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기분이 나빠지려고 한다니. 그녀는 눈썹 끝을 처량하게 내리곤 사과했다. 아무래도 마사지는 옷 위에 하는 것보단 맨몸에 하는 게 효과가 좋긴 할 터였다. 거기다가 다리를 해달라고 조른 건 자신이었고…. 세비스의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와서 놀라긴 했지만,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뭉친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기에 찝찝한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마사지는 제대로인 것 같네. 아휴, 아파라.’
실비아가 사과한 뒤 세비스는 묵묵히 허벅지를 지압했다. 그녀는 차마 세비스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을 응시했다. 허벅지를 스치는 손가락의 감각이 너무 선명해서 지나간 자리마다 은은한 열이 감돌았다.
바깥 허벅지를 골고루 지압한 세비스가 한숨을 내쉬더니 손바닥을 허벅지 안으로 미끄러트렸다. 허벅지 뒤쪽에 손바닥이 닿는가 싶더니, 안쪽 여린 살에 엄지가 닿았다.
움찔한 실비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앗, 거긴 하지 마. 이제 충분해. 슬슬 잘 시간인데….”
“여길 골고루 눌러야 다음날 다리가 안 당겨요.”
“읏, 잠깐 거기까진…. 안 해도 돼, 하지 마.”
허벅지 안쪽을 만지는 손길에 실비아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손을 막았다. 조그만 손이 바지 천 사이로 닿자 누르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세비스는 그녀의 제지를 무시하곤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계속 안쪽 여린 살을 지압하며 입을 열었다.
“아뇨. 할 건데요. 마사지해달라고 조른 건 실비아 님이잖아요. 저는 다 해드릴 거예요. 하나도 빠짐없이.”
“으아, 하지, 앗, 아파. 안 할… 악!”
세비스의 손길이 심하게 아팠다. 잔뜩 뭉친 데다가 약간만 힘을 가해도 아픈 부위를 강하게 눌러댔으니.
묘한 부위를 누른다는 불안은 고통 앞에서 싹 사라졌다. 아픔에 몸부림치던 실비아는 허리를 지탱하던 손이 갑자기 사라지자 카펫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뒤통수를 부딪친 충격에 눈물이 찔끔 나는데, 세비스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다시 손을 대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본 적 없는 비열한 미소에 실비아가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열렸다.
“빠짐없이 한다고 했을 텐데요? 마사지 더 할 거니까, 벌리세요 실비아 님.”
“뭐, 뭘 벌려? 안 해, 안 할 거라고!”
경악한 실비아는 있는 힘껏 발버둥 치며 등으로 기어갔다. 세비스는 기어코 그녀의 발목을 잡더니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우악스럽게 허벅지 한쪽을 벌리더니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제 다리 사이에 세비스가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실비아가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렸다. 충격이 커 보이는 실비아를 보고도 세비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허벅지를 손으로 휘감았다.
“왜 그런 표정이세요?”
“내가 다 잘못했어, 세비스.”
“뭘요?”
무감한 표정으로 물은 세비스는 뒷 허벅지에 무릎을 대고 누르기 시작했다. 또다시 근육을 정확하게 누르는 지압에 실비아는 입을 헙- 소리 나게 다물었다. 엄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라 마사지의 연장선이었구나. 그래, 알긴 아는데, 방금 상황이 이상한 건 맞았잖아.
실비아가 부루퉁하게 뺨을 부풀리는 와중에 세비스는 양다리를 착실하게 마사지해주었다. 방금의 충격이 무색하리만큼 손길이 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다리 마사지가 금방 끝나고 세비스가 손을 털었다.
“끝났어요. 실비아 님. 시원하죠?”
“응? 으응….”
뭔가 당한 게 없는데 당했다고 해야 하나. 실비아는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애써 부여잡곤 퀭한 몰골로 상체를 일으켰다. 술래잡기 때 저한테 잡힌 기사들이 울먹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잃은 게 없는데 뭔가를 잃은 기분이랄까.
넋을 놓은 그녀가 마치 부랑자처럼 널브러져 있자 조그만 웃음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 웃음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거실을 크게 울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세비스가 배를 잡은 채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하하, 아! 진짜 웃겨. 실비아 님 표정, 지금 엄청 웃긴 거 알아요?”
“그건, 네가 계속…! 휴, 아니다.”
실컷 사람을 곤란하게 해놓고 즐겁게 웃는 꼬라지라니. 실비아는 기가 막혀 여전히 키득거리는 세비스를 노려봤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장난이 좀 많이 짓궂긴 했지만, 불순한 의도가 없었던 거라면 어색해지지 않을 테니까.
“말해보세요. 제가 계속 뭘요?”
“!”
그러나 세비스는 오늘 저를 놀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세비스는 바닥에 양손을 짚은 채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가 부담스러웠던 실비아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렸다.
“그냥, 계속 이상하게 구니까.”
“이상하게 굴었다고요? 어떻게요.”
“참나!”
뻔뻔한 세비스의 태도에 실비아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방금 제가 한 행동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이건 나니까 봐주지 딴 사람 같으면…!
얼굴이 붉어진 실비아가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세비스가 입으로 손을 가린 채 숨죽여 웃었다. 웃는 걸 숨길 생각도 안 하는 걸 보니 제가 민망해하는 모습이 재밌는 모양이었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말이야. 난 이런 짓(?)에 일가견이 있는 여자라고.’
세비스가 입을 가리며 킥킥대는 모습을 흘겨본 실비아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너도 한번 당해 봐!”
“…네? 앗, 잠깐.”
순간 이상한 승부욕이 발동한 그녀는 예고 없이 세비스를 덮쳤다. 그의 입에서 ‘제가 잘못했으니 그만 하세요.’란 소리가 나오게 하고 싶은 충동에서였다. 올라탄 뒤에 마구 간지럽혀 그의 항복을 받아내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실비아는 그가 놀라면서 제 손길을 뿌리치려고 하면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며 마구 괴롭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비스는 그대로 실비아를 끌어안았고, 둘은 바닥을 뒹굴었다.
손아귀 힘이 이렇게 셌나?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느낌에 실비아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뭐 하는…. 악!”
엉켜있던 두 사람은 소파에 가로막혀 멈췄다. 소파 기둥에 머리를 부딪친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나왔다.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아 헤롱헤롱하던 실비아는 제 몸에 빈틈없이 닿은 뜨거운 체온에 숨을 들이켰다. 몇 번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덮칠 때와 달리 그녀의 등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세비스는 위에서 덮치듯이 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 바람에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거실에 울려 퍼졌다.
이상한 분위기에 실비아는 원래 의도대로 세비스를 간지럽히지도 못하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제 가슴을 누르고 있는 단단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닿은 부위마다 근육들이 작게 움찔거렸다. 어쩔 줄을 모르고 굴러가던 실비아의 눈이 경악으로 홉떠졌다. 허벅지에 딱딱하고 두꺼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이게 대체 뭐지? 세비스가 운동복 안에 뭐라도 넣어둔 걸까. 생수병이라든가, 고구마라든가….’
실비아는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제 허벅지를 옆으로 치우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벌리자 세비스의 그 단단한 무언가가 더 잘 느껴졌고, 괜히 자세만 더 야릇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으으. 미치겠다, 정말.’
실비아는 입술을 초조하게 깨물었다. 제발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그때, 세비스가 잘록한 허리를 단단히 옥죄더니 제 입술을 실비아의 귀 뒤에 파묻었다. 촉촉한 입술의 온기에 실비아는 얼어붙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한 손이 목을 받치더니 허리에 닿은 커다란 손이 등줄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끈적한 손길에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살짝 벌린 허벅지 안쪽에 닿은, 이젠 도저히 불타는 고구마라고 부정할 수 없는 뜨거운 살덩이가 순간 꿈틀거렸다. 정신이 출타할 것 같은 상황에 동그란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끝까지 모른 척할까. 그러려면 태연하게 말을 걸어야 하는데, 도저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비아의 몸이 점점 더 크게 떨리기 시작하자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췄다.
곧, 평소 세비스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실비아 님.”
“으응….”
실비아가 쥐어 짜낸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자 세비스가 한숨처럼 말을 뱉어냈다.
“…저도 남자예요.”
그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실비아의 양옆에 손을 지지하곤 가만히 내려다봤다. 붉은 눈에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실비아는 피하지도 못한 채 그 눈을 직시했다. 열기를 띤 눈동자에 얼핏 물기가 어리는 것 같은 찰나, 세비스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더니 한숨을 흘렸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앞머리를 초조하게 쓸어넘겼다. 그러고는 실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잘 시간이잖아요.”
“응? 아…. 맞아.”
하지만 실비아는 그 손을 잡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색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비스는 다시 입술을 뗐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주무세요. 방금은 그냥, 말 그대로의 의미니까….”
“으응….”
“하아, 말 그대로예요. 정말로, 말 그대로. 먼저 잘게요.”
어색해하는 실비아에게 다시 손을 내밀 순 없었다. 세비스는 물기 어린 눈으로 실비아의 대답을 잠시 기다리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세비스는 문을 닫자마자 한숨과 함께 바닥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한 번만 더 참으면 되는 거였는데, 어째서 못 참고 실비아 님을 껴안아 버린 걸까. 심지어 등을 쓰다듬고 달콤한 살결에 입술을 묻었다. 그것뿐이면 차라리 다행이련만, 발기한 제 것이 실비아의 허벅지에 닿은 데다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봐선 백 프로 허벅지에 닿은 것을 알아챈 눈치였다.
‘죽어버릴까. 숨겨도 모자랄 판에 그걸 대놓고 가져다 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