엘!
벌써 손주 보는 상상까지 마친 그녀였건만, 아무래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딴 것 같았다.
‘우라엘 걔는 개인 훈련장에서 보자느니 뭐니 사람을 실컷 설레게 해놓고는 대체 언제 부르는 거람! 황태자가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지!’
우라엘이라고 생각하며 헝겊 인형을 신나게 때리고 있는데, 어느새 실비아의 곁에 다가온 샤이가 열정적인 망치질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엄청나네요.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었겠어요. 쉬어가면서 하시죠, 실비아 님.”
“엇? 네. 휴우, 근데 어째 헝겊 인형이 첫날보다 훨씬 튼튼해진 것 같네요. 이만큼 두들겨 패면 원래는 너덜너덜해졌던 것 같은데.”
망치를 내려놓은 실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헝겊 인형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 헝겊 인형은 흠씬 두들겨 팼는데도 아직 멀쩡했다. 샤이는 물을 건네며 실비아의 의문에 대답했다.
“실비아 님이 첫날 헝겊 인형을 너덜너덜하게 만드신 덕에 황궁 마법사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셨어요. 이대로는 황궁 마법사의 체면이 안 선다나? 그분이 마력 확장석을 가지고 오시더니 보존마법을 강하게 걸어주셨죠.”
“아아, 그랬군요. 맞네, 마법이든 뭐든 써서 더 강하게 하면….”
샤이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더 튼튼해진 헝겊 인형을 보고 있자니 순간 잊고 있던 스킬이 떠올랐다. 그녀의 페이보릿 스킬 <손은 눈보다 빠르다>! 세비스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헝겊 인형을 팰 때 스킬을 써볼 생각을 못 한 것이다.
‘맞아. 그 스킬로 헝겊 인형을 빠르게 두들겨 패면 되잖아! 이건 타격 횟수가 중요한 거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