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머리카락을 모두 앞으로 넘긴 그는 등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제 주인의 등을 만져보는 건 성체가 된 후 처음이었다.
‘엄청 작아….’
커다란 손을 펼치자 과장 조금 보태서 등이 다 가려졌다. 제 체격이 너무 커진 걸까. 아니면 실비아가 원래 이렇게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몸을 가진 걸까. 넋을 놓던 그는 실비아의 불만 서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뭐해, 세비스. 기라도 불어넣는 거야?”
“기라뇨. 제가 동대륙 출신도 아니고…. 놀라고 있었어요. 실비아 님 몸집이 너무 작아서.”
“칫, 네 손이 너무 커진 거지. 예전엔 너랑 나랑 몸집이 비슷했었다구.”
“아아….”
세비스는 의미 없는 감탄사를 흘리곤 손을 움직였다.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쥔 그는 하얀 목 아래에 위치한 승모근을 조심스럽게 엄지로 둥글렸다. 살짝 압을 주어 문지르자 실비아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앗…. 좋아, 시원해.”
“…….”
실비아는 단지 시원해서 감탄한 것뿐이지만, 이미 맛이 가기 직전인 세비스의 귀엔 야릇한 신음으로 들렸다. 한참 전부터 그의 아래엔 피가 잔뜩 몰렸다. 하체에 지배당한 뇌가 실비아를 끌어안으라고 명령했으나 세비스는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실비아에게 몸을 붙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엄한 생각으로 마사지하려니 죄책감에 양심이 쿡쿡 찔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두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미친놈 아닌가. 하지만 오 분 정도는 미친놈이 되어도 문제없겠지.’
애써 이성을 찾으려 노력하며 승모근을 주무르고 있는데, 움찔거리던 실비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 아프긴 한데 완전 시원하다. 손힘이 엄청 좋네. 당연하겠지만….”
“그렇죠? 완전 개운하죠?”
세비스의 물음에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순히 실비아의 몸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에 마사지를 시작했을 뿐, 더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조금만 더 주무르고 손을 멈추려고 생각했다. 시원해하는 그녀를 보니 불순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몹쓸 놈이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무르다 보니 현타가 찾아왔고, 그의 머릿속이 차츰 고요해졌다.
‘이딴 걸로 혼자서 느끼다니, 난 정말 최악이야. 그만하자.’
착잡한 표정을 지은 세비스가 손을 떼려고 하는 순간, 실비아가 다시 고개를 반쯤 돌리더니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세비스….”
“네?”
세비스가 되묻자 실비아가 손을 뒤로 뻗어 제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염치없지만, 등을 더 눌러줄 수 있을까? 허리까지. 너 마사지 정말 잘한다.”
“…등을 다요?”
조용해졌던 머릿속 세포들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인이 마사지를 더 해달라는데 어쩔 수 있나, 집사 된 도리로 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는 가엾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힐끗 봤다. 정말 한 번씩만 뭉친 곳을 눌러주면 살 것 같았다.
“으응. 이대로 마사지하긴 힘드니까, 내가 소파에 누울게. 딱 한 번만, 안 될까나.”
“눕는다니, 어떻게….”
흥분한 상태인 세비스의 귀엔 실비아가 하는 모든 말이 야하게 들렸다. 그가 묻자 실비아가 앉은 상태에서 조심성 없이 소파에 엎어졌다. 혹시나 세비스가 싫다고 할까 봐 자세부터 잡으려는 의도였는데,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입었던 탓에 스타킹을 신은 허벅지는 물론 순간 엉덩이까지 노출됐다.
‘와, 미쳤….’
세비스는 강한 시각적 자극에 얼굴은 물론 목까지 새빨개졌다. 살색 스타킹 사이로 실비아의 팬티가 비쳤는데, 아주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동공이 확장됐다.
“아이고, 실수.”
실비아가 아무렇지 않게 올라간 원피스를 내리며 세비스의 등과 소파 사이 빈 공간에 한 발을 끼워 넣었다. 그러면서 비키라는 듯 단단한 허벅지를 다른 쪽 발로 밀었는데, 그 바람에 스타킹에 감춰진 흰색 팬티가 다시 보였다.
‘벗기고 싶다.’
순간 불순한 욕망을 품었던 세비스는 자신이 한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실비아의 다리를 힘껏 밀쳤다. 나른하게 누워있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힘에 별안간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러그 위로 내동댕이쳐진 실비아가 데굴데굴 구르며 죽는 소리를 냈다.
“아악! 나 죽네! 뭐야, 머리 깨질 뻔했잖아.”
실비아의 우는 소리에도 세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한 생각과 실비아의 털털한 반응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무리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다지만, 원피스를 입은 채 철퍼덕 엎어지다니. 날 뭘로 보시는 걸까? 무생물? 아니면 반려동물 중 하나?’
저를 이성으로 안 보는 여자를 상대로 불순한 생각이라니. 자괴감이 찾아왔다. 실비아를 차마 쳐다보지 못한 세비스는 소파 구석에 몸을 붙인 채 무릎담요로 제 아래를 더 철저하게 감췄다.
데굴데굴 구르던 실비아는 세비스가 저를 밀쳐놓고도 묵묵부답이자 억울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세비스. 마사지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지. 날 이렇게 내동댕이치면 어떡해.”
“실비아 님.”
“왜!”
실비아는 분에 차 꽥 소리 질렀다. 세비스는 얼굴을 가리던 손가락 사이로 그녀를 힐끗댔다.
“좀, 제발 옷 좀….”
세비스는 눈을 질끈 감곤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했다. 눈을 감지 않으면 정말 앉은 채 사정하는 대참사가 발생할 수 있었다. 한껏 억누른 듯한 목소리에 실비아의 몸부림이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멎었다. 그녀는 붉어지다 못해 시커메진 세비스의 얼굴을 보곤 뒤늦게 원피스가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있단 걸 깨달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는 치마를 정리하며 사과했다.
“아아. 내 정신 좀 봐. 미, 미안해!”
“아니에요. 그냥, 조금만 조심해주세요…. 휴우.”
“으응…. 나, 난 잠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실비아는 안절부절못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제 방으로 사라졌다. 쾅-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세비스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정말 아냐.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방금은 정말 위험했다. 원래 제 주인이 털털한 건 알고 있었지만, 속옷이 훤히 보이는데도 자각 없는 모습이라니. 웬만하면 계속 모른 척하고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려 했으나, 그건 정말 변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앞으로 실비아는 제 앞에서 조심하게 될 터였다. 참 어색해지는 일이었으나 이대로 계속 불순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낼 순 없었다. 머릿속 한 편에 있던 악마가 계속 몰래 보자고 속삭였으나 차마 양심에 찔려서 더는 못 할 짓이었다.
‘말한 게 잘한 걸까. 앞으론 어색해지겠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세비스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실비아가 눈앞에 보이지 않자 나대던 심장이 점차 차분해지고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너무 편하게 굴었나 봐.’
황급히 방으로 들어온 실비아는 원피스를 벗으며 옷장을 뒤적였다. 방금 상황을 떠올린 그녀의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세비스는 이제 성체가 됐으니 정신뿐만 아니라 몸도 완전한 성인이 된 셈이었다. 근데 제가 너무 그를 배려하지 않고 동생 앞에서 하듯 편하게 굴었다. 같이 사는 식구라고 해도 성별이 다르면 기본적인 예의는 차렸어야 했는데, 심지어 세비스는 같이 산 지 두 달이 살짝 넘었을 뿐인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 너무 배려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편해서 깜빡 잊었어. 세비스가 얼마나 민망했으면 말을 꺼냈을까.’
세비스의 붉어진 얼굴이 그녀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원피스가 뒤집혀서 엉덩이가 살짝 보였던 것 같은데…. 실비아는 제가 허물 벗듯이 벗어둔 스타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보자 흰색 팬티가 보였다.
‘으아, 팬티가 보인 건 아니겠지? 민망해!’
그녀는 평소에 입던 벙벙한 실내 원피스가 아닌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것도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로. 문을 빼꼼히 열어 보자 세비스가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세비스…. 앞으론 조심할게.”
“…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방금은 살짝 좀, 그래서 말한 거니까 너무 조심하진 마시… 아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실비아가 다시 나오다니. 명상 중이던 세비스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단단히 챙겨입은 실비아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실망해버렸다. 이렇게까지 조심하란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쉬워하던 그는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힘줘서 눌렀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게 제가 진짜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억지 미소를 유지하며 실비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소파 앞에서 어슬렁거리더니 바닥에 드러누웠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세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시려고 그러세요?”
“저기, 아까 하다가 만 거는 마저 해야…. 해줄 거지?”
“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실비아는 조심성을 어중간하게 얻은 것 같았다. 방금 제가 한 말에도 불구하고 등 마사지를 해달라고 벌렁 눕다니. 이걸 반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제 나도 모르겠다.’
한숨을 흘린 세비스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저를 올려다보는 실비아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빨리해달라는 듯 몸을 흔들었다. 감당 안 될 정도로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세비스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굳은 얼굴로 실비아의 양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대로 껴안아 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저절로 거칠어지는 호흡을 숨긴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마른 등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실비아가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움찔했지만, 세비스는 이젠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다고 하셨죠?”