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어…. 등이 아파서, 척추 주변만 좀 눌러주면 돼.”
“오늘 훈련하셨다고요. 어떤 거 하셨는데요?”
세비스는 말을 이어가면서 양 손바닥을 나비처럼 펼쳐 등을 감쌌다. 기립근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내려가자 실비아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완전 시원해. 흣, 거긴 좀 아파.”
“뭐 했는데요? 제가 다 풀어드릴게요.”
어색함을 이겨내고 드러누운 보람이 있었다. 환상적인 마사지에 기분이 좋아진 실비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으응, 그게…. 핫, 으으. 그래, 거기. 망치를 휘둘렀더니 팔도 아프고, 계속 짚 인형을 가격했거든. 오래 서 있어서 그런가, 다리도 아프고…. 흐으, 좋아.”
“아아, 다리도?”
“응. 심지어 몇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왔잖아. 온몸이 다 쑤셔.”
사실 온몸이 다 쑤시는 이유는 블루와 야한 짓을 격하게 했기 때문이지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실비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이런 식으로 근육이 쑤시는 건 연고를 바르거나 <매가 약이다>를 써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망치로 스스로를 때리고 싶지 않기도 했고.
기립근을 부드럽게 푼 세비스는 손을 더 밑으로 내렸다. 잘록한 허리가 그의 양손에 착 감겼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정돈한 그는 실비아의 허리에 손을 댄 채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실비아 님 몸은 정말 신기하네요. 맛있는 걸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허리가 가늘어요?”
“응? 아, 그건….”
실비아가 묘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옆구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떨어졌다. 기분 탓이었나? 그녀는 팔베개를 만들어 머리를 벴다. 그때 잠시 떨어졌던 손이 엉덩이에 닿았다.
“어…?”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계속 서 있으면 여기가 은근히 결리거든요.”
세비스가 둥그런 엉덩이에 손을 댄 채 엄지로 어느 한 지점을 꾹 누르자 실비아의 허리가 튕겨 올랐다. 그의 말대로 엉덩이도 뭉치는 건지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읏, 그렇네. 그런데도 뭉치… 아, 흐읏. 아파, 살살….”
“…많이 아파요?”
실비아는 고개를 겨우 끄덕이며 계속 신음을 흘렸다. 세비스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가라앉고 엉덩이에 닿은 손이 지나치게 뜨거웠지만, 고통에 시달리는 그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앗, 이거, 으윽. 너무 아파.”
“조금만, 참으세요.”
세비스의 입안에 침이 계속 고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는 머리는 이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길이 멈추고 세비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그래야 덜 아파요.”
“으응…. 앗, 왜?”
숨을 천천히 내쉬던 실비아가 깜짝 놀라 버둥거렸다. 세비스가 그녀의 허리 밑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세비스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돌아요.”
“어? 아아, 응.”
분위기가 너무 이상했다. 세비스는 단지 순수하게 마사지하는 것일 뿐인데, 점점 실비아의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변태 같은 제 뇌가 또 망상을 펼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어색한 티를 낸다면 저번처럼 세비스가 비웃을지도 몰랐다. 실비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뒤돌았다.
“헉!”
“왜요?”
뒤돌자마자 붉은 눈과 마주친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세비스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은은한 조명을 받아 얼굴이 어두웠다. 평소와 달리 어둡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묘했다. 어쩐지 모르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는 느낌이었다.
세비스가 시선을 피하며 묻자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함부로 말을 못 하겠어.’
누워서 마사지 받지 말걸. 괜히 세비스가 여기저기 주무르니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 아닌가. 어깨 마사지를 받을 때만 해도 이런 묘한 기분은 아니었는데…. 숨 막히는 분위기가 어색했던 실비아는 빨리 마사지가 끝나길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이어지는 손길이 없기에 이상하다 느낀 순간, 머리 위로 무언가 드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실비아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커다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느낌상 세비스가 제 얼굴 양옆에 손을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면 숨결이 느껴질 가까운 간격이었다.
실비아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왜?”
“실비아 님…. 하아, 아니에요.”
얼굴을 가리던 그림자가 걷혔다. 뜻 모를 한숨을 내쉰 세비스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손 마사지해드릴게요.”
“응, 고마워.”
방금의 어색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세비스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는 망치를 드느라 혹사당했을 조그만 손을 꼼꼼히 주물렀다.
역시 엎드려있는 바람에 과하게 생각했던 걸까? 실비아는 개망신 사건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세비스의 순수한 의도를 또 제멋대로 곡해했다간 이번엔 망신으로 끝나지 않겠지. 한동안 지독하게 어색한 사이가 될지도.
애써 생각을 물리친 실비아는 일부러 표정을 밝게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세비스는 잠시 흠칫했지만, 다시 손 마사지에 집중했다.
‘되게 열심히 하네. 나도 참, 무슨 엄한 생각을 한 거야.’
어색한 분위기는 기분 탓이었던 게 틀림없다.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싶었던 실비아는 싱글거리며 입술을 뗐다.
“세비스, 너 정말 보면 볼수록 완벽해.”
“뭐, 뭐가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칭찬에 세비스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는 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더욱 얼굴을 내렸다.
실비아는 촘촘하게 난 속눈썹이 눈 밑에 그늘을 만들어내는 걸 보며 말을 이어갔다.
“뭐긴, 완벽한 신랑감이란 거지. 집안일 잘하지, 성실하지, 돈 낭비도 안 하지, 거기다가 마사지도 잘하잖아.”
“전 잘 모르겠는데요.”
세비스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검은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니 무척 부끄러운 듯했다. 실비아는 그의 등을 팡-소리가 나도록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긴! 자신감을 가져. 너 혹시 일부러 칭찬 들으려고 시치미 떼는 거 아니지?”
실비아는 말을 끝내곤 조그맣게 키득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비스는 그녀의 손을 말없이 계속 주물렀다.
이게 아닌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계속 어색해졌다. 실비아는 몸을 돌려 그의 허벅지 위에 제 종아리를 올렸다. 갑자기 실비아의 다리가 허벅지 위에 올라오자 세비스가 깜짝 놀라 주무르던 손을 떨어트렸다.
“실비아 님! 왜, 갑자기….”
“마사지해줘.”
실비아는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마사지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세비스가 제 몸을 만지는 게 뭐 어떤가, 아무 의미 없다. 그녀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가볍게 돌리고 싶었다.
“손은 이 정도면 됐어! 다리 해줘, 다리. 많이 걸어서 아프다고 했잖아. 응?”
“와, 실비아 님은 정말, 정말….”
세비스는 기가 찬 듯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허벅지 위에 얹힌 매끈한 종아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방금 제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녀에게 키스하려다가 참았단 걸 알고는 있을지.
계속 치밀어오르는 불순한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건만, 실비아의 자각 없는 행동이 세비스를 미치게 했다. 그녀가 유혹할 의도가 없단 건 뻔히 알지만,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군다면 유죄가 아닌가 싶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세비스의 모습에 실비아의 눈에 의문이 떠오를 찰나 헐렁한 바지 안으로 큼지막한 손이 들어왔다. 그녀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세비스가 남은 손으로 허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바지에 왜 손을….”
“왜요. 마사지해달라면서요? 뭐 잘못된 거 있나요.”
세비스는 표정을 갈무리한 채 뻔뻔하게 눈을 마주쳤다. 뭐가 문제냐는 듯한 그 표정에 실비아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먼저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졸라댄 건 저였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대뜸 바지에 손을 집어넣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실비아의 불안한 표정에도 세비스는 꿋꿋이 손을 움직였다. 걸리는 것 하나 없는 부드러운 허벅지가 그의 손바닥을 스쳤다. 손이 골반 근처까지 닿자 세비스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만져선 안 될 부위까지 닿을 것 같았다. 너무 깊숙이 들어온 손에 놀란 실비아는 다리를 휘저었다.
“뭐, 뭐야. 어디까지 손을 집어넣는 거야. 세비스 이 변태 자식!”
“변태라뇨. 변태는 마사지 좀 한 것 가지고 이상한 생각 하는 실비아 님이죠. 옷 위로 주무르면 근육 위치를 잘 알 수 없어서 손을 넣은 것뿐이에요.”
“내가 변태라고?!”
세비스는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옷 위로 만져도 마사지 정도야 할 수 있지만, 이미 손을 넣어버린 걸 어쩌란 말인가.
그의 표정은 너무 침착해서, 놀란 실비아가 오버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휘둥그레진 초록빛 눈을 무시한 세비스는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덮은 뒤 옆 라인을 엄지로 누르기 시작했다.
“아….”
뭉친 근육을 정확하게 누르는 지압에 실비아는 아파하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일단 마사지를 제대로 하는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바지에 손을 넣은 채 마사지하는 게 정녕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앗, 으으…. 시원, 흐 시원하긴 한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에…. 아흐으.”
“기분 탓이에요. 실비아 님이 먼저 마사지해달라고, 해달라고 하도 사정하셔서 정성 들여 해주는 건데. 오해받으니까 기분 나빠지려고 해요.”
“아! 으응, 미, 미안…. 오해 안 할게. 앗, 거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