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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57화 (357/372)

357화

거기서라도 수습을 해야 했는데, ‘저도 남자예요.’라고? 미쳤지 완전. 그는 뒤통수를 문에 부딪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색한 표정으로 제 손을 거부하는 실비아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거실에서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계속 복기했다. 여러 번 되새김질하다 보니 실비아의 어색한 표정은 점점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실비아 님은 이제 날 경멸할지도 몰라. 내일 따로 살자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울적해진 세비스는 힘없이 침대에 엎어졌다. 바닥에 앉아서 생각하다간 밤을 꼬박 새워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뒤늦게 후회해봤자 뭐하겠나. 이미 엎어진 물인걸.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자기 그른 것 같았다. 그는 뒤늦게 찾아오는 자괴감에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했다.

한편, 세비스의 방문이 닫힌 뒤 실비아는 허우적대며 겨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정신적인 충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허벅지에 닿은 건 불타는, 심지어 움직이는 고구마일 거야. 그래, 그게 맞아. 움직이는 망치도 있는데 고구마라고 없겠어?’

대충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그녀의 입에서 연거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일 어떻게 세비스 얼굴을 본담. 그래,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세비스를 대면하자. 그리고 말을 거는 거야.

‘세비스, 어제 네 주머니에 있던 건 뭐야? 날씨도 점점 쌀쌀해지는데 옷에 넣고 다니면 딱 좋겠던데. 방한용품으로 팔면 대박 나겠다. 우리, 한몫 챙겨볼래?’라고 태연하게 인사를 하면….

될 리가 없잖아! 절망에 빠진 실비아가 베개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그게 불타는 고구마일 리가 없잖아. 내가 익히 아는 그거라고. 어떡해, 앞으로 어떡하냐고!’

잘생긴 남자라면 무작정 군침부터 흘리고 보는 실비아였지만, 상식 있는 변태였기에 엄연히 가리는 게 있었다. 아빠뻘인 남자, 얼굴이 동물인 수인, 그냥 동물 기타 등등…. 그리고 함께 지내온 세비스였다.

방금을 떠올려보면 세비스는 실비아에게 관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육체적이든 감정적이든.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게임 시작부터 함께 한 세비스와 야한 짓을 한다니, 추호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 봤을 때부터 성체였다면 몰라, 지금에 와선 두 달 넘게 동고동락한 그가 남자로 보일 리가 없었다.

성체가 된 세비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공략 대상도 아닌 데다가 매일 집에서 보는 가족 같은 그와 굳이 이것저것을 할 필요가 있을까. 괜히 사이가 깊어졌다간 앞으로의 빙의 인생이 무척 곤란해질 터였다.

‘아니, 필요 없는 걸 떠나서 하고 싶지 않아. 으, 아니야.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말자.’

제가 왜 세비스와 가능 여부를 따지고 있는 건지. 실비아는 잡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억누르려고 할수록 망상의 크기는 점점 더 커졌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여자로 보고 있었던 걸까? 설마 성체가 되기 전부터…. 오만 생각이 다 들던 와중에 실비아는 세비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말 그대로의 의미라고 했었지? 그게 무슨 말일까.’

남자니까 어쩔 수 없이 흥분했단 소리인가. 몸이 닿았으니까, 굳이 별다른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저가 황궁 기사들에게 군침을 흘린 것처럼 세비스도 여체가 계속 닿으니까 불가피하게 흥분했던 게 아닐까.

‘음, 맞아. 그 말인가 보네. 나도 때때로 아무 남자한테 군침을 흘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 내가 그동안 세비스를 배려하지 못했어. 이제 완전히 성체가 됐으니 내외를 좀 할 필요가 있지.’

애써 납득한 실비아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그게 끝이 아니잖아.’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실비아는 세비스에게 앞으로 어색하지 않을 만큼만 내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생각이 어떻든, 앞으로의 원활한 게임 플레이를 위해서.

* * *

‘으으, 어쩔 수 없어. 아무리 고민해봐도 어색한 걸 어쩌란 말이야.’

실비아는 새벽같이 일어나 욕실에서 조용히 몸을 씻었다. 씻고 일찍 출근해서 쪽잠을 잘 생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최소한 며칠간은 그의 얼굴을 태연하게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허억….”

슬리퍼 소리가 날까 봐 까치발로 욕실을 걸어 다니던 실비아는 순간 삐끗해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몸에 힘을 줘 막았지만, 근육이 놀랐는지 등허리가 아렸다. 허리를 받친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소리도 못 내고 고통을 견뎠다. 하마터면 ‘욕실에서 미끄러져서 사망.’이라는 데드 엔딩이 뜰 뻔했던 순간이었다.

끼릭-.

조그맣게 물을 튼 그녀는 칫솔에 치약을 짰다. 평소에는 분노의 양치질을 하는 게 습관인 그녀이지만, 오늘만큼은 고대 유물 대하듯 조심스럽게 이를 닦았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뿌연 거울을 닦았다가 흠칫 놀랐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한지라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와 있는 게,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급사하는 거 아냐? 휴, 어제 그냥 마사지 안 받고 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양치질을 끝낸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헹궜다. 제집에서 도둑놈처럼 씻고 있자니 현타가 밀려왔지만, 아침부터 세비스를 맞닥트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숨소리가 바깥에 들릴 리가 없건만, 잔뜩 긴장한 그녀는 입을 오므린 채 수건으로 몸을 토닥거렸다.

원피스 잠옷을 조심스럽게 입은 그녀는 문에 귀를 대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 안 일어난 것 같군. 얼른 출근 준비하고 나가야지. 그때까지 세비스가 깨지 않으면 좋으련만….’

제발 안 일어나길 바라는 일은 꼭 일어나는 법이다. 문고리를 돌린 실비아는 문을 당기자마자 붉은 눈과 마주쳤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세비스가 그 안으로 고개를 내민 게 먼저였다.

뭐야. 분명히 밖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실비아의 동공이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반면에 세비스의 눈엔 차분한 빛이 감돌았다.

“실비아 님. 이 시간에 왜….”

“어? 아아, 그냥…. 아침 공기도 좋겠다, 운동이나 좀 할까 해서.”

욕실 밖으로 나온 실비아는 괜히 스트레칭 자세를 취하며 씩씩하게 답했다. 하지만 세비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저절로 눈알이 옆으로 굴렀다.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세비스는 한숨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셨군요. 원래 기상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일어나시다니, 참둘기가 알면 놀라자빠지겠어요.”

평소에 알람시계로 겸업을 하는 참둘기는 목청이 터져라 짹짹거려도 일어나지 않는 실비아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가끔 정수리를 쪼며 일어나라고 재촉할 때도 있었는데, 그럼 실비아는 더 해보라며 다른 쪽 머리를 내밀곤 했다. 조그만 부리가 아무리 쪼아봤자 두피가 시원해질 뿐이니까.

이를 떠올린 실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꼬는 건가?’

그녀는 눈을 은근슬쩍 돌려 세비스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헛기침하곤 아직 어둑한 베란다 창문을 응시했다.

“그래. 놀라자빠질 일 맞지. 그럼 난 이만, 새벽 운동하러 갈게.”

“저도 같이 나갈게요. 기다리세요.”

“뭐….”

세비스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실비아는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렇게 되면 무작정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어색하단 걸 티 내는 셈이니까.

‘미치겠네. 쟤는 아무렇지 않나 봐.’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샤워를 마친 세비스가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다가 불안하게 티슈를 뜯던 실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살짝 찌푸린 그 모습이 순간 섹시하게 보이는 바람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어우, 안 돼. 눈깔 단속 좀 해야겠어,’

일순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 건 착각일까. 어이없어진 실비아가 노려보기도 전에 세비스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저 싸가지 없는. 사춘기 비슷한 게 온 게 틀림없대도.’

세비스는 청소년이 아니라 성체이니 사춘기라기보단 갓 성인이 된 자 특유의 허세병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가 씩씩대고 있으려니 세비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못마땅한 표정의 실비아를 쳐다본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문을 열었다.

“운동도 좋지만, 간단하게 밥 먹고 나가는 게 어때요?”

“…그래. 황궁에선 아침밥을 안 주니까.”

어차피 대면해버린 이상 아침밥을 먹든 뭘 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실비아가 떨떠름하게 답하자 세비스가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토스트가 완성됐다.

머뭇거리며 식탁으로 다가간 실비아는 노릇노릇한 토스트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그때 실비아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배를 문지르는데, 세비스가 목을 울리며 작게 웃었다.

“많이 배고프셨나 봐요. 안 만들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 으응….”

얼굴이 붉어진 실비아는 주춤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픈 것과 별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토스트를 허겁지겁 먹어 치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녀가 야금야금 쥐가 갉아먹듯이 토스트를 먹고 있으려니. 맞은편에 앉은 세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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